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는 학교폭력(학폭) 피해자인 문동은(송혜교 분)이 오랜 시간 치밀한 계획을 세워 가해자들에게 복수하는 과정을 그렸다. 드라마가 인기를 끌며 사회적으로 '반(反) 학폭' 정서가 형성됐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에 임명됐다 사퇴한 정순신 변호사의 아들이 고교 시절 학폭으로 강제 전학 조치를 받았으나 서울대에 합격한 사실이 알려지며 국민의 공분을 샀다.
지난 4월, 정부는 여론을 의식해 4·12 대책이라 불리는 '학교폭력 근절 종합대책'을 내놨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분리 기간을 3일에서 7일로 늘리고, 생활기록부의 학교폭력 조치사항 기록을 기존 2년에서 최대 4년까지 보존하기로 했다. 2026학년도부터는 수능, 논술, 실기 등 모든 대입 전형에 학폭 조치사항이 의무 반영된다. 가해자의 처벌을 강화해 학교폭력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겠다는 의도다.
하지만 가해자를 응징해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드라마 속 '사이다식 결말'은 학교폭력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처벌을 강화하면 가해자도 본인의 행위를 반성하기보단 불이익을 최소화하기 위해 불복 소송에 나설 가능성이 커진다.
실제 학교폭력 관련 소송은 증가 추세다. 교육부에 따르면 작년 학폭위 결정에 반발해 행정심판 또는 행정소송을 제기한 건수는 1614건이다. 2020년 767건에서 2배 이상 늘었다.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학폭위)의 심의 건수 역시 2021년 2만 1625건으로 2020년 8357건에 비해 크게 늘었다. '학교폭력 근절 종합대책'이 현실적으로 학폭을 줄이지 못하고, 관련 법 시장만 키우는 '외주화 대책'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법의 심판에만 맡기는 방식, 학폭 문제 근본 해결 못 해"
지난 5월 30일,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와 화상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는 현재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더럼의 듀크대 로스쿨에서 방문학자로 범죄 피해자 연구를 하고 있다. 김 변호사는 교육부의 '학교폭력 근절 종합대책'이 피해 학생에게 집중하기보다 가해 학생에게 '나쁜 애'라는 낙인을 찍고 불이익을 주는 데 초점을 둔 정책이라고 지적한다.
"실제 학교 현장에서 학교폭력으로 처리되는 사건은 범주가 굉장히 다양합니다. <더 글로리>처럼 범죄에 가까운 폭력도 있지만,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가 얽히고설켜 학교폭력인지 판단하기 애매한 사건이 대부분이죠. 친구에게 '분신사바'를 하고 저주한 일이 학폭인지를 법원에서 다툰 사건도 있어요. '학교폭력 근절 종합대책'은 드라마에서 묘사한 예외적인 형사사건이 마치 대부분의 학교폭력인 것처럼 보고 만든 정책이에요. 학교폭력이라고 판단하기 애매한 사건일수록 불필요한 행정소송으로 이어지기 쉬운 구조가 되는 거죠."
학교폭력예방법(학폭법)이 제정되고 학교폭력 처리가 법제화되면서, 학교폭력 관련 소송이 폭증했다. 지난해 초·중·고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학폭위) 심의 건수는 2만여 건이다. 피해 학생을 보호하고 가해 학생을 선도·교육하며 관계 회복을 도모하는 원래의 취지와 다르게 학폭위는 반드시 이겨야 하는 전쟁터가 됐다. 이 싸움의 승자는 수임 사건이 늘어난 변호사뿐이다. 김 변호사는 학교폭력 사건을 '사법적 관점'이 아닌 '관계적 관점'에서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다.
"학교폭력은 '관계'에서 비롯된 사건이 많아요. 가해자는 '욱해서 때렸다'고 하지만 욱하기 전까지 쌓인 아이들 사이의 관계를 먼저 살펴야 하죠. 이분법적으로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누고, 형사사건을 처리하듯 행위의 잘잘못을 법의 심판에만 맡기는 현재의 학교폭력 처리 과정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어요."
