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핵심 주제와 벗어난 지엽적인 문제로 아이들을 괴롭혀서야 되겠습니까?"
지난 5월 중간고사가 치러진 뒤 익명의 학부모로부터 항의 전화를 받았다. 한국사 과목만의 문제도 아니다. 시험이 끝나면, 난이도와 유형, 정답의 모호성 등을 질타하는 학부모들의 민원이 줄을 잇는다. 1~2점 차이로 자녀의 내신 등급이 갈리는 현실에서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마음 씀씀이다.
출제하는 교사도 안다. 그것이 굳이 알 필요도 없는 허드레 문제라는 것을. 그런데도 내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단 하나, '변별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등급을 산출해야 하는 시험에선 누구나 맞힐 수 있는 쉬운 문항을 출제해선 곤란하다. 동점자 수가 등급 구간보다 많으면 모두 아래 등급으로 표시되기 때문이다.
100점을 맞았다는 것보다 100점 맞은 아이가 몇 명인지를 먼저 묻게 되는 것도 그래서다. 치열한 내신 등급 경쟁 속에선 100점 만점조차 안심할 수 없다. 최상위권 아이들일수록 시험을 제발 어렵게 출제해달라고 간청한다. 그들은 자기가 틀리는 것보다 모두 맞히는 게 더 두렵다고 말한다. 만점이라는 건 '초딩' 때 용어일 뿐, 지금 '고딩'에겐 1등급만이 유의미하다.
교과마다 성취기준이 제시되고, 아이들의 성취 수준을 고려해 출제하도록 규정돼 있긴 하다. 단원별 학습 목표와 반드시 알아야 할 핵심 용어가 교과서에 자상하게 적혀 있어 수업 때나 시험 출제시 지침으로 삼는다. 아이들도 중점적으로 공부해야 할 내용이 무엇인지 교과서만 봐도 정확히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 챙겨서는 시험을 망치게 된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교과서에 서술된 내용과 교과 진도를 벗어나 출제하진 않지만, 온갖 기괴한 방식으로 꼬고 또 꼬아 출제한다는 건 아이들에게 불문율이다. 몇몇 교사는 그마저 안심하지 못해 문항마다 소수점 이하로 배점하는 신공을 발휘하기도 한다. 동점자를 없애려는 것이다.
일단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는 말로 응대를 시작한다. 물론 영혼 없는 사과다. 출제 교사를 책망할 수 없는 문제 제기인 탓이다. 거칠게 항의하는 학부모도 '변별력을 갖춘 쉬운 문항'이라는 말이 형용모순이라는 걸 모르진 않는다. 마땅히 하소연할 데가 없으니 애꿎은 교사에게 전화를 걸었으리라 생각하면 딱히 불편하지 않다.
고등학교에 발생한 혼란
뜬금없이 지난 중간고사 때 한 학부모와의 대화가 떠오른 건, 지난 15일 윤석열 대통령의 돌출 발언을 접하고서다. 윤 대통령이 이주호 교육부장관에게 "공교육 교과 과정에서 다루지 않는 내용의 문제는 수능 출제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지시했다는 보도가 잇따랐다. 이는 대중에 '수능을 쉽게 출제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이어서 나온 대통령실의 해명은 오해와 억측을 불식시키기는커녕 더 큰 혼란을 빚었다. "학교에서 도저히 가르칠 수 없는 과목 융합형 문제"를 예로 들며 "이런 실태가 교육 당국과 사교육 산업이 한통속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윤 대통령의 발언을 전했다. 이른바 '킬러 문항'을 출제하지 말라는 지침으로 여겨지면서, 혹 떼려다 혹 붙인 꼴이 되고 말았다.
윤 대통령의 발언이 전해지자마자 올해 수능은 '물 수능'이 될 것이라는 대입 전문가의 예측이 쏟아졌다. 순식간에 학교는 물론, 사교육 시장에까지 풍파를 일으켰다. 당장 수능을 코앞에 둔 고3 교실은 'EBS 수능 교재에 다걸기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불안이 삽시간에 퍼졌다. 수능의 난이도는 사실상 'EBS 수능 교재' 연계율로 조정해온 터다.
