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누군가 영화 같은 삶을 산다면 나는 그냥 영화 보는 삶이다. 모든 영화를 섭렵하는 '시네필'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취향인 영화 한두 편쯤은 고민 없이 답할 수 있다. 사는 게 힘들 때 대피할 만한 영화 1편씩은 다들 있지 않나.

요즘은 영화에 대한 애정을 건사하기 힘든 세상이다. 하늘 높이 오른 티켓값에 영화관에 앉을 때마다 평론가라도 된 마냥 눈이 깐깐해졌고 영화관에서 떠드는 빌런, 휴대폰 보는 반딧불이 관객을 피해 OTT 플랫폼으로 도망친 지도 오래됐다.
 
 제11회 '무주산골영화제' 메인포스터
제11회 '무주산골영화제' 메인포스터 ⓒ mujufilmfest
 
혼영(혼자 영화보기)에 익숙해진 채로 전북 전주 무주로 영화 소풍을 떠났다. 올해로 11년째인 '무주산골영화제'가 오는 6일까지 이어진다. 너그러운 자연의 마음으로 영화를 관람하는 곳이라 영화관이 아니라 운동장, 국립공원에서 상영한다. 무주 위, 우주 아래 흰 달만이 유일한 조명인 영화관으로 찾아갔다.

무주에서 만난 영화적 순간
 
 영화관이 된 무주등나무 운동장
영화관이 된 무주등나무 운동장 ⓒ mujufilmfest
 
개막작 <버텨내고 존재하기>는 무주등나무 운동장에서 열렸다. 너른 들판 위에 사람들이 돗자리를 펼쳤다. 바람이 불자 운동장을 둘러싼 등나무가 퍼석한 소리를 내었다. 그 앞에 커다란 스크린에서 영화가 나왔다. 어두컴컴한 영화관이나 내 방에서만 보다가 탁 트인 곳에서 영화를 보는 건 그야말로 '영화적 순간'이었다.

이곳에서 정해진 관람 방법은 없다. 아이들은 비눗방울을 불며 자유롭게 뛰어다니며, 어른들은 이야기 한 번에 건배 한 번 하며 영화를 보았다. 나는 해가 저무는 하늘을 스크린 삼아 귀로 영화를 들었다. 냅다 누워서 영화를 보아도 괜찮다. 아이들 뛰노는 소리, 어른들 웃음소리가 섞여 영화 자막에 등장할 것만 같았다.

<버텨내고 존재하기>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단관 극장인 '광주극장'을 배경으로 7명의 인디뮤지션들이 노래하고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현장에서는 영화와 라이브 공연을 번갈아 보여주었는데 영화 송출이 멈춘 줄 알았던 순간에 아티스트가 깜짝 등장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환호로 바뀌는 지점에 우리는 서로의 존재에 기대어 버텨내고 다시금 존재하게 됐다.

'무주산골영화제'에서는 서로의 배려에 기대어 우리 모두 영화 관람객이 되었다. 인생을 모르겠다는 청년 뮤지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어르신과 노래가 끝날 때마다 신나게 환호하는 아이들. 영화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천천히 넓힌다는 말이 이런 장면일까.

당신의 삶을 틀어주세요

무주산골영화제는 26개국 88편의 영화와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그 중,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는 동시대 최고의 영화 음악감독이자 환경 운동가 '류이치 사카모토'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지난 3월 세상을 떠난 그이기에 다큐멘터리와 함께 이어진 토킹시네마로 류이치 사카모토가 살아온 궤적을 따라갔다.
 
 다큐멘터리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 스틸컷
다큐멘터리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 스틸컷 ⓒ AVAROTROS
 
숲을 거닐며 버려진 쓰레기를 두들겨 소리를 채집하고 빗소리를 듣기 위해 머리에 양동이를 쓰고 서 있던 류이치 사카모토. 젊었을 적 해외를 순회하며 작업하던 모습과 어느덧 거장이 된 현재까지, 그는 음악을 위해 살아갔고 음악에 의해 움직였다. 쓰나미를 견딘 피아노를 위로하듯 쓰다듬는 장면에서 류이치 사카모토가 지닌 세상에 대한 다정함이 밀려왔다.

무주산골영화제가 선보인 작품들은 모두 한 사람의 삶을 깊숙이 들여다본다. <너와 나>, <다음 소희>, <애프터썬> 등 빼어난 상업영화는 아니지만, 다듬어지지 않은 장면조차 조금은 울퉁불퉁한 우리의 진짜 삶을 닮았다. 일상을 살아갈 때는 바빠서 외면하였던 누군가의 삶이 영화로 다가오자 마치 오랜 친구의 이야기를 듣듯 마음이 쓰인다.

영화제는 영화 안팎의 '사람'을 고민했다. 일회용품이 아닌 재사용이 가능한 식기 이용을 권장하였고 아이 관람객을 위한 영화와 잔디밭을 마련한 '키즈 스테이지'를 운영했다. "영화와 음악과 함께 뒹굴며 관람객이 일상을 살아갈 힘을 얻었으면 좋겠다"는 소개 문구처럼 무주산골영화제는 영화로 타인의 삶을 바라보게 했고 그런 우리를 따뜻하게 바라보았다.

아쉬워서 설레는 무주산골영화제
 
 '제 11회 무주산골영화제' 입구
'제 11회 무주산골영화제' 입구 ⓒ 이진민
 
즐거움에는 끝이 있는 법. 아쉬워하며 집으로 향하는 길에 택시 기사님께서 넌지시 건넨 한마디가 끝을 뒤집었다. "끝나니까 아쉽죠? 그래도 아쉬우니까 다시 또 볼 수 있는 거예요." 아쉬움은 늘 '안녕'에 다시 안녕하지 않던가, 그러니 나는 다시 무주산골영화제를 기다리겠다.

짙어진 초록빛과 어둑어둑한 하늘, 그리고 우리를 숨죽이게 하는 영화들. 내년에는 무주가 담아내는 영화적 순간에 더 자연스럽게, 더 자유롭게 '관객1'로 출연하고 싶다. 그때 만날 영화에게 먼저 인사 건네는 상상을 하며, 이만 크레딧을 올려야겠다.

#무주산골영화제#영화제#야외상영#류이치사카모토#무주등나무운동장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