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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정화 감독의 문제적 발언.
현정화 감독의 문제적 발언. ⓒ KBS

"빨리 시집가야죠."

지난 14일 현정화 탁구감독이 KBS 예능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에 나와서 탁구 국가대표 서효원을 향해 한 말이다. 패널들이 일제히 '갑' 버튼을 눌렀다. '갑' 버튼은 일종의 경고다. 흔히 '갑' 위치에 있는 사람의 발언이 선을 넘으면 자아성찰용으로 눌러 의미를 확인시킨다. 즉, 살맛나는 '을'을 위한 SOS라고 보면 된다.

패널들 리액션에 내 마음이 다 가벼웠다. 시대가 달라졌다. 예전 같으면 패널들도 "암요, 시집가야죠" 하면서 동조했을 것이다. 아직도 결혼을 필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그것이 '갑질'이라고 정의한다.

나이와 이름을 궁금해하는 노인들

수영장 다닌 지 두 달이 되어간다. 점점 얼굴이 눈에 익는다. 게다가 수영도 아닌 걷기에서 매일 마주치는 얼굴이다. 서로 말은 안 해도 가볍게 목례를 하는 사이가 되었다. 같은 반이라며 친근감을 표하는 어른도 있다.

어떨 땐 이름을 묻기도 나이를 묻기도 한다. 흰머리와 얼굴이 매치가 안된다며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하는데 나이는 맞춤이다. 상대방이 60?이라고 물으면 "네." 40? 이렇게 물어도 "네" 하는 식으로 대충 넘어간다. 집요하게 이름을 묻는 어른이 있어 에스더라고 말해줬다.

별 뜻은 없다. 종교인도 아니다. 평소 예쁜 이름이라 생각해 그렇게 말해버렸다. 그러자 " 아유 외국인이구나, 어쩐지, 그럴 줄 알았어. 외국인 같더라. 저기 저 3단지에 러시아 사람들 많이 살잖아."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그리곤 "네, 저도 그쪽 동네 삽니다"라고 했더니 "맞지? 맞네." 호들갑을 떨며 가버렸다. 실제 그 동네 살기도 한다. 옆에서 머리를 말리던 점잖은 노인이 "'에스더'는 나라를 위한다는 뜻이다"라고 말해주었다.

요즘 스트레스를 받는다. 자꾸 관심을 보이는 수영장 어른들도 그렇지만 셔틀버스를 같이 타는 노인 때문이다. 볼 때마다 "아유, 시집을 빨리 가야 할 텐데"라고 말한다. 안타까운 사람 취급하며 마지막 멘트엔 '쯧쯧' 이러신다. 기억을 못 하는 건지 매번 그런다.

어느 날은 마음을 담아 "어르신, 요즘 그렇게 말하면 젊은 사람들이 싫어해요"라고 했더니 "호호호, 그렇지" 하면서 다음날 또 그러신다. "결혼을 왜 안 했어?"라는 말이 반복되자 셔틀버스 타러 가기 껄끄러웠다. 기다리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일부러 늦게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날은 셔틀버스를 안 타기도 했다.

엄마도 안 하는 잔소리를 노인이 자꾸 하니까 듣기 싫었다. 노인은 교양 있는 말투로 한다지만 아무리 좋은 말도 계속 들으면 짜증이 난다. 노처녀 스트레스라는 게 이런 기분인가 싶었다. 노인을 어떡해서든 피하고만 싶었다. 당신 딸도 결혼 안 했다면서 나를 몹시 괴롭혔다.

자꾸 그래서 어느 날은 "어르신 막내딸도 결혼 안 했잖아요. 따님한테도 그런 소리 하세요?"라고 물었더니 "안 해. 혼자서도 잘 살아. 행복하대" 이러신다. 그러면서 "에스더도 행복해요? 잘 먹고살아요"라고 한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지만 최대한 예의를 갖춰 말했다. "어르신, 여러 가족이 함께 살면 행복한 일도, 불행한 일도 있지만 혼자 살면 불행할 일도 행복할 일도 없어요. 그리고 잘 먹고살아요"라고 했다.

셔틀버스 노인이 상급 코스라 걷기 하는 노인들과 마주칠 일이 없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나이도 궁금해하는 걷기 노인들한테 시집도 안 갔다란 소문까지 돌면 굉장히 곤란할 거 같다. 그렇지 않아도 걷는 팔순노인들 틈에서 조금이나마 젊어 보이는 내가 관심의 대상인데 셔틀버스 노인과 걷는 노인들이 나를 두고 대화를 트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결혼을 독촉할 권리는 없다

<나 혼자 산다>, <돌싱포맨>처럼 혼자 사는 사람들이 나오는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들이 인기를 끌면서 비혼, 이혼에 대한 시선들이 부드러워지고 있다. 결혼을 왜 안 하냐는 질문은 결혼을 왜 했냐는 질문과 상통한다. 모든 사람이 결혼이라는 제도에 부합해야 되는 건 아님에도 여전히 결혼만을 정상의 범주로 평범하게 본다. 결혼은 쌍방 합의 하에 이뤄진 사랑의 계약이다.

결혼 서약서에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사랑하겠다고 맹세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 서약을 지키지 않는다. 결혼을 왜 안 했냐는 질문을 쉽게 할 수 없는 이유다. 약속을 꼭 지켜야 하는 신념 있는 사람들에겐 서약의 굴레를 벗어나기 또한 쉽지 않으니, 서약서를 변경하거나 재계약 제도를 시행하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빨리 시집가야 하는데"라는 말에 재빨리 '갑' 버튼이 눌러진 이유를 현정화 감독은 알아야 한다. 내 인생의 갑은 나임을. 결혼만이 최선의 삶이 아님을. 각자의 선택이 존중받는 시대다. 그 선택은 행복을 목표로 한다.

어린 조카도 내게 말한다. "난 이모의 선택을 존중해"라고. 결혼의 이유도 다양하고 비혼의 이유도 다양하다. 그런 점에서 빨리 시집가란 말은 존중받는 독립된 인간이 아닌 여자로서의 삶만을 독촉받는 기분이다. 누구도 타인의 삶을 간섭하며 만기를 정해 독촉할 권리는 없다.

"빨리 시집을 가야지", "결혼을 왜 안 했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되묻고 싶다. "왜 결혼하셨나요?" 당신이 결혼한 이유와 같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런 '갑'의 말씀은 넣어두셔도 무방할 듯싶습니다.

#결혼#비혼#갑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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