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현지에서 75세 사부에게 정원사 일을 배우는 65세의 한국 제자의 이야기.[편집자말] |
오전 8시까지 아침 먹고 마실 물 준비하고 화장실까지 다녀 올 것. 어제 일 끝나면서 내린 사부의 지시사항이다. 요컨대 일을 시작하면 오로지 일에만 집중할 준비를 하고 오라는 거다. 오전 7시 50분에 도착했더니 이미 라디오 틀어놓고 기다리고 계신다.
라디오는 즐겁게 일하기 위한 소도구다.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사부 댁에서는 물론이고 의뢰받은 일을 할 때 출장지에서 조차 켜 놓는다. 사부가 관리하는 정원은 계약관리가 대부분이어서 의뢰인들이 모두 그걸 알고 있다.
출장지 이웃에서 라디오 소리로 항의 받은 적도 있지만 소리를 좀 줄였을 뿐이다. 작품이 좋은 품질을 내기 위해서는 정원사가 즐거워야 하고, 즐겁게 일하기 위한 노력은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사부의 정원 작업 지론이다.
오늘은 둥글게 둥글게 자르기
사부가 사 주신 작업 장비를 허리에 차고 장갑을 꼈다. 타이트하게 허리를 조여오는 느낌이 아침 공기와 더불어 상쾌하게 느껴진다. 할 일은 현관 앞의 둥근달같은 철쭉을 다듬는 일이다.
둥근달(정식이름은 다마모노다)은 어제 작업을 마친 깍두기 철쭉을 변화시켜 줄 치트키다. 직선으로 딱딱해진 진입로에 달덩이 하나를 턱 얹어놓으면 순식간에 조화로운 공간으로 변하는 거다. 단순하지만 기본적인 디자인의 마법이라 옛날부터 두루 통용되고 있다.
이날 연장은 전동 바리깡이 아니라 가리코미 바사미라 부르는 큰 전지가위다. 전지 대상에 따라 장비가 달라지는 거다. 전날처럼 두어번 시범을 보이시고는 장비를 건네 주신다. 가르쳐 줬으니 알아서 해.
작업 지시사항은 두 가지. 대상이 둥그니까 가위를 엎어서 깎는 게 모양이 잘 나온다. 가위질은 리듬감 있게 움직여라. 엿장수 장단처럼 리듬을 타야 진행이 빠르고 쉬 피곤해지지 않는 모양이다. 작업자가 즐겁지 않으면 작품 안 나온다. 사부의 정원작업 지론이었다!
작업할 달덩이는 사부가 작업 중인 소나무 바로 옆이다. 작업 면적은 작지만 달덩이는 어디서 봐도 둥그래야 한다. 모양 만들기가 까다롭다. 이 양반이 자기 일은 하고 있지만 가위 소리는 들릴 테다. 리듬을 제대로 타야 한다는 거네. 사각사각 사각사각 처음에는 다소 엇박자가 났지만 금방 익숙해졌다. 좋아하는 트로트의 기본 리듬이 이런 곳에서 유용하게 쓰일 줄은 몰랐다.
한번 리듬을 타니 쉴 틈이 없다. 곡면을 신경쓰면서 다듬어 나간다. 사실은 새순을 잘라보면 지난해 잘라놓은 곳이 아래쪽으로 보이니까 그걸 가감하면서 진행하면 돼. 이건 초짜를 위한 꿀팁이라며 슬쩍 가르쳐 주셨다.
네 생각대로 라고 하셨으니, 전체적으로 둥근 기조는 유지한 채 아랫부분의 선은 단발머리를 만들지 않고 자연스럽게 두기로 한다. 두부깎기와는 뭔가 다른 변화를 주어야 서로 어울릴 것 같아서다.
