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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과 인터뷰하고 있는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
2006년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과 인터뷰하고 있는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2016년 타계한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는 광주항쟁의 역사적 진실을 알리는 데 중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다. 2017년 개봉한 영화 <택시운전사>의 실존 인물로 대중에 널리 알려진 그는 광주항쟁 당시 광주의 진실을 정확하면서도 빠르게 전 세계에 알렸다. 그가 남긴 자료가 없었다면 광주항쟁의 진실이 제대로 알려지는 데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고, 일부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위르겐 힌츠페터의 공헌은 항쟁 이후에도 이어졌다. 그는 광주의 참상을 직접 목격하고 기록을 남긴 외국인 기자였기 때문에 그의 증언은 광주항쟁에 대한 각종 음해와 가짜 뉴스를 바로잡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광주항쟁이 한국을 넘어 세계적으로도 민주주의를 위한 숭고한 투쟁의 대표적인 사례로서 높이 평가받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생전에 언론과의 인터뷰 등을 통해 광주의 진실을 알렸다. 또한 2006년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과의 구술 채록 사업을 통해 자신의 활동 전반에 대한 영상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은 5.18 43주년을 맞아 위르겐 힌츠페터 구술 자료에 대한 해제 및 편집 작업을 거친 뒤 11개 소주제로 구분한 총 30분 분량의 동영상 자료를 공개하게 됐다. 2006년 구술 영상이 언론에 공개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11개의 구술 동영상을 주제별로 구분해 보면 광주항쟁을 취재하게 된 배경, 광주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과정, 광주에서 목격한 참상, 광주항쟁 촬영 과정, 광주에서 촬영한 영상 자료를 방송할 수 있게 된 과정, 광주항쟁과 김대중에 대한 평가, 사후에 광주에 묻히고 싶다고 유언한 이유, 택시운전사 김사복에 대한 일화 등이다. 1980년 5월 광주항쟁 당시 상황을 증언한 내용이 대부분이고 그 외에 광주항쟁 관련 회고와 평가 등으로 구성돼 있다. 

위르겐 힌츠 페터의 구술 녹취문(주제별 구분)을 두 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1) 광주항쟁 취재 및 광주 진입 가능 배경: 
광주로 달려가는 길... "안전 위해 독일 국기 가져갔다"

 
 2017년 8월 21일 광주광역시청 1층 시민숲에서 열린 독일 언론인 위르겐 힌츠페터 추모사진전에 고인이 사용했던 여권과 안경, 영화 '택시운전사' 속 소품인 카메라가 전시돼 있다.
2017년 8월 21일 광주광역시청 1층 시민숲에서 열린 독일 언론인 위르겐 힌츠페터 추모사진전에 고인이 사용했던 여권과 안경, 영화 '택시운전사' 속 소품인 카메라가 전시돼 있다. ⓒ 연합뉴스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저는 아직 도쿄에 있었습니다. 그곳 도쿄 스튜디오엔 당시 결원이 많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휴가를 떠났기 때문에 남아있는 독일 직원은 저와 음성 엔지니어뿐이었습니다. 저는 아침에 욕실에서 옷을 입다가 한국에서 무슨 큰 봉기가 일어났다고 들었지만, 자세한 얘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저는 곧 사무실로 가서 사무실 전화로 한국에 통화를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통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이 시각에 전화가 차단된 것 같았습니다. 저는 우리의 접촉인과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후 저는 혼자 결정을 내릴 수 없었기 때문에 타게스샤오(Tagesschau, 독일 ARD방송의 뉴스보도 프로그램)에 전화를 했습니다. 그러나 타게스샤오는 내게 즉시 한국으로 가라고 허락했습니다.

당시 운전사인 김사복씨가 일의 경과에 대해서 자세히 얘기해줬어요. 저는 서울에서는 아무것도 보고할 수 없고 현지에 가서 직접 봐야 한다고 했어요. 그리고나서 우리는 고속도로를 달렸어요. 도로에는 자동차가 하나도 없었고 나가는 게 금지돼 있었지만 우리는 차로 달렸어요. 저는 안전을 위해서 독일 국기를 가져갔고 ARD 방송 뉴스센터의 표지판과 스티커를 함께 가져갔어요. 저는 꼭 필요한 물건들만 챙겨서 고속도로를 달렸습니다.

처음 정지를 당했던 초소에서, 저는 군인들과 장교들에게 지어낸 이야기를 설명했어요. 우리는 아주 완강하게 들어가야 한다고 얘기를 했고 우회로를 거쳐 그곳으로 들어갔지요. 

(2) 택시운전사, 김사복에 대한 회고 :
"가족이 위험에 처할 수 있었을 텐데... 용기 있는 김사복"

  
▲ 택시운전사 김사복에 대한 회고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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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유일하게 접촉한 사람은 김사복씨였습니다. 우리는 그의 영어를 이해했어요. 그런데 이야깃거리가 많아요. 그의 영어는 우리가 그것에 대해 농담하고 크게 웃기도 했던 정도였어요. 김사복씨에 대한 작지만 따뜻한 많은 기억들이 있어요. 그는 무척 고마운 사람이죠. 제가 김포에 도착했을 때... (기록자 한운석 : 김포요?) 네. 그는 한국 상황을 간단히 설명해준 사람이에요. 그는 당시 우리에게 그것을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어요.

첫째로 김사복 그는 돈을 벌어야 했고 우리로부터 돈을 받기 때문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둘째로 그의 택시 사업이 어려움에 빠지거나, 자기 자신과 가족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가 광주에 함께 가기로 결정한 것은 용기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그가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는지, 사람들이 실제로 제게 설명한 것처럼 간암으로 죽었는지, 혹은 감옥에 구속되고 고문을 통해 죽게 된 것인지 대단히 궁금했습니다. 그는 항상 마르고, 약골이었지만 항상 기꺼이 도와주고자 했으며 유머러스 하고 친절했습니다.
  
