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연극으로 데뷔해 영화와 연극, 드라마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배우 김지성의 사는이야기입니다. [기자말] |
졸업한 지 까마득한 옛날이 되었어도 고등학교 3학년 새학기 첫 등교날, 선생님이 교실문 열고 문지방을 넘어오셨던 그날만큼은 어제처럼 선명합니다. 환한 미소로 등장하셨을 때 울려퍼졌던 박수와 함성소리, 고백컨대 다 진심은 아니었습니다.
무려 열두 분의 담임을 거친 저희 리액션이 그간 얼마나 자동화 되었겠습니까. 새로 편성된 반도 구면인 친구들로 가득하고 입시와 졸업이 코 앞인데 담임 또한 누가 된들 무슨 위안과 설렘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다음날 선생님의 첫 아침 조회는 졸린 눈 비비며 경직된 자세로 듣던 이제까지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마치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을 스크린 찢고 실사로 만난 듯했으니까요.
촌지는 받지 않겠다는 교사, 마음을 연 학생들
곧 학부모 면담이 시작된다는 공지사항에 학생들은 "네" 하고 영혼 없이 대답했죠. 이어 차분하고 단단한 음성으로 "그리고... 촌지는 받지 않을 거야. 그러니 편하게 오시라 전해드려." 그러고는 수업 잘 들으란 말과 함께 교실을 나가셨습니다. 멍하니 문 쪽만 바라보다가 삼삼오오 모여 서로에게 물어봤더랬어요. "더 달라는 얘긴가?"
집에 가서 들은 대로 전하니 부모님도 믿지 않으시더라고요. 선생의 입에서 촌지라는 단어가 직접 나온 것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한 경우도 처음이라 생소하기만 한 상황을 두고 뭐라 단정짓기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1주일의 학부모 면담기간을 마친 다음 날 아침 조회 때 선생님께서 들어보이신 수십 개의 흰 봉투들. 촌지 주인의 자녀들을 따로 불러 일일이 돌려주자 며칠 후 다시 등판한 흰 봉투 3개.
학부모들이 불쾌감과 함께 윗선을 통해 전달해 왔다며, 선생님은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을 말씀하셨습니다. 재차 학생들 손에 되돌려 주는 것도 무리가 있으니 곧 있을 체육대회 때 간식비로 쓰면 어떨지 의견을 구했습니다. 저흰 활짝 웃으며 좋다고 화답했죠.
불문율처럼 지켜져 왔기에 옳고 그름을 따져본 적도, 감히 그럴 수도 없었던 관행 앞에서 처음으로 올바른 가치관을 갖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약속대로 체육대회 때 푸짐한 간식을 제공해 주셨고 뒷짐 지고 계셨던 옆반 선생님들과는 달리 저희와 신나게 어울려 춤도 추셨습니다. 그때 진심으로 반색했던 저희들의 박수와 함성소리 기억하세요?
반장선거는 가히 월드컵 축구경기 보듯 손에 땀을 쥐었습니다. 선생님은 "후보지명에 성적우위 등의 자격제한을 두지 않겠다" 하셨지만 이 또한 그래본 적 없으니 반신반의 할 수밖에요. 반장은 모범생으로 일치감치 당선되고 하이라이트가 부반장 선거였죠. 공부 잘하는 아이와 인기좋은 아이로 최종 선출 되었는데 기존의 관습대로 갈 것인가, 과감하게 틀을 깰 것인가에 대한 내적갈등이 상당했습니다.
첫 투표결과 33대 33 동점이 나오고 재투표에서도 다시 동점, 거수로 3차투표까지 했는데도 또 동점이 되자, 학원 제치고 끝장을 보자며 긴장감과 재미가 최고조에 이를즈음 선생님은 당신께 선택권을 준다면 밤새 고민 후 결정해 오겠다 정중하게 요청하셨고 모두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내심 기대하지 않았지만요.
하지만 날이 새고 아침조회 때 발표하신 선생님의 최종 선택에 터져나온 학생들의 탄성. 몸이 얼어버린 당사자는 염색이 채 빠지지 않은 노랑머리로 이튿날 전교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운동장 교단에 올라 당황한 교장선생님, 학년 선생님들의 찌푸린 눈살 속에서 임명장을 받았습니다.
