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69시간 노동'으로 대표되는 정부의 노동시간 개편안에 대한 노동자, 시민들의 반발이 거세자 고용노동부 측은 '장시간 노동을 시키려는 게 아니라, 노동시간을 유연하게 하려는 것'이라는 식의 주장을 내놓고 있다. 69시간 하는 주도 있을 수 있지만, 35시간 하는 주도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간단한 산수로 보면 틀리지 않는 말이다. 하지만 말 그대로 '69시간 하는 주'가 발생하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장시간 노동, 야간 노동을 포함할 수밖에 없는 유연화
노동시간 유연화, 그것도 현재 한국에서의 노동시간 유연화는 장시간 노동, 야간 노동을 포함하지 않을 수 없다. 다들 아는 것처럼 한국은 근로기준법상 주 40시간 노동제를 채택하는 나라다. 영국, 독일 등 이른바 선진국들도 주 48시간 노동시간제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 노동시간이 이들 나라보다 훨씬 긴 이유는, 연장근로 12시간 상한제 때문이다. 40시간을 기본으로 하고, 연장근로를 하더라도 주 12시간은 넘기지 말아야 한다고 만든 상한제가 마치 주당 노동시간 기준인 것처럼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제대로 보면 애초 연장근로 주 12시간 상한제가 노동시간 유연화의 기제이다. 40시간이 기준인데, 주 12시간, 즉 기준 노동시간의 30%나 유연하게 일을 더 시킬 수 있도록 보장하는 법적 장치이기 때문이다. 대신, 사용자의 편의에 따라 유연하게 일을 시키더라도, 주당 52시간은 넘지 말자고 하는 약속인 것이다. 이걸 마치 "우리나라는 주 52시간 제도라서 주마다 단 한 시간이라도 52시간을 넘으면 사업주가 범법자가 되는 경직된 노동시간 제도"를 가진 것처럼 말하는 것은 현실을 엄청나게 왜곡하고 호도하는 것이다.
애초 장시간 노동의 폐해를 줄이자고 정한 상한인 '주당 52시간'을 넘어서는 유연화를 가능하게 하는 법적 변화는 무조건 장시간 노동, 야간 노동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 2021년 세계보건기구와 국제노동기구가 과로로 인한 질병으로 전 세계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망하는지 계산하여 발표한 적이 있다. 당시 과로 기준이 주당 55시간 이상 일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52시간에서 일을 더 시킬 수 있는 유연화는 무조건 장시간 노동이 발생하는 것이다. 거기에 이렇게 일하려면 야간까지 일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근로기준법도 그렇고, 노동자 건강 연구에서는 보통 밤 10시부터 다음 날 6시 사이의 노동을 야간 노동이라고 본다.
노동자 몸과 마음을 망치는 장시간, 야간 노동
이런 장시간 노동과 야간 노동은 노동자의 신체와 정신의 건강을 훼손한다. 누구나 밤새워 일해보거나, 며칠 연달아 장시간 노동을 하고 나면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는 것을 안다. 너무 당연하지만 '왜' 그런지 의학적인 설명도 이미 충분히 나와 있다. 장시간 노동과 야간 노동은 신체의 각성도를 높이는 '스트레스 반응'을 촉진시키고, 긴장도를 높이는 방향의 자율신경계가 항진된다. 이 때문에 혈압이 높아지거나, 소화가 안 되는 증상이 발생할 수 있다. 24시간 일주일 리듬에 맞춰진 다양한 호르몬 분비를 교란시켜 혈당 조절이나 수면 조절을 방해하는데, 최근에는 야간 노동으로 인한 유방암 등을 일으키는 원인이 이런 호르몬 교란 때문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런 직접적인 신체적 변화 외에 장시간 노동이나 야간 노동은 '불건강'한 생활 습관을 부채질하고, '건강'한 생활 습관을 갖기 어렵게 한다. 주 6일 파김치가 되도록 일했던 주말에 운동하지 않고 집안에 종일 누워 뒹굴뒹굴했던 경험이 없으신지? 밤새워 일하고 나서 몸은 피곤한데 오히려 잠이 오지 않아 술 한잔하고 잠을 청한 경험은 없으신지? 밤에 일하는 동안 잠을 쫓느라 믹스커피를 더 많이 마시고, 담배를 자주 피우고, 야식을 먹었던 경험은 없으신지?
당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야간 노동, 장시간 노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변화가 있다는 것은 이미 '과학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심지어 엄마가 장시간 노동을 하는 경우 자녀(특히 여성 자녀)가 비만해질 위험이 커진다는 연구도 있다. 연구진은 주로 식생활을 담당하는 여성 노동자가 장시간 노동을 하게 되면 자녀들의 식생활이 건강하지 않아지기 때문으로 보았다.
그뿐만 아니라 장시간 노동이나 야간 노동을 하면 '일/생활' 균형이 깨지는 것도 당연하다. 노동시간과 노동자 건강 연구에서는 월~금요일 오전 8시~오후 7시 정도 사이의 35~40시간 노동을 표준 노동시간이라고 하고, 이를 벗어나는 경우를 모두 불규칙 노동시간이라고 한다. 엄청난 장시간 노동이나, 야간 노동이 아니라 저녁 근무나 주말 근무만 해도, 그래서 총 노동시간이 비슷하다 해도, 이런 불규칙한 노동은 노동자의 일/생활 균형을 깨뜨리고 수면을 교란시킨다고 알려져 있다. 가족들과 보낼 시간, 규칙적으로 노동 이외의 생활을 꾸려갈 수 있는 계획, 친구를 만나고 사회적 관계를 보듬어 가기 위한 여유를 불가능하게 하고, 이것이 모두 스트레스가 되기 때문이다.
