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18 항쟁에 참여한 시위대가 5월 20일 새벽 광주 남구 사직공원에서 노숙하며 비를 맞자, 부근의 유흥가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비를 피하게 도왔다는 증언이 나왔다.
농민운동가로 5.18 항쟁에 참여한 윤기현(동화작가·76)씨는 기자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5.18을 흔히 '민중항쟁'이라 하면서도 정작 항쟁에 끝까지 참여한 '민중들'은 소외돼 있다"면서 당시 노숙하던 시위대를 도운 유흥가 여성들에 대해 생생히 증언했다.
윤 작가의 증언에 따르면 화순 탄광 노동자, 양장점과 미장원 보조원, 철공소 직원 등 시위대 70여 명은 사직공원에서
5월 19일 밤부터 자정을 넘겨 20일 심야·새벽에 노숙했다. 하지만 19일 저녁부터 비가 내렸고, 20일 새벽 시위를 함께한 여성들의 안내로 인근 유흥가에 들어가 비를 피했다. 그곳 사람들은 시위대에게 마른 수건과 잠자리, 아침 식사까지 제공하며 적극적으로 도왔다.
이 증언은 '황금동 여성들' 외에 '사직동 여성들'도 5.18 항쟁 초기부터 참여했음을 알려주는 새로운 내용이라 주목된다. '사직동 여성들'에 대한 내용은 언론이나 문헌에 남겨진 바 없다.
다음은 지난 14일과 15일 이틀에 걸쳐 윤기현 작가와 전화 인터뷰한 내용 중 사직동 여성들과 관련한 내용을 일문일답의 형태로 정리한 것이다.
1980년 5월 19일 비오는 밤... 처음 나온 증언
- 5.18 항쟁에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
"5월 19일에 '함평 고구마 사건 승리 2주년 기념식'을 북동천주교회에서 하려고 했다. 그런데 간부들이 사전 연행되고 남은 사람은 도피해 행사를 못 했다. 그 행사에 온 전국에서 모인 사람들이 흩어지던 중 기독교농민회 몇몇 동료와 함께 시위에 참여했다."
- 5월 19일 시위를 마친 뒤 어디로 가셨나?
"저물녘까지 시위를 한 사람이 꽤 많았다. 우리는 어디 갈 데가 없으니까 (광주 남구 사직동) 사직공원에 가서 날을 새웠다. 계엄군이 공원까지는 안 따라왔다. 5월 19일 밤과 20일 심야·새벽에 그곳에서 잤다. 근데 20일 0시(자정)께 되니까 비가 와서 공원에서 잘 수가 없었다(과거 일기예보에 의하면 광주에는 5월 19일 오후 7시부터 조금씩 비가 내리기 시작해 9시께부터 제법 비가 많이 내렸다. - 기자 말).
가까운 여성회관이나 교회들에 들어가 보려고 했지만 모두 문을 잠근 상태라 들어가지 못했다. 사직공원 밑으로 가면 골목이 있는데 마침 그곳 술집 여성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그들이 '우선 비를 피해야 할 거 아니냐'며 우리를 끌고 그곳으로 데려갔다."
- 황금동 여성들 말인가?
"거기서 황금동은 상당히 떨어져 있다. 황금동이 아니다. 사직공원 밑쪽으로 가면 술집이 많이 있었다. 그들을 따라갔더니 문을 다 열고 우릴 맞아 줬다. 마른 수건도 내줘서 닦게 해줬고, 젖은 옷을 빨래해 주기도 하고, 모두 밥을 챙겨 주고 라면도 끓여줬다. 거기서 아침을 먹고 곧장 시위에 나갔다."
"사직공원 아래 골목, 사직동 유흥가 여성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 5.18 항쟁에 참여한 유흥가 여성들은 '황금동 콜박스' 직업여성들로 알려져 있다. 그들이 시위대를 숨겨 주고 돌아가신 분들 염을 하고 헌혈에 참여했다고 한다. 황금동 여성들을 착각하신 것 아닌가?
"아니다. 황금동 여성들도 참여했다. 하지만 우리를 도운 분들은 황금동 분들이 참여하기 이전이다. 그런 경험을 하신 분들 중에 아직 증언한 분들이 없어서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비를 피하도록 우릴 도운 분들은 20일 밤비가 올 때 하신 거고, 황금동 여성들은 21일부터 참여해서 그쪽에 공수부대가 배치됐다."
- 그럼 황금동 여성들은 5월 21일부터 참여한 건가?
"그렇다. 시위의 무대가 5월 21일부터 그쪽으로 옮겨지면서 그곳 여성들이 시위대에게 밥해주고 숨겨 주고 그러다가 대거 참여했다."