(3) 촬영 과정 :
"16mm 필름 두루마리 60미터"


저는 단지 속옷 밑에 지니고 있었던 필름 5~6개를 가지고 당시 상황을 필름에 담았을 뿐입니다. 날씨는 정말 더웠어요. 저는 16mm 필름 두루마리 60미터를 갖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가져가기는 힘들었습니다. 긴장된 상황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런 자료들을 가지고 들어갔다 다시 가지고 나와야 했습니다. 저는 아무런 인터뷰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도시의 상황을 보여주었습니다.
  
(4) 1980년 5월 20일 광주의 모습 :
"젊은이들, 머리 관통상 당했다는 사실 밝혀졌다"

 
▲ [5.18 구술 영상] 위르겐 힌츠페터가 증언한 '1980년 5월 20일 광주의 모습'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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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일 처음으로 광주에 왔습니다. 우리가 본 것은 정말로 아주 특이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광주로 들어가기 직전에 우리는 학생들과 시민들의 환영을 받았고, 그들은 우리를 트럭에 태워서 시내로 데려다줬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어느 큰 광장으로 데려갔는데, 거기서 우리는 시민들로부터 음료수와 오렌지와 버터 바른 빵 그리고 과자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시위자들에게도 음료수와 음식을 제공했습니다.

우리는 트럭 위에 올라탔고, 거기서 우리는 많은 군중들을 아주 잘 조망할 수 있었지요. 이 트럭을 타고 우리는 시내로, 한 총탄 세례를 받은 광주 시내 주도로의 한 주택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저는 처음으로 여러 명의 사망자를 봤습니다. 정오쯤으로 생각됩니다. 사망자들은 트럭에 실렸습니다. 저에게는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제 머릿속에 있는 기억을 재삼재사 강조해야 합니다.

제가 기기서 본 이 첫 번째 사망자들 중 한 명은 젊은 대학생이었는데, 얼굴에 심하게 부상을 당했습니다. 후에 병원에서 이 많은 사망자들과 젊은이들이 모두 특히 머리 관통상을 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저는 그로부터 그리고 베트남전쟁에서의 저의 경험을 통해서도 알 수 있었고 그것은 매우 잔인하고 끔찍한 일이었는데, 사망자들은 밤에 살해됐으며 군대의 야간투시경을 가지고 조준사격으로 사살됐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것은 야만적인 일이었습니다.
  
(5) 처참한 병원의 모습 :
"너무 끔찍했다... 당신은 상상할 수 없을 것"

 
▲ [5.18 구술 영상] 위르겐 힌츠페터가 증언한 '처참한 병원의 모습'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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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로에는 피를 흘리며 링거를 맞고 있는 부상자들로 가득했어요. 그것은 보기가 힘든 끔찍한 장면이었습니다. 그러나 혼란스럽지 않았고 비교적 조용했습니다. 병원 밖에는 천막이 있었고 거기엔 사망자를 보관한 관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서방에서(저의 경우 독일에서) 온 외국인이 취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뻐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관을 열어주고, 제가 카메라로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을 때 그것은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물론 카메라를 들고 영상을 계속 찍었지요. 따라서 이 장면들도 갖고 있습니다. 이 장면들은 너무 끔찍해서 일부는 다큐멘터리 필름에서 빼 버렸습니다. 저는 그것들을 아카이브에서 더 이상 찾을 수 없어요. 하지만 충분히 많은 영상들을 저는 갖고 있지요. 저는 사적인 사진들도 많이 찍었어요. 그러나 이 순간 저는 대단히 충격을 받았어요. 당신은 그것을 상상할 수 없을 거예요.

저는 제가 하는 일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무언가를 독일로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이것을 반드시 보여줘야 하고, 따라서 찍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촬영을 했습니다. 여인들은 울음을 터뜨렸고 바닥에 쓰러졌어요. 그런 장면이 저 역시도 비탄에 빠지게 했어요. 그리고 영상을 찍는 것을 중단해야 했어요. 더 이상 찍을 수가 없었어요. 참으로 슬프고 끔찍한 일이었어요.

(기록자 한운석 : 당신은 자식들을 찾는 부모들도 보았지요?) 네. 한 게시판이 있었고 거기에 이름들이 적힌 쪽지들이 붙어 있었어요. 저는 그걸 읽을 수는 없었어요. 그러나 그것은 '내 아들을 찾습니다'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사망자 수와 이름들이 공개됐어요. 하지만 그 전체 명단은 도청에 게시됐어요.

(기록자 한운석 : 도청이요?") 네. 도청이요. 체육관 앞 왼편에 커다란 광고판 벽이 있었어요. 그 옆에 저녁 5시경 사람들이 모였어요. 거기서 저는 필름을 찍었어요.

* 다음 기사 "민주주의 위한 싸움, 그들과 함께 묻히고 싶었다" 로 이어집니다.
** 이번에 공개한 11개의 위르겐 힌츠페터 구술 동영상 전체는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유튜브 페이지 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youtube.com/playlist?list=PLM3KYQ3ld15EsG52elnb1uUBGvPeBfXmX

덧붙이는 글 | 사회학 박사이며 김대중 연구자입니다. 김대중 재평가를 위한 김대중연구서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힌츠페터#광주 5.18#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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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박사이며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사료연구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에 대한 재평가를 목적으로 한 김대중연구서인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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