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사 문패인 듯 황톳빛 담벼락에 '거북뎡(거북정)'이라는 옛 글자가 박혀 있다. 그 아래 활짝 핀 뽀얀 달맞이꽃이 우리를 반겼다. 이름으로 보아 조그만 정자인 줄 알았더니, 정원이 딸린 사랑채와 안채는 물론, 행랑채와 사당까지 번듯하게 갖춘 내로라하는 살림집이다.
지난 13일, 남녘 바다 득량만이 손에 잡힐 듯 내려다뵈는 '보성 봉강리 정씨 고택'을 찾았다. 문화재로 지정될 당시의 공식 명칭이지만, 건축보다 역사에 더 관심이 많은 이들에겐 '봉강 정해룡 생가'로 알려져 있다. 트집을 잡는다면, 역사를 애써 지우려는 무미건조한 명칭이다.
시대 잘못 타고난 비운의 인물?
봉강 정해룡. 현대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결코 모를 수 없는 이름이다. 누구는 '때를 잘못 만나 험난한 인생을 살았다'고 하고, 또 다른 누구는 '비정한 세태가 그의 이름을 지웠다'고도 한다. '분단의 현실 속에 풍비박산 난 가족사'라며 가문의 몰락을 안타까워하는 이들도 있다.
빨갱이, 빨치산, 국가보안법, 간첩, 연좌제…. 듣기만 해도 두려움에 떨게 하는 낙인의 용어들이다. 한 번 낙인찍히면 단 한시도 마음 편히 살아갈 수 없는 그 멍에들을 그와 가족들은 온몸으로 뒤집어써야 했다. 날 때부터 평생 얼굴과 이름을 숨기고 살아야 할 운명이었던 거다.
해방 직후 여운형과 정치적 운명을 함께하며 좌우 어느 쪽에도 서지 않고 분단을 막고자 했던 정해룡. 동경제국대학에서 유학한 수재로, 6.25 전쟁 중 어머니와 함께 월북한 그의 동생 정해진. 남파된 숙부를 따라 북에 갔다가 돌아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사형당한 첫째 아들 정춘상. 그리고 연좌제에 묶여 취직은커녕 학교조차 제대로 다닐 수 없었던 숱한 친인척들.
'시대를 잘못 타고난 비운의 인물'. 후세인들의 참으로 편리한 인물평이다. 어디 정해룡에게만 그럴까마는, 좋은 시대에 태어났다면 자신의 신념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으련만 해방 후 극심한 좌우 대립의 현실 속에 스러진 불운한 정치인 중 한 명이라며 눙치고 넘어가면 그만이다.
그에 대한 부박한 세평은, 거칠게 말해서, 기억해봐야 좋을 게 없다는 뜻이다. 그는 친일파가 득세하고 남과 북이 분단으로 치닫는 현실에 맞서 모든 재산과 하나뿐인 목숨까지 내걸었다. 그런데도 그를 그저 '역사의 패자'로 낡은 앨범에 사진 끼우듯 두루뭉술 외면하려는 태도다.
그도 여느 지주들처럼 살았다면
행랑채에 들어선 순간, 오래된 편견이 일순간에 깨지는 경험을 했다. 당시 지주 집안이면 으레 친일의 길을 걸었거나, 해방 후 일신의 영달과 가문의 안위를 위해 미국의 편에 섰을 거라고 믿었고, 또 그렇게 배워왔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금언을 금과옥조처럼 여겼다.
'노블리스 오블리주'. 부와 권력을 누리는 자들이 마땅히 지녀야 할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용어다. 교육과정이 개정되면서, 이젠 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보통명사'가 됐다. 일제강점기 전 재산을 처분해 독립운동 자금을 댄 우당 이회영의 가문이 대표적인 사례로 제시되고 있다.
정해룡 역시 그에 못지않다. 일제강점기 대농 집안의 장손으로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댔고, 고향에 양정원이라는 학교를 세워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또, 같은 호남의 대지주였던 인촌 김성수를 도와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인수에 협력하기도 했다.
