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을 하십니까?" 누군가가 직업을 묻는다. "사서입니다." "그럼 책 많이 읽으시겠네요." 25년 동안 수없이 들었던 도돌이표 질문과 답변이다. 초보 사서 시절, 사서는 무조건 책을 많이 읽을 것이고 읽어야만 한다고 단정 짓는 뉘앙스의 말들이 조금은 불편하기도 했다. 책이 좋아서 사서가 된 경우도 있겠지만 그 외에도 수많은 이유들이 존재했을 텐데 말이다.
나는 처음부터 책이 좋아서, 책을 읽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 같아서 사서라는 직업을 선택한 사람은 아니다. 그래서 한치의 의심 없는 확언이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그러나 사서가 된 이후에, 책은 내 삶 곳곳에 진하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지금은 당당히 말한다. "저는 책 읽는 사서입니다"라고.
사서는 권한다
반평생, 책 속을 헤매며 살아가고 있다. 내가 읽는 책들은 내 마음을 고요하게도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소용돌이 치는 폭풍우 속에 가둬버리기도 한다. 그 여운이 가시기 전에 뭐라도 끄적이자는 생각으로 독서노트에 짧게 단상을 남겼고 본격적으로 블로그에 기록하기 시작한 지는 5년이 되었다.
그렇다고 제대로 형식을 갖춘 서평을 쓰고 있지는 않다. 기억하고 싶은 문장, 닮고 싶은 문체들을 수집하고 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내 마음을 출렁이게 한 문장들과 나만의 공간에 가둬두었던 문장들을 하나씩 꺼내 조합하고 재창조해 가면서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 즐겁다. 적절한 순간이 오면, 읽는 행위는 쓰는 행위를 위해 힘을 보태 준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 즐거움을 만끽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읽고 쓰는 것을 그저 '즐긴다'에 방점을 찍는다면 사서가 아니라 도서관 이용자로 남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서와 이용자의 차이는, '권한다'에 있다. 여기에 덧붙여 '활용한다'로 확장시키는 것이 사서의 영역이다. 사서의 독서력을 사서 개인의 성장 동력으로만 활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권하고 전달하고 연결시키려는 움직임이 사서의 역할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보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아무것도 '읽지 않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자칫 '책을 읽읍시다'라는 말 자체가 폭력이 될 수 있기에 조심스럽다. 그렇다고 읽지 않는 시대를 그저 지켜보고만 있는다면 그건 사서로서 직무유기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가닿지는 않을지라도, 필요한 순간과 시기와 감정에 맞는 책을 누군가에게 권하는 일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런 맥락에서 사서는 다독가가 되어, 읽은 책들을 도서관 프로그램에 다양한 형태로 접목시키려 노력해야 한다. 책 읽는 사서로서 살면서 시도했던 것들과 경험으로 느꼈던 것들을 조금 풀어내 보겠다.
첫째, 섬세한 북큐레이션이 그 시작이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독서 취향을 담은 코너를 만들어 자료실 출입구 정면에 노출시켰다. 보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게 만들었다. 우선은 발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주효했다. 예상치 않았던 순간에 인생책을 만났다고 고백했다. 1년에 150권 이상의 책을 읽고 소개했다.
둘째, 꾸준히 작가와 독자가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다. 관심 있는 책의 작가를 직접 만나는 경험은 독서력을 향상시키는데 엄청난 기폭제가 된다. 한 권의 책은 또 다른 책과 연결되고, 내가 만난 작가는 독서 인생에서 만난 무수한 점들을 커다란 느낌표로 전환시킨다. 작가의 입을 통해 언급된 책들은 대출 예약이 줄을 잇는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면 결국 온라인 서점에서 결제 버튼을 누른다. 일종의 나비효과다.