아이는 그 찰나에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다음날 긴 머리를 싹뚝 자르고 학업에 매진한 결과 그해 겨울 홍익대로 합격했으니까요. 점점 선생님과의 아침 조회가 어미새 기다리는 새끼들마냥 반가웠고 담소 나누듯 정겨웠습니다.
이과, 문과보다 대학진학률 낮은 '눈엣가시 예체능반'이란 차별에 맞서 홀로 싸우셨던 선생님을 위해 하나둘 마음도 모으기 시작했어요. 그래도 지 버릇 개 못준다며 여름방학 되니 슬슬 몸이 근질거려와 결국 보충수업을 땡땡이 치고 팥빙수 가게로 우르르 뛰쳐나갔죠.
방과 후 교무실로 전부 연행되고 주변의 혀 차는 소리와 손가락질 속에서도 말없이 손바닥 다섯 대로 체벌하셨을 때, 누구 하나 이죽삐죽대지 않고 붉어진 손바닥만 내려다 봤습니다.
저도 모르게 "아프다...!" 뱉었던 말은 손이 아닌 믿어준 사람에게 실망감을 안겼을 때의 죄송함과 부끄러움이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단 한 명도 반에서 이탈 행동을 하지 않았죠.
겨울 모의고사 때, 믹스커피 가루가 담긴 종이컵을 한 명 한 명의 책상 위에 올려놓고 손수 10L 양은 주전자로 힘껏 들어올려 정성스레 온수를 부어주셨던 선생님과, 책상 위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66개의 커피잔은 그 향과 함께 지금도 아름다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남아있습니다.
선생님의 여정을 어딘가에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배우가 꿈이라고 하자, 핀잔보다 격려와 응원만을 해주시며 졸업 후에도 지난 20년간 크고 작은 공연들을 빠짐없이 보러와주시고 최근 영화 <우수> 시사회 때도 자리를 빛내주셨을 땐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비단 저한테만 그러셨겠습니까. 얼마나 수많은 제자들에게 끊임없는 관심과 사랑을 주셨을지 생각만 해도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옵니다.
1990년 당시 극장에서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며 소리죽여 울었던 이유는 로빈 윌리엄스가 연기한 키팅 선생을 현실에서는 만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숨막히게 획일화 된 학교 사회, 집 안까지 들어와 촌지를 받아갔던 교사, 학생들 앞에서 대수롭지 않게 가한 폭력체벌 등, 그곳에서 참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마치 낭만 품은 환상 같았으니까요. 그러나 거짓말처럼 2년 뒤에 실제로 키팅선생님을 만났고, <죽은 시인의 사회>는 더이상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대학 시절, 잠시 귀향했다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참혹한 광경을 수복 때까지 생생하게 일기로 남긴 사실(역사박물관 소장), 2016년 겨울 광화문 광장에서 아흔살의 노모와 함께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고, 대통령 탄핵을 위해 촛불을 밝히던 모습을 발견했을 때 여전히 저의 키팅 선생으로 남아주셔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오마이뉴스> 배우 에세이를 시작하면서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를 꼭 쓰겠다 진즉 마음 먹었던 이유는, 잊지 않으려고 오래전에 적어두었던 미담 보따리를 다 풀어놓을 순 없어도 진심 어린 삶의 여정을 어딘가에 기록해 드리고 싶어서였습니다.
불현듯 스친 생각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선생님께 문자를 드려 퇴임이 언제인지 여쭤봤습니다. 그랬더니 올 2월에 퇴임하셨다며 첫 연금을 받았다고 답문해주셨습니다. 잠시 하던 것을 멈추고 차오르는 먹먹함을 추스린 다음, 예를 갖추어 마저 글을 써내려갑니다.
선생님, 제 인생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1992년을 선물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대학보다 삶의 근본을 먼저 심어주시고 없을 거라 포기했던 진정한 스승을 얻었으니 저에겐 더없는 행운이었습니다. 본시 선생의 업은 제자들 수만큼이나 그 삶의 무게도 무겁다고 했던가요.
당신의 '양영아'란 존함에 이응이 많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셨지만, 그 동그라미 하나하나가 제자들을 두 팔로 감싸 안아주고픈 울타리는 아니었을런지요. 영화에서처럼 책상 위에 올라서서 선생님의 새로운 인생 2막을 성원해드려도 될까요.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오! 캡틴, 마이 캡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