문제는 그가 해방 직후 좌우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았던 것처럼, 분단된 후에도 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4.19 혁명 당시 혁신 정당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5.16 군사 정변 직후 5년 징역형을 받았다. 그의 삶은 감시와 사찰로 점철된 1960년대를 끝내 넘기지 못했다.
그의 죽음으로 끝났다면, 적어도 그의 이름 석 자를 문화재 명칭에서 굳이 지우려 하진 않았을 것이다. 1980년 광주 학살을 자행한 전두환 정권은 그의 가문을 '빨갱이 집안'으로 내몰아 의심받는 권력의 정당성을 메우려 했다. 이른바 '보성 가족 간첩단 사건'을 전격적으로 발표한 것이다.
그의 동생 정해진이 남파되어 첫째 아들 정춘상을 데리고 월북한 건 1967년에 벌어진 일이다. '보성 가족 간첩단 사건'이 발표되기 무려 14년 전이다. 전두환 정권은 호주머니 속 호두 만지작거리듯 하며 때를 기다리다가 여론의 관심을 딴 데로 돌릴 목적으로 활용한 셈이다.
일제강점기 여느 지주들처럼 살았다면, 그도 그의 가문도 대대손손 승승장구했을 것이다. 그가 후원했던 인촌 김성수의 가문에서 보듯, 대농이 정권의 뒷배로 재벌이 되고 부와 권력을 누려온 걸 익히 봐왔다. 그랬다면 그의 생가가 이토록 을씨년스럽게 느껴지진 않았을 것이다.
적막함이 감도는 생가
얼마 전 집을 지키던 종손마저 세상을 등진 뒤, 집 주위를 휘감고 있는 건 푸른 대숲의 바람과 마당을 가로질러 흐르는 세찬 물소리뿐이다. 건물도, 마당도, 세간살이도 그대로건만 인기척이 없으니 적막함만 감돈다. 그저 '도 문화재 자료 제261호'라는 차가운 이름만 남았다.
중문을 지나 오른편에 자리한 사랑채의 마루에 걸터앉았다. 정해룡이 한반도 모양으로 조성했다는 작은 연못 너머로 푸른 봉강 들판과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는 이 장쾌한 풍광을 내려다보며 모순된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의 소신과 행할 바를 숙고했을 것이다.
부러 녹슨 손잡이 당겨 방문을 열어봤다. 종손이 떠난 지 얼마 안 된 까닭인지 아직 온기가 남아있다. 방금 누군가 청소를 해놓은 듯 벽지도, 바닥의 장판도 새것처럼 말끔하다. 방문 틈 사이로 햇살이 비추니 어느새 방안이 환해진다. 벽에 걸린 액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勿爲歷史罪人(물위역사죄인)'. 직역하면, 역사의 죄인이 되지 말라는 뜻이다. 역사를 두려워하라는 의미이며, '노블리스 오블리주'와도 일맥상통한 경구다. 집안의 가훈이라는데, 정해룡이 왜 그토록 불의한 권력을 멀리하고 자초해 가시밭길을 걸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되돌아 나서는 길, 대문과 나란히 세워진 검은 빗돌에 시선이 머문다. 그의 이름을 지운 관광 안내판 옆에 서서 '우국지사 정해룡 선생 생가'임을 밝히고 있다. 아무런 장식도 없고 특별하달 게 없는 이 빗돌조차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품고 있다. 사연인즉슨 이러하다.
그가 57세를 일기로 사망한 1969년에 그를 존경했던 지역의 인사들이 집에 추모비를 제작했는데, 당시 3선 개헌을 획책한 박정희 정권에 의해 세워지지 못했다. 그로부터 26년이 지난 1995년이 돼서야 세울 수 있었다고 한다. 놀라운 건, 추모비 설립에 앞장선 인물이 그를 죽을 때까지 감시했던 사찰계 형사였다는 점이다. 정해룡의 인품과 덕성을 보여주는 일화다.
연좌제는 사라졌어도 여전히 국가보안법은 서슬 퍼렇고 아이들의 입에서조차 어원도 모른 채 빨갱이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현실이다. '빨갱이 집안'으로 낙인찍혀 망각을 강요당한 정해룡의 삶이 존경받게 될 날이 과연 오기는 할까. 부디 그의 생가를 찾는 발길이 이어지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