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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및 임정수립 백 주년 기념 사업 첫 발 문재인 대통령이 3일 오후 서울 중구 옛 서울역사 '문화역서울284'에서 열린 '3.1 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출범식에서 내빈들과 대장정의 출발을 알리는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3.1 운동 및 임정수립 백 주년 기념 사업 첫 발문재인 대통령이 3일 오후 서울 중구 옛 서울역사 '문화역서울284'에서 열린 '3.1 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출범식에서 내빈들과 대장정의 출발을 알리는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보수정권 9년 만에 박근혜가 탄핵되고 문재인 정권이 수립되었다.

문재인은 후보 시기에 임시정부기념관건립을 약속하는 등 앞선 정부들과는 역사인식이 크게 달랐다. 2019년은 김자동에게 남다른 '역사적 의미'가 주어진다. 3.1혁명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할 일도 많았다. 

문재인 정부는 3.1혁명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기념사업회(위원장 한완상)을 구성하고 국제학술포럼 등 여러 가지 사업을 추진하였다. 김자동은 한완상 위원장과 만나 사업을 공유하거나 상호 협력을 다짐했다. 

김자동은 2019년 4월 5일 서울에서 〈3.1대혁명과 대한민국임시정부헌법 - 민주공화국 100년의 평가와 과제〉주제의 국제학술대회를 열었다. 헌법이론실무학회와 공동주최한 것이다. 그는 이 뜻깊은 해를 맞아 여러 가지 일을 준비하였다.
 
독립운동가 그라피티 외벽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나흘 앞둔 7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열린마당 의정부터 발굴 현장 외벽을 따라 그라피티 아티스트 레오다브(LEODAV, 본명 최성욱)가 그린 독립운동가들의 모습이 소개되고 있다.
독립운동가 그라피티 외벽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나흘 앞둔 7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열린마당 의정부터 발굴 현장 외벽을 따라 그라피티 아티스트 레오다브(LEODAV, 본명 최성욱)가 그린 독립운동가들의 모습이 소개되고 있다. ⓒ 연합뉴스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임정이 원한 건 한민족 통합과 국민주권의 민주공화국"이었음을 역설하고 "임시정부가 꿈꿨던 나라와 지금 대한민국의 모습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때는 조국이 반으로 쪼개질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니까."라고 분단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인터뷰 주요 대목이다.
  
- 민주공화제 정착을 위해 임시정부는 어떤 노력을 기울였나.
"사회복지국가는 임시정부에 관여했던 이들을 포함해서 당시 지식인 사회의 공통된 이상향 이었다. 정치에서의 자유, 경제·교육·문화 영역에서의 평등은 임시정부 초창기부터 핵심 정신이었다. 현재의 사회민주주의와 상당히 유사한데 시대적 배경의 영향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아시아는 전반적으로 경제기반 자체가 열악한 사회였고, 문맹률도 높았다. 사회발전을 위해 우선 개별 경제주체들의 수준을 높이고 균등한 교육을 받게 해야 한다는 것이 임정 초창기 어른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 임시정부의 정통성은 어디에 있나? 
"당시 해외 망명 독립세력은 온전히 통합되지 못했다. 다양한 사상적 배경 하에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임시정부는 한민족의 이름으로 이를 통합하려 하였다. 실질적인 성과도 있었다. 소련 등 공산주의 진영의 지원을 받고 있던 옌안의 독립운동 세력을 제외하고는 1945년 8월 15일 광복 전까지 사실상 모든 세력이 통합됐다. 1945년 초반까지도 '옌안파'로 대변되는 사회주의 세력을 통합하기 위해 조선독립동맹의 주석이던 김두봉을 만나 좌우합작을 논의하는 등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임시정부 정통성은 바로 민족연합의 정신에서 나온다."

-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임시정부 요인이 있나?
"백범 선생이다. 내가 날 때부터 이웃에 살다시피 했다. 이 어른으로 말할 것 같으면 만나는 사람 누구나 특별한 이유 없이 좋아했다. 어떤 사람에게도 따뜻하고 친절히 대하는 성품이었다. 그런데 공사가 분명해서 왜놈 앞잡이만큼은 무섭게 응징했다.

백범 선생이 처음 임시정부로 왔을 때 사람들은 선생의 생김새가 거친데다, 공부를 한 사람 같지 않다는 이유로 걱정을 많이 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금세 선생의 사람 됨됨이를 알아차렸다. 이동녕 선생의 뒤를 이은 차기 주석은 백범 선생이라는 암묵적 동의가 임시정부에서 만들어졌고 자연스레 주석으로 추대됐다. 임시정부 주석이 된 후에도 워낙 포용력 있게 일을 잘 처리하다보니 좌익에 경도된 이가 아니라면 모두가 백범 선생을 민족의 실질적 리더라고 생각했다. (주석 2)


주석
2> <국민일보>, 2019년 3월 26일(발췌).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상식인 김자동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김자동#김자동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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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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