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나는 믿을 수가 없다. 글을 쓰고 있는 이 새벽, 내 발치에 은이가 없다는 사실을.
올해 초 출간한 책 <개와 살기 시작했다>의 주인공인 나의 반려견 은이가 하늘의 별이 된 지 한 달이 지났다. 30대에 부모님을 모두 여읜 나는 은이를 만난 후 종종 이렇게 생각해왔다.
'앞으로 내게 일어날 가장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은 은이를 잃는 일일 거야.'
정말로 그 일이 일어났고, 나는 지금 펫로스를 겪고 있는 중이다.
처음 일주일은 정말 미쳐가는 줄 알았다.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리다 화를 냈고 죄책감에 시달렸다. 친구와 이웃들의 위로가 고마우면서도 짜증스럽게 느껴졌다. 격렬했던 감정들이 가라앉은 후에도 불현듯 찾아오는 슬픔 앞에 종종 무너져내렸다. 때로는 은이가 없는 빈집에서 공포를 느끼기도 했다.
나는 이런 감정들이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상담자로 일하며 다양한 상실을 경험한 내담자들과 함께해 왔기에 내 감정 역시 잘 다룰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부모님을 여의었을 때보다도 더 큰 감정의 진폭 속에서 나는 완전히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다 만난 책이 사샤 베이츠가 쓴 <상실의 언어>다. 심리치료사인 저자가 배우자를 잃고 경험한 애도의 과정을 생생한 언어로 풀어낸 이 책을 통해 나는 나의 펫로스를 설명할 언어를 얻었다. 그리고 애써 은이를 떠나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위로를 받았다. 그러자 나의 감정들을 수용해낼 수 있었다.
모든 감정은 타당하다
아마도 애도 이론 중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5단계 이론일 것이다. 퀴블러 로스는 자기 자신이나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맞닥뜨릴 때 사람들은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의 5단계를 거친다고 이야기했다. 널리 알려진 만큼 상실을 겪어내는 가장 '정상적'인 과정으로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나의 경우 부인의 단계는 건너뛰었고, 분노와 우울이 뒤섞여 찾아오곤 했다. 분노는 동물병원의 막무가내식 진료를 주로 향했지만, 일상의 모든 것에 짜증이 나는 형태로 다가오기도 했다. 그러다 자책을 하며 괴로워했고, 불현듯 세상이 미워지곤 했다. 단계별로 나아간다면 언젠간 '수용'에 이르러 편안해질 것이라 믿을 수 있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으니 '수용'의 단계가 오지 않을 것만 같아서 겁이 났다.
내가 이 책에 빠져들게 된 것은 바로 이 지점이었다. 저자 베이츠 역시 나처럼 종잡을 수 없이 모든 단계가 한꺼번에 나타났다고 고백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퀴블러 로스 역시 실은 '단계'를 중시하지 않았으며, 이는 출판과정에서 대중들에게 명료하게 다가가기 위해 포장된 것이라 설명했다. 그리고 분명히 이렇게 적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애도에는 옳거나 그른 방식이 없다는 점이다. 사별은 늘 고통스럽고 기나긴 과정이며, 그 과정에서 다치지 않거나 변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45쪽)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나의 애도가 '비정상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한결 나아지는 듯했다.
자유로워진 일상의 끔찍함
그 사이 우리 가족은 타지역으로 2박 3일 정도 가야 할 일정이 있었다. 늘 그랬듯 숙소 담당은 나였고, 나는 숙소 예약 앱을 켜고 우리 가족이 머물만한 곳을 찾았다. 그런데 검색 필터에 '반려동물 동반'을 제외하자(제외 버튼에 체크하는 것조차 울컥했다) 너무나 고급스런 숙소들이 리스트에 올라왔다. 우리는 은이와 함께라면 불가능했을 특급호텔을 예약했다.
하지만 이내 '끔찍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이렇게 자유롭게 숙소를 예약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은이의 부재를 상기시켰다. 은이의 짐이 빠진 간소한 여행 가방이 야속하게 느껴졌고, 고속도로 휴게소 식당 안에서 편하게 식사할 수 있다는 게 전혀 즐겁지 않았다(나는 주로 은이와 함께 야외 좌석에서 식사를 했었다). 푹신한 호텔의 침대가 죄스럽게 느껴졌고, 은이와 함께 숙소 바닥에서 잘 때 느꼈던 그 온기가 너무나 그리웠다.