노동부에서는 몰아서 일하고 몰아서 쉬는 것을 특히 젊은 노동자들이 선호한다고 했지만, 사람은 혼자 놀지 않는다. 몰아서 일하고 몰아서 쉬는 것이 내 자유가 아니라 회사 사정에 따라 결정되면, 몰아서 일하는 기간과 몰아서 쉬는 기간이 가족 간에, 친구들과 맞는다는 보장이 없다. 지난주에 69시간 일하고, 이번 주에 주 3일 일하게 됐지만, 어차피 가족들이나 친구들은 주 5일 일한다면 무슨 소용인가? 중요한 지인의 결혼식이 이번 주말 예정돼 있는데, 갑자기 주초에 "이번 주는 집중적으로 일하고 다음 주에 20시간만 일합시다"라고 사장이 제안하면 어떻게 되는가?
주말에 항상 일하는 방식으로 불규칙 노동을 하는 전자제품 판매 노동자들은 가까운 지인의 결혼식에 가본 지가 오래됐다고 한다. 주변에 청첩장 돌리는 것을 꺼릴 정도라고 한다. 어차피 오기 어려운 사정을 서로 뻔히 아는데 부담이 될까 봐 걱정해서다. 이런 노동자들에게도 '사회적 휴일'이라고 하여 최소한 월 2회 이상은 주말에 쉬도록 보장해야 한다는 논의도 많은데, 오히려 이번 노동시간 개편안은 이렇게 '함께' 쉬지 못하는 노동자를 양산하는 방향이다. 이런 제도를 제안하면서 워라밸이니 시간주권이니 떠드는 노동부를 보면 '후안무치'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 더 적절한 '규제'
우리에게는 노동시간 유연화가 아니라, 더 '경직적'인 규제가 필요하다. 현재 노동시간 개편안이 추구하는 유연화는 노동시간이 노동자의 건강을 해칠 정도로 '유연'해지는 방향이다. 사실 한국에는 근로기준법상 노동시간 규제가 적용되지 않는 노동자도 너무 많다.
4인 미만 노동자들에게는 근로기준법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주 52시간 상한제도 적용 받지 않는다. 1차 산업 노동자들, 감시 단속적 노동자들은 노동시간 규정을 적용받지 않는다. 택배 노동자처럼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노동시간과 관련한 사회적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하는 특수고용·플랫폼 노동자들도 늘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과로사로 쓰러지고 있다.
장시간 노동만이 아니다. 현재 한국 근로기준법에는 야간 노동 관련 규제가 아예 없다. 불필요한 야간 노동을 줄이고, 야간 노동시간은 더 엄격하게 제한하는 법 개정이 필요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주 15시간 미만으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는 주휴수당과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을 수 있다는 법 때문에 '쪼개기'로 일하는 노동자들도 있다. 얼마 전 만난 한 편의점 노동자는 한 사장의 편의점 두 군데에서 각각 14시간씩 일하고 있었다. 한 편의점에서 28시간 일했으면 받았을 주휴수당, 퇴직금, 건강보험과 국민연금 직장가입을 받지 못하면서 말이다. 이런 노동자에게는 짧게 일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보장할 것은 제대로 보장하도록 하는 법적 정비, 규제도 필요하다.
다시 한번 여전히 엄청난 장시간 노동 국가이며, 그 와중에 노동시간 양극화까지 벌어지고 있는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은 '노동시간 유연화'가 아니라, '인간다운 노동시간'을 위한 적절한 규제다. 연장근로 관리단위 확대(이른바 총량규제)를 주요 골자로 하는 정부의 '근로시간 제도 개편방안'이 지난 3월 6일 발표되었다. 정부안은 우선 법정 근로시간이 주 40시간이 아니라 마치 주 52시간인 양 전제하고서 어떻게든 그보다 더 일 시킬 방법을 찾고 있는 법안이라 출발점부터 명백히 잘못되었다.
두 번째는, 연장근로 상한 제도의 입법 취지에 대한 인식('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이 부재한 상태에서 장시간 노동, 집중 노동을 가능하도록 하여 노동자 건강권을 심대하게 침해하는 문제가 있다. 세 번째는, 기준이 되는 법정 근로시간이 아니라 예외여야 할 연장근로에 대한 탄력적 운영 방식만을 제시하여 예외를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어 기본 근로시간 제도의 원칙을 훼손하며, 가뜩이나 만연한 연장근로를 더욱 공고하게 할 우려가 있다.
특히, '제도'와 '현실'의 괴리가 큰 한국 사회 노동 현장 실태를 외면하고 있는 문제점이 심각하다. 각종 노동법 위반행위가 판을 치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 이러한 구체적인 현실에 기초해 출발한 제도 설계가 아니다 보니 탁상공론일 수밖에 없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최민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 직업환경의학전문의가 쓴 글이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에서 발행하는 격월간 <비정규노동> 5,6월호 '특집' 꼭지에도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