뿌리 근처에서 돋아 올라오는 새순은 잘라줘야 한다. 맹아지를 잘라야 하는 건 조경교재에도 있는 기본이지만 이곳에선 이유가 다르다. 표면 쪽만 이파리가 보이도록 전체 모습을 깔끔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다. 나무 중간에서 자란 것도 물론 자른다. 아래가 깔끔해야 전체적으로 돋보이는 것이다. 일본정원 관리의 기조가 깔끔함이라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작업 과정은 계속 반복이다. 가까이서 보고 자르고 멀리가서 또 보고. 흔들어 털고 삐져 나온 것을 다시 자르고 다듬기를 수없이 반복한다. 처음에는 쓱쓱 잘라 나가지만 마무리에 접어 들수록 자르는 시간보다 기웃거리며 살펴보는 시간이 더 길어진다.
멀리서 보면 꽤 괜찮은 것 같은데 가까이서 보면 삐져나온 것이 종종 보인다. 삐져나온 이파리 하나 중 절반이 커트라인에 걸렸다면 절반을 잘라내야 한다. 요컨대 이파리 절반을 발견하는 게 마무리 비결이란다. 정원사가 섬세한 만큼 작업 완성도가 높아지는 거다. 결국 그 절반의 이파리들이 모이고 모여 정원의 최종 품질을 결정하게 되는 이치다.
중간에 한 번 쉴 참이 있었다. 쉴 참에 잡담은 어디서나 당연지사지만 상대는 지엄하신 사부님 아니신가. 언감생심 잡담은 무슨 잡담... 생각하고 있었는데 웬걸 태풍때 지붕이 날아간 얘기부터 집 고치며 고생한 얘기까지 옛날 이야기가 줄줄이 엮여 나온다.
말 없이 일하실 때와는 다른 모습이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사부도 부드러운 남자시다. 평소 느끼던 무뚝뚝함은, 어쩌면 외곬으로 한 길을 걸어오신 우직함이 밖으로 드러난 장인(匠人) 이미지의 오해일 수도 있다는 짐작을 한다.
일본정원 관리의 기본이자 핵심
남은 일은 작업구간 청소다. 청소는 일본정원 관리의 기본이며 핵심이다. 깔끔한 정원 관리는 청소에서 시작되어 청소로 끝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단 달덩이의 뿌리 근처 다듬기부터 시작한다. 치과에서 스케일링하는 걸 확대해 놓고 본다면 이 작업과 비슷할 것이다. 맹아지 제거를 다시 확인하면서 줄기를 가지런히 다듬는다. 깔끔하게 보이도록 일정한 높이까지 가는 줄기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불필요한 줄기제거는 전지가위를 케이스에 모셔둔 채 손으로 한다. 그 편이 빠르기도 하려니와 일 마무리가 더 깔끔해진다. 부득이한 경우에만 전지가위를 쓴다. 이때 이미 제거한 이파리 청소도 함께 한다. 최종 마무리는 블로워로 하겠지만 제거한 이파리가 많이 날리면 안 된다. 불가피한 최소한만 남기고 최대한 깨끗하게 청소해야 한다.
줄기 사이가 훤히 드러나 보이도록 깔끔하게 청소하는 거다. 앙징맞은 손갈퀴(이곳 이름은 곰손이다)로 세밀하게 긁어내며 청소한 다음 블로워로 마무리하면 모든 작업 과정이 끝난다.
도구들까지 제자리에 정돈하고 나서 사부와 함께 정원입구에 섰다. 저렇게 깔끔하게 마무리 한 곳에 나뭇잎이 한두 장 떨어져 있어도 보기 좋아. 그 나뭇잎으로 인해 오히려 정원의 깔끔함이 돋보이게 되는 거거든... 설마 나뭇잎을 도로 갖다 놓으라시는 건 아니겠지?
다음날 작업은 오전 6시부터. 아침 먹고 화장실 다녀오고 마실 물 가져올 것. 날이 점점 더워지니 작업 시작 시간이 당겨지는 거다. 또한 차로 두어시간 씩이나 걸리는 작업 현장에 투입될 경우를 대비한 시간연습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