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시,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다. 이 시간에 전화할 리 없는 엄마라 무슨 일인가 싶어 전화를 받았다. 어디냐고 묻길래 "괜찮으니 말씀하셔도 된다"고 했지만 "심심해서 했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엄마는 심심하다고 전화를 할 사람이 아니다. 언제나 상대방의 전화 받는 상황까지 배려하는 엄마다. 집에 오자마자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재빨리 전화를 걸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에 놀란 엄마
오늘(지난 18일) 갑자기 사람들이 엄마가 주인인 강원 평창군의 한 가게에 들어와 카메라로 막 찍어대더라는 것이다. 엄마가 놀라서 물으니 경찰이라고 하더란다. "경찰이 왜?" 나도 놀라서 이야기를 독촉했다.
엄마는 경찰이라고 하니 놀랍고 무서워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고 한다. 그런데 경찰이라고 했던 사람들이 엄마에게 말을 시켰다고 한다. 알고 보니 진짜 경찰이 아니었고 예능 프로그램 촬영이었던 것이다. 엄마는 기분이 상했다고 한다. 아니, 무서웠다고 한다.
'리얼 예능'은커녕 연예인도 알 리 없는 엄마는 갑자기 들어온 경찰과 카메라에 놀라셨고 촬영인 걸 뒤늦게 알고는 화가 난 감정만 남아 있다고 했다. 촬영이 끝나고 철수한 뒤 담당자가 가게 안으로 들어와 "많이 무서우셨어요?"라고 묻길래 "그렇다"고 했더니 "죄송하다"고 하더란다.
이어 "얼굴이 방송에 나가도 되느냐"고 하길래 안 된다고, 늙고 못생겨서 싫다고 출연을 거절하셨다고 한다. 뒤늦게 알고 보니 촬영한다던 프로그램은 지난 4월부터 MBC 에브리원에서 방송되는 <시골경찰 리턴즈>였다.
홈페이지에는 '시골 주민들의 안전을 책임지기 위한 평균 연령 50.75세 신입 순경즈의 본격 고군분투기',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NEW 순경즈의 청정 무해한 시골경찰 라이프!'라고 프로그램이 소개되어 있었다.
요즘 세상에 TV를 안 보고 연예인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있겠냐고 하지만 엄마는 TV를 잘 보지 않는다. 오로지 먹고 사는 현실에만 집중해서 치열하게 살아오신 분이다. 웃고 떠드는 걸 주된 목적으로 하는 연예인 예능이 재밌을 리 없다. 내가 하루종일 TV를 보면서 시시덕거릴 때 "넌 저런 게 재밌냐"면서 "시끄럽다"고 하신 분이다. 엄마의 촬영 이야기를 들으며 우습게도 나는 '리얼 예능이 진짜 리얼이었구나'라는 생각만 들었다.
"엄마, 그냥 재밌게 하려고 사전에 말 안 했는가 봐요. 미리 짜고 방송하면 연극처럼 되니까요." 그렇게 말하자 엄마는 "아무리 재밌게 하려고 해도 그렇지, 남에 가게에 들어올 땐 사전에 양해를 구해야 하는 거 아니니, 내 말이 틀리니?"라고 묻는다. 방송이고 연예인이면 그래도 되냐고 물으시는데 방송 편을 들려던 나는 뜨끔해진다.
엄마 말씀처럼 아무리 '리얼 예능'이라도 사전 조사 없이 양해도 안 구하고 타인의 사적 영역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게 맞나? 의구심이 생겼다. 일단 찍고 보자는 게 방송의 문법이라고 해도 일반인을 대상으로 그렇게 한다니? 나 역시 이해가 잘 되지 않아서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의 신분으로 제작진에게 문의를 남기고 통화를 했다.
제작진은 "출연진 중 한 사람이 돌발행동으로 물건을 구매하기 위해 (가게로) 들어갔다. 리얼이다 보니 식당이나 가게 같은 돌발행동은 사전에 양해를 구하지 않는다. 죄송하다. 나중에 제작진이 정중하게 사과하고 흔쾌히 받아주셨다"라고 설명했다.
엄마는 50년 넘게 장사를 하신 분이다. 단지 물건을 구매하러 들어왔다면 처음에는 놀라긴 했어도 자연스럽게 잘 응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물건을 구매하지 않았고 구매할 의사도 없었다고 한다.
드라마나 예능을 촬영할 때 일반인이 겪는 피로감이나 불편함을 호소하는 뉴스를 종종 볼 때가 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촬영인데 그냥 좀 이해해 주지'라고 생각했다. 재밌게 보는 방송이니 촬영을 우선시하는 생각이 무의식중에 커진 것 같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뉴스들이 크게 와닿는다. 촬영보다 더 중요한 건 '사람에 대한 존중'이다.
'리얼 예능' 촬영이 조금 더 신중해지기를
K-콘텐츠가 막강해진 시대다. 특히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리얼 예능 프로그램도 상당수다. 방송 재미를 위해 치열한 전쟁을 치르지만 촬영하는 대상인 타인의 삶에도 예의를 지켰으면 한다. 방송에 취약한 일반인을 상대로 할 땐 더더욱 신중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리얼 예능'이라는 무기로 오로지 자신들의 촬영을 위해 사전 설명도 없이 가게에 들어와 늙은 엄마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는 일은 이제는 없어야 한다. 경찰이라며 카메라로 촬영하면서 들이닥쳐놓고 "정중히 사과했고 흔쾌히 받아주었다"고 해도 모든 사람이 다 괜찮은 건 아니다.
그저 연예인만 보면 좋아서 방방 뜨고 소리 지르고 사진 찍고 사인을 부탁하는 내가 '리얼 예능'을 대하는 엄마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바가 크다. 앞으로는 일반인들이 출연하는 리얼 예능을 볼 때 마냥 웃기만 하진 못할 것 같다. 생존을 위해 사는 삶을 향해 '리얼 예능'이란 말이 애초에 가당키나 한 건가. 삶 자체가 진짜인 것을. 아니 삶 자체가 리얼인 사람들에게.
내가 물었다. "엄마, 그 사람들이 사전 양해를 구했다면 어땠을까?" 엄마가 대답했다. "내가 아무리 뭘 몰라도 촬영이 뭔지는 안다. 그랬다면 좋은 기억이겠지."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고 취재를 하면서 심경의 변화가 여러 번 있었다. "누군가에게 피해가 가는 글은 쓰지 말아라. 착한 글, 좋은 글만 써라"는 엄마의 당부 때문이었다. 이 글은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고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웃고 떠드는 소위 '리얼 예능'의 촬영이 좀 더 신중하기를 바라는 마음의 글로 봐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