학폭 문제로 법정 다툼을 하며 피해 학생은 다시 상처를 입는다. 가해 학생 처벌보다 중요한 건 피해 학생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김예원 변호사는 13년 동안 일하며 수많은 학교폭력 피해자를 변호했다.
"제가 피해 학생을 지원할 때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은 '당사자의 욕구'예요. 피해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사건에 접근해야 피해자가 상처를 덜 받을지를 고민하죠. 사건 결과보다 중요한 건 아이가 행복하게 학교생활을 이어 나가는 거예요."
김 변호사는 현재 범죄 피해자 지원에 관해 연구한다. 그는 현재 머물고 있는 미국의 경우 학교폭력에 어떻게 접근하는지 들려줬다.
"미국은 학교라는 공간에서 학생이 폭력, 괴롭힘 같은 갈등이 발생했을 때 아이들이 언제든 학교에 도움을 요청하고, 도움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데 가장 신경 써요. 평소 학교가 쌓은 신뢰 덕분이죠.
학교폭력은 '친구가 연필을 가져가서 돌려주지 않는 일'처럼 사소한 갈등에서 시작될 수 있어요. 초기에 교육적으로 개입(중재)해 해결할 수 있는 사건이 많죠. 학교는 아동이 관계 맺는 법을 배우는 하나의 작은 사회예요. 아이에게는 전부일 수도 있는 학교라는 세상이 '안전한 곳'이라고 인식하고, 이곳에서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야 해요."
"관계 회복이 우선... 세심하지 않은 해결책, 피해로 돌아와"
김 변호사는 학교폭력을 교육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학폭 문제를 다룰 때 '교육적 회복'을 목적으로 세심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뜻이다. 서울시교육청이 추진하는 '사이좋은 관계 가꿈 프로젝트'가 좋은 사례다.
'관계맺음-관계이음-관계돋움'으로 이어지는 관계 회복 프로그램으로 학생의 관계성·사회성 회복을 위해 서울 모든 학교에서 운영한다. 학교폭력이 발생할 때만 진행하던 기존의 관계 회복 프로그램을 사안 발생 전·후로 확대하고, 익숙한 공간인 학교 안에서 갈등을 풀기 위해 노력하는 학교폭력 예방교육 정책이다.
"형사적·사법적 절차보다 우선해야 할 건 아이들의 관계 회복을 위한 교육 현장의 노력이에요. 학교폭력이 발생했을 때 '학폭위'를 통해 법적 절차를 밟아 가해자를 처벌한다는 지금의 '학폭법'은 설계부터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사법적 절차를 밟기 전 '관계 가꿈 프로젝트' 같은 관계 회복 프로그램을 의무적으로 알리고, 이런 프로그램으로 해결될 수 없는 심각한 사안은 형사사건으로 처리하는 식으로 원칙과 예외를 적용할 필요가 있어요. 교육부가 학폭 문제에 대한 답으로 내놓은 '학교폭력 근절 종합대책'은 교육의 사법화를 심화하는 정책이죠. 세심하지 못한 해결책으로 발생하는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이 감당해야 해요."
<더 글로리>를 쓴 김은숙 작가는 10대 딸에게 "내가 죽도록 맞고 오는 게 낫겠냐, 죽도록 때리고 오는 게 낫겠냐"는 질문을 받으며 드라마를 구상하게 됐다고 밝혔다. 작가는 "나에게는 가해자들을 지옥 끝까지 끌고 갈 돈이 있다. 그래서 차라리 맞고 왔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현실에서 부자가 아닌 다수의 '동은'이들은 죽도록 맞더라도 가해자에게 법적으로 대응하거나, 사적 복수를 하기 어렵다.
"모든 학생은 학교가 보호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학교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학교가 학생에게 안전한 울타리가 되어줄 거라는 믿음을 줘야 해요. 폭력으로 신음하는 학생에게 법정 싸움을 권장하기보단 피해자를 진정으로 보호하고 관계 회복을 지원하는 학교폭력 보완 대책이 필요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