- 비록 비를 피하러 가신 거긴 하지만 특별한 경험을 하신 것 같다.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고 거기에 있는 여자들도 우리랑 다 똑같은 사람이었다. 선입견이 깨졌다. 진보적인 목사님들은 좋은 소리는 다 해 놓고는 막상 싸울 때는 없었다. 반면 생각지도 못했던 여성들이 우릴 도왔다는 사실에 감동했다."
- 사직공원에서 노숙하던 시위대가 70여명이라 하셨는데, 그들은 뭐하던 사람들이었나?
"화순팀, 곧 화순 탄광 노조원들로 보이는 탄광 노동자가 20명쯤 있었다. 그 사람들이 나중에 화순 탄광에서 다이너마이트를 가져왔다. 또 철공소 직원들, 목공소 초보 목수들 주로 그런 사람들이 함께 노숙했다."
- 그럼 처음에 시위에 함께한 기독교농민회 동료들은 없었는가?
"그분들은 자기네 친척 집을 찾아가거나 해서 다 집에 가고 나만 혼자 떨어져 남았다. 시위가 격화되고 그러다 보니 나는 작가이니 이럴 때는 피할 게 아니라 남아서 기록으로라도 남겨야겠다는 그런 생각을 하고 남았다."
- 노숙을 이틀간 같이한 사람들 중에 연락이 닿는 분이 계시나?
"그런 사람 없다. 그 당시에는 서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통성명도 안 하고 그냥 그렇게 뭐랄까 서로 눈인사 하고 그 정도지 신상 이야기를 안 했다."
- 70여명이나 되는 시위대가 모여 노숙을 하는데 거기 계엄군의 침탈은 없었나?
"저녁에는 자기네도 무서워서 행동을 안 했다."
- 비가 내리자 유흥가 여성들이 데리러 온 건가? 그들은 노숙을 안 했을 거 아닌가?
"그들도 유흥가에 안 들어가고 노숙했다. 남자들만 있었던 게 아니다. 양장점과 미용실 보조원들 같은 여성들도 함께 있었다. 그들은 월급도 제대로 못 받고 그저 일해 주고 밥 얻어먹는 정도였다. 옛날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5.18 시위가 격화되어 가게들이 다 문 닫고 영업을 안 하니까 그들이 자연스레 참여한 거다."
- 5.18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항쟁 현장에 남으셨다. 그런데 43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작가이신데도 여태 5.18 관련 글을 남기지 않았는데 이유가 있나.
"5.18을 누가 주도했냐를 놓고 지금도 막 싸우고 그러지 않나. 그래서 지금껏 내가 도청에 있었다는 소리를 안 했다. 왜 그러냐면 내가 분수대에 올라가서 '우리 끝까지 투쟁해야 된다'고 외쳤고, 도청 지도부에서 제일 강경파로서 '우린 기독교인이라 죽으면 순교이니 붙잡으면 끝까지 싸워서 여하튼 죽자'고 해서 다 죽기로 했다. 그러고 (나는) 어떻게 하든지 살아남지 않았나. 그래서 부끄러워서 내가 말을 못 했다."
- 선생님은 5.18도 경험하셨고 평생 농민운동을 하시며 고초를 많이 겪으신 걸로 안다. 독특한 인생을 사셨는데 작가이시니 후세를 위해 자서전이라도 남기셔야 하지 않나?
"지금까지는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침묵했다. 폐암 말기 선고받고 투병하느라 글을 쓸 여력도 없었다. 하지만 올해 4년째이고, 건강도 많이 회복되었으니 5.18 열흘 동안의 내 행적에 대해 써볼 생각이다. 그동안 나온 5.18 구술집들을 봤는데 자기가 직접 한 것은 별로 없고 전해 들은 걸 그냥 자기가 한 것처럼 이야기해 놓은 것들이 많아 아쉬웠다. 시민들과 돌아다니며 싸우고 조직한 내용들은 없고 학생 중심, 운동권 중심으로 기록되고..."
윤기현 선생은 누구?
윤기현 작가(1949~)는 해남 옥천면 필산리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 졸업 이후 농사를 짓고 살았다.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고 4H 활동, 교회 청년회 활동 등을 하면서 차츰 농촌 문제에 눈을 떴고 농민운동에 뛰어 들었다. 기독교농민회를 창립했고 전국농민회(전농) 등에서 농민운동을 꾸준히하며 수십 차례 연행, 구속 등의 고초를 겪었다.
5.18 항쟁에 참여했다가 살아남았고 이듬해 구속돼 석 달 동안 수감생활을 했다. 하지만 5.18 관련 '수배'는 풀리지 않았다. 1993년에야 윤한봉 선생과 함께 수배에서 풀려나 사면 복권됐다. 1976년에는 동화 <사랑의 빛>으로 기독교아동문학상을 받으면 동화작가로도 활동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서울로 간 허수아비> <해가 뜨지 않는 마을> <회초리와 훈장> <어리석은 독재자> <보리 타작 하는 날> <오늘의 아모스> <당산나무 아랫집 계숙이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