셋째, 블라인드북 이벤트를 적극 활용했다. 독서 취향이 모두 같을 수는 없지만 사서 경력 25년 노하우로 파악한 연령별 독서 취향의 보편성에 기대어 보았다. 최소한 내가 추천한 책이 '악서'였다는 원망은 듣지 않을 자신이 있었기에, 선택 앞에 망설이는 이용자들에게 책을 내밀었다. 사서의 무수한 실패 경험이 이용자들의 실패 확률을 낮출 수 있다. 고민하고 망설이는 시간을 줄여줄 수 있다. 그건 바로 시간을 선물하는 일이다.
넷째, 다양한 색깔의 독서 동아리를 발굴하는 일에 주력했다.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오면서 온라인 독서 플랫폼의 강점을 최대한 활용하고자 했다. 연령, 성별, 시간, 공간의 제약 없는 열린 플랫폼을 지향하면서 독서로 가는 길목마다 마음 챙김과 감동이라는 부스러기를 한두 개씩 흘려 놓았다. 함께 읽기는 혼자 읽기보다 힘이 세다. 함께 읽기를 통해 다친 마음이 치유되고 닫힌 마음이 열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독서모임에서 만난 책동무들로부터 조건 없는 환대와 지지를 받는 충만한 느낌을 경험해 봤으면 좋겠다.
다섯째, 경기도 사서서평단 및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활동하면서 광장 글쓰기를 시작했다. 내 글의 빈약함과 비루함을 너무나 잘 알지만 광장에서 만나는 비바람이 모나고 성근 나의 글을 다듬어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귀한 책을 공적인 지면을 통해 제대로 소개하고 싶었고, 처음과 끝이 있는 완성도 있는 글을 쓰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글쓰기를 통해 책과 사람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고 싶었다. 여전히 전송 버튼을 누르는 마지막 순간까지 수없이 망설인다. 자기 검열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쓴다. '읽고 쓰고 권하는 사서'가 되기 위해서는 용기 또한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이런 책
<어서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를 쓰신 황보름 작가님은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책을 읽는 사람인가를 가장 궁금해하고, 세상 사람들을 '가방에 책을 넣고 다니는 사람인가 그렇지 않은 사람인가'를 기준으로 나누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한다. 굉장히 인상적인 자기소개였다.
우리는 스마트폰 없이 외출하는 것을 몹시 불안해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언젠가부터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다. 이어폰을 끼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풍경이 자연스러워졌다. 삭막하다 못해 기괴하다. 가방 안에 얇은 시집 한 권 넣고 다니던 낭만의 시절을 소환하고 싶다. 지하철 안에서 독서플래시몹이라도 해봐야 하는거 아닌가 싶다.
<정신과 의사의 서재>를 쓰신 하지현 교수님은 "독서를 통해 코어가 강화되는 경험은 결국 책을 통해 내가 깊어지고 넓어지는 과정이다. 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지식을 통해 이치를 깨달으면서 세상에 대한 인식이 깊어진다. 타인의 관점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내 관점의 편협함이 깨진다"라고 말씀하셨다. 독서를 통해 코어 근육을 강화하고 즐거움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시대를 꿈꿔본다.
각설하고, 혹시라도 이 글을 읽고 '책 한 권 읽어볼까? 마음먹은 분이 계시다면 그분들께 지극히 개인적인 독서 취향으로 상황별 추천도서 몇 권을 소개해 보려고 한다. 글쓰기의 기본기를 배우고 싶다면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 와 편성준의 <살짝 웃기는 글이 잘 쓴 글입니다>를, 겨울밤 이불 속의 따뜻한 온기를 느끼고 싶다면 강윤미의 <우리는 마침내 같은 문장에서 만난다> 와 이은정의 <시끄러운 고백> 을, 독서 권태기를 지나고 있을 때 독서의욕을 끌어올리고 싶다면 김동식의 <회색 인간>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져보고 싶다면 하재영의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를, 가시 돋친 말, 차가운 말로 인해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받고 싶다면 김윤나의 <말 그릇>을, 나 자신과 내 주위 사람들에게 조금 더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다면 김혼비의 <다정 소감>을 읽어보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