일상에서도 그랬다. 일을 마치고 은이가 기다릴까 봐 총총거리며 집에 돌아오지 않아도 되었고, 은이의 식사 시간을 생각하지 않고 저녁 모임에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은이를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이 자유가 어색하고 고통스러웠다.
베이츠 역시 똑같은 감정을 토로하고 있었다. 저자는 자신보다 깔끔하고 정리하기를 좋아했던 남편 빌을 떠올리며 이렇게 적었다.
나는 빌에게 신경 쓰지 않는 방법을 몰랐다. 그의 존재가 내게 너무나 선명히 새겨져 있어서 달리 어떻게 행동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92쪽)
이젠 무엇이든 어디에나 마음대로 늘어놓을 수 있었고 그 누구의 취향도 고려할 필요가 없었지만, 그 자유가 나를 짓눌렀다. (139쪽)
한바탕 눈물을 흘리며 읽은 구절들이지만, 내 경험을 설명할 명확한 언어를 얻은 것 같아 위로가 되었다.
관계는 계속된다
이런 고통 속에서 저자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그 방식이 나와 매우 유사했다. 먼저, 끊임없이 고인과 연결되려 한다는 점이었다. 베이츠는 남편의 장례식 날, 평소 남편이 즐겨하던 농담과 비슷한 상황이 펼쳐지자 빌이 곁에 있다고 확신한다. 이후에도 빌에게 온 우편물들을 점검하면서, 빌이 준비한 연극 등에서 그의 존재를 느끼고 연결감을 찾으려 한다.
나 역시 그랬다. 은이의 짖는 소리에 반응하는 독 카메라의 알람이 울릴 때마다(아마도 카메라는 개 짖는 소리와 비슷한 주파수의 소리에 반응했겠지만) 나는 은이가 곁에 있다고 느꼈고, 우연히 흘린 사료 알갱이를 발견했을 때도 은이가 찾아 왔다고 믿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따스해져 왔다. '진짜든 아니든 간에, 이런 메시지들은 내게 엄청난 위로가 되었다 (254쪽)'는 베이츠의 경험은 내게도 진실이었다.
또 하나는 고인과의 시간을 의미 있게 기억할 방법을 찾고 있다는 점이다. 작가는 연극배우였던 남편 빌을 기리기 위해 배우 지망생 청소년을 위한 장학재단을 만들고, 이 일로부터 일상을 회복해 간다. 나도 그랬다. 나는 유기동물 보호소를 찾았고, 그럴 때마다 내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큰 힘을 얻었다. 이런 것들을 통해 은이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보다 의미있게 계속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이런 마음을 '지속적 유대 이론'으로 설명한다. '지속적 유대 이론'은 고인을 떠나 보내야 새로운 애착관계를 시작할 수 있다는 전통적 애도 이론과 달리, 고인을 떠나 보내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고인과의 관계 유지는 건전하고 정상적인 것이며, 이 관계 역시 성장하고 변화할 수 있다. 이는 떠난 이와의 연결고리를 찾고, 그들의 뜻을 기리며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
나는 이 부분에서 정말로 크나큰 위로를 받았다. 애써서 은이를 떠나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연결감을 느끼면서도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안정감을 가져다줬다. 그러고 나니 용기가 생겼다. 보호소 봉사, 후원, 임시보호, 입양 등 은이와의 관계를 이어가며 내 삶을 충만하게 할 방법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오랜만에 마음에 평화와 생기가 찾아왔다.
누군가를 기억하는 중요한 방법은 그들이 형성하도록 도와준 나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은이와의 이야기를 담은 나의 책 <개와 살기 시작했다>의 마지막 장에 인용한 철학자 마크 롤랜즈의 말이다. 이제 정말로 이 말을 실천하며 살아야겠다. 은이가 내게 형성해준 공감과 연민, 사랑을 실천하면서 말이다. 이럴 때 은이와 나의 관계는 계속 이어질 테니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슬픔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때로는 그리움이 사무칠 거고, 또다시 분노가 일고 우울이 닥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또한 내가 함께 살아가야 할 감정들임을 이젠 안다. <상실의 언어>의 사샤 베이츠의 경험처럼, 상실은 '극복해야 할' 것이 아니라 삶에 '통합해야 할' 것이니 말이다. 은이는 그렇게 내 삶에 통합되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송주연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s://blog.naver.com/serene_joo)와 브런치(https://brunch.co.kr/@serenity153)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