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가구 여성들이 혼자 살면서 알게 되는, 새롭게 깨닫고 경험하게 되는 이야기들에 대해 씁니다.[편집자말] |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렸던 지난 3년이 나에게 남긴 건 '무기력함'과 '내려놓음'이었다. 삶의 근심과 걱정이나 내려놓았으면 참 좋았으련만, 난 무기력을 이기지 못하고 나를 내려놓고 말았다.
우리 모두가 그랬듯, 나도 홀로 떠다니는 섬처럼 살았다. 약속은 사라졌고, 재택근무가 보편화되면서 회사에서도 사람 만나는 게 힘들어졌다. 1인 가구였던 나는 집에서조차 말을 건넬 사람이 없었고, 많은 시간을 혼자 견뎌내야 했다.
다 귀찮았던 코로나 3년
무기력했고, 다 귀찮았다. 나를 꾸미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것도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난 같은 옷을 교복처럼 돌려 입기 시작했다.
청바지 2벌과 비슷한 디자인에 색만 다른 긴팔티셔츠 4장. 지난 3년간 내 외출복 착장에 9할의 지분을 차지하는 옷들이다. 더위를 많이 타지 않아 여름에도 긴팔은 문제가 되지 않았고, 겨울에는 겉옷을 입으면 그만이었다.
애착인형을 놓지 못하는 어린애처럼 내 몸과 저 옷들이 마치 하나인양 입고 또 입었다. 그렇다고 옷에 애정이 넘쳤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편해서, 어제도 오늘도 손에 잡힌 게 저 옷이어서 몸에 걸쳤을 뿐이었다.
3년간 난 새 옷도 사지 않았다. 쇼핑이 하기 싫으면, 옷장에 들어있는 옷을 꺼내 입으면 될 일이었건만, 그것도 귀찮다며 옷장에 그대로 처박아두었다.
회사에 갈 때도 교복처럼 같은 옷을 입는 마당에, 부모님을 뵈러 고향에 내려갈 때는 더 가관이었다. 어차피 마스크를 끼니 세수는 고양이세수면 족했다. 얼굴에 물칠만 하고, 화장은 간단히 건너뛴다. 머리를 질끈 묶고, 늘 입고 다니는 청바지와 티셔츠를 걸치고 가방을 둘러멘다. 쌀쌀하다 싶으면 당장 체육대회라도 뛰어야 될 것 같은 잠바에 지퍼를 목까지 채우고 집을 나섰다.
후줄근한 나의 행색에 엄마와 아빠는 3년째 같은 말을 되풀이하셨다.
'옷 좀 사 입어. 예쁘게 좀 입고 다니고!'
나도 지지 않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아, 귀찮아. 누가 본다고!'
예전에는 예쁘게 차려입고 회사도 가고, 부모님도 찾아뵙고 했었던 것 같은데. 나는 '귀찮다'와 '편하다'를 핑계 삼아 나에게 손을 놓고 있었다. 남이 안 보니까, 내가 편하니까, 나에게 애정을 갖고 가꾸는 마음을 아예 놓아버렸다.
팬데믹의 기세가 꺾이고 종식을 향해 달려가는 와중에도 이미 몸에 배어버린 습관은 무서웠다. 그렇게 옷과 나는 물아일체의 지경에 다다르며 3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나 왜 이러고 살지?
그러다 몇 달 전, 문득 나의 모습을 거울로 자세히 훑어보았다. 3년간 늘 보아오던 그 모습 그대로였는데, 그날은 왠지 모르게 내가 더 못나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짜증이 훅 올라왔다. 아, 나 왜 이러고 살지?
몇 년간 내가 같은 옷을 돌려 입었다는 걸 사람들은 모를 수도 있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남이 뭐를 하든, 어떻게 입고 다니든 관심이 없으니까. 문제는 남이 아니라 나다.
내가 나에게 왜 이렇게 입고 다니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하면서, 심지어 3년의 시간동안 이미 낡아버린 옷을 입는 나를 보며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는 각성이 들었다. 그리고 남이 아닌 나에게 잘 보이기 위한 수고가 시작되었다.
휘황찬란하게 치장을 할 필요는 없다. 돈을 물 쓰듯 사치스러운 옷을 사야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옷장에 있는 옷을 꺼내 깨끗이 빨아 입고, 사고 싶은 옷은 낭비하지 않는 선에서 사면 될 일이었다. 그게 난 왜 그렇게 귀찮았을까.
옷장에서 한껏 웅크리고 있던 나의 원피스를 3년 만에 꺼내어 입고 회사에 출근했다. 동료들은 너무나도 오랜만에 교복을 벗어던진 나에게 '오늘 선 보냐?'며 실없는 농담을 건넸고, 평소와는 다른 모습에 예쁘다며 칭찬을 쏟아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앞으로도 이렇게 입고 다녀. 너무 예쁘다."
옷을 새로 산 것도 아니고, 있던 걸 꺼내 입었을 뿐인데 이런 말까지 듣다니. 어쩐지 어깨도 당당하게 펴지고, 허리를 쭉 뻗어 곧은 자세로 걷게 되는 것만 같다.
지난 3년이 나를 내려놓은 시간이었다면, 이제는 나를 다시 올려놓을 시간이다. 나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을 끌어올려야 할 시간, 나의 자존감을 되살려야 할 시간이 되었다.
나랑 사랑할 시간
몇 년간 '참 예쁘네' 생각만 했던 샤스커트를 하나 구입했다. 가성비 극강에 샤랄라한 분위기마저 연출해주는 샤스커트를 입고 나니, 이거 사는 데 왜 몇 년이 걸렸을까 후회마저 든다.
'누가 본다고!'는 틀린 말이다. 나를 누가 보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내가 나를 보고 있다, 그것도 매 순간순간! 아무도 나를 안 봐주면 또 어떤가. 내가 나를 봐주면 된다.
내가 나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귀찮음을 걷어차고 이것저것 옷을 대보는 수고를 감내하는 것. 그리고 그런 나를 내가 예쁘게 보아주는 것. 인생에서 언제나 옳은 말은 내가 나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 이거다.
이제 똑같은 옷을 일 년 내내 교복처럼 돌려 입는 건 하지 않을 거다. 이제는 나를 내버려두는 일은 그만하고, 나를 소중히 아끼는 마음을 키워갈 생각이다.
나와 많은 시간을 함께 한 옷은 깨끗이 빨아 옷장에 넣어두었다. 지난 3년간 나와 한몸처럼 지내준 옷들아, 고맙다. 그래도 365일 만나던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만 하자. 다음에 부모님을 찾아뵐 때는 샤스커트를 예쁘게 차려 입고 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