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마시며 글을 쓰다보니 로스터가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섞어 커피를 내립니다. [편집자말] |
날씨가 좋아서 창문 닦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요즘은 아니겠지만 저는 학교에서 창문을 닦던 기억이 있습니다. 초중고 시절 모두 창을 닦았습니다.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분무기를 이용해 물이나 세제를 조금 뿌리고 박박 닦는 방식이었죠. 닦고 있으면 얼룩이 이리로 저리로 옮겨 다녀 닦아도닦아도 끝이 없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작은 창에 매달려 이리저리 도망치는 얼룩과 싸우고 있자면 얼마나 답답한지 어린 마음에도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되고 그걸 꾹 참고 하고 있으니 속이 적잖이 상하더군요. 노력 대비 효율이 너무 떨어진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물기가 너무 많으면 물얼룩이 지고 물기가 너무 없으면 굳은 먼지가 닦이지 않고, 때로는 수건의 결이 자국으로 남아 신문지를 이용하다보면 젖은 신문지 조각이 붙고 아주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습니다.
너덜너덜해진 신문지를 교체하기 위해 창에서 멀어지면 반 아이들이 창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습이 처연하기도 했습니다. 목표는 작고 일은 단순한데 노동량이 과하니 불만만 가득한 시간이었던 것이죠. 그렇게 청소를 마치고 다음날 보면 또 아주 환상적으로 좋아보이지도 않았던 것도 문제였지요. 그러니까 저에게 창문을 닦는 일은 차이가 크지 않은데 노동이 지나치게 많이 들어가는, 하기 싫은 일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로스터리 자리를 정하고 보니 건물 전면에 큰 창이 두 개, 유리문이 두 개가 있었습니다. 또다시 창을 닦는 운명에 맞닥뜨렸습니다. 창을 닦는 것 이외에도 할 일이 많은데 창마저 닦아야 한다는 게 꽤 큰 문제로 다가왔죠. 일손은 적고 시간은 없기 때문에 모든 일을 쉽고 간단하게 해야 하는 저에게 창문은 하나의 문제로 다가왔습니다. 로스터리가 큰 규모는 아니어도 전면이 전부 유리로 되어 있어 유리가 주는 인상이 크다보니 아무래도 신경을 쓰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요즘 저는 날씨가 좋은 날 여유가 생기면 창을 닦습니다. 과거와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생산성과 효율
창을 닦는 것을 일상의 업무로 가져오되 수고스럽지 않아야 하기에 우선 도구를 개편했습니다. 작은 분무기와 걸레가 아니라 긴 노즐이 달린 중형 압축분무기와 물기를 제거할 때 쓰는 와이퍼를 구입합니다. 이제 저는 미세먼지가 있는 날이나 꽃가루가 날리는 다음날이면 서둘러 대형 분무기에 물을 채우고 창에 뿌려댑니다.
넉넉한 분무로 창에 물기를 뭍히고 먼지들을 충분히 불려줍니다. 그리고 잠시 후 단숨에 와이퍼로 물기를 닦아 내죠. 마무리는 부드러운 천으로 얼룩을 제거합니다. 그럼 생전 경험해 보지 못했던 빠른 속도로 창문을 닦을 수 있습니다. 길어도 십분이 넘지 않고 크게 수고스럽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창을 닦고 있을 때면 늘 어린시절의 제 모습이 떠오른곤 합니다. 대체 왜 그때는 그렇게 오래 걸렸을까요.
우선 장비가 없었겠죠. 하지만 큰 틀에서는 창을 어떻게 닦아야 한다는 개념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창을 닦으라는 지시만 있었고 효율적으로 닦는 방법을 배우지는 못했지요. 노동력과 신문지는 풍부했으니 효율에 대해 고민할 필요는 없었을 겁니다. 이제 와서 그 가르침에 대해 따지려는 생각은 없습니다.
행위가 그대로지만 효율이 납득이 되는 것만으로도 즐거울 수 있다는 게 중요한 지점이죠. 업무시간이 늘어나거나 줄어들거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일을 해야 하는 것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인내합니다. 다만 그 효율이 중요하죠. 생산성과 효율은 누군가를 짜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충분히 쉴 시간과 일상의 회복을 위해 중요한 개념이 되어야겠죠.
자본주의가 생산성과 효율을 이야기하지만 그 목적이 착취가 되어서는 안될 겁니다. 매몰되기보다 되살아나기 위한 효율이 우리에게 필요한게 아닐까 합니다.
물론 그때 한 잔의 커피가 함께 할 수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