영역마다 '킬러 문항'이 사라지면 수능은 변별력을 잃게 될 게 뻔하다. 특히 최상위권 아이들에게 '킬러 문항'은 등급과 당락을 결정하는 열쇠다. 아이들 사이에선 '킬러 문항'을 맞히지 못하고선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는 어림없다는 말이 공공연하다. 수학 영역의 경우, 중하위권 아이들 앞에서 교사가 먼저 21번과 30번 문항은 포기하라고 종용할 정도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되는' 우리네 교육 현실에서, 고육지책이었던 '킬러 문항'이 사라진 자리엔 더욱 기상천외한 편법이 등장할 거라는 씁쓸한 전망이 나온다. 변별력이 낮아진 수능의 대안엔 과연 뭐가 있을지 설왕설래하는 모습도 눈에 띈다. 이미 대학마다 전형별 모집 인원과 기준이 확정된 상태여서 '물 수능'이 큰 혼란을 불러올 것이란 예측엔 이견이 없다.
교육부 실무자가 할 얘기를 대통령이 나서서 하니...
대통령실의 오락가락 해명에도, '쉬운 수능'이 바람직하다는 대통령의 발언 취지에는 교사로서 100% 공감한다. 몇 개의 '킬러 문항'으로 대학에서의 수학 능력을 평가한다는 건 애초 어불성설이다. 오로지 변별만을 위한 시험이라면 존재 이유도 없을뿐더러 대학수학능력시험이라는 이름을 바꿔야 한다.
문제는 깃털만큼 가벼운 대통령의 입과 정책 역량의 부족이다. 발언의 무게가 태산 같아야 할 대통령이 지인들과의 술자리에서 나눌 만한 이야기를 마구 내뱉는 건 스스로 권위를 실추시키고 국격마저 훼손하는 일이다.
대통령으로서, 현 수능 체제에서 여전히 사교육 의존도가 높으니 대책을 마련하라고만 하면 족하다. 수능의 난이도와 '킬러 문항', 공교육 교육과정 등은 교육부에서 궁리해 대안을 마련해 보고하도록 하면 된다. 교육부의 말단 실무자가 할 만한 이야기를 대통령이 나서서 하다 보니, 대안 마련을 위한 토론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관련 공무원들이 총동원돼 발언 취지를 해명하는 데 진땀을 빼고, 큰 그림을 그려야 할 수능 개혁은 고작 '킬러 문항'을 출제하지 않는 정도에서 마무리될 판이다. 다른 주장을 펴거나 대책을 제시했다간 자칫 항명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사달은 우리 교육 현실에 대한 대통령의 무지와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라 뒷맛이 영 개운찮다.
지금껏 장소와 분야를 불문하고, 윤 대통령이 내놓은 발언마다 뒤탈이 났다.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오해와 갈등을 낳고, 대통령실 등 관련 공직자가 해명하고, 또 다른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패턴이 매번 반복됐다. 더욱이 이번에는 전국의 수험생과 학부모, 학교와 사교육 업체를 느닷없이 혼란에 빠트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대통령이 해야할 일
'아무 말 대 잔치'일랑 그만두고, 임기 초반의 힘 있는 대통령으로서 우리 교육의 묵은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청사진을 제시해주면 좋겠다. 그것이 지나친 욕심이라면, 적어도 우리 교육의 미래를 고민하는 모습만이라도 보여달라. 지금 우리 교육은 고작 '킬러 문항' 출제 여부 따위에 애면글면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
대통령이 무한경쟁을 조장하는 줄 세우기식 상대평가를 없애고 절대평가 체제로 전환하는 문제부터, 학생부종합전형을 비롯한 대입 전형의 신뢰 확보 방안 등을 염두에 두고 계시는지 궁금하다. 그것들이 지엽적이라면, 생존의 위협에 직면한 지방대 문제와 철저히 서열화한 수도권 중심의 학벌 구조를 혁파하기 위한 대안을 고민하고 계시는지도 여쭙고 싶다. 대통령의 고민이 선행되지 않으면 담당 공무원은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
물론, 큰 기대는 없다. 대통령은 '학교에서 도저히 가르칠 수 없는 과목 융합형 문제'의 출제를 질타했지만, 현행 교육과정의 핵심 목표가 '지식 정보 사회가 요구하는 창의 융합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 기반 마련'이라고 적시돼 있다. 교육과정에 따라 교과의 벽을 허물어 융합 교과 수업을 운영하는 학교도 부지기수다. 문과와 이과의 통합도 그런 취지에서 이뤄졌다.
그렇다면, 교육과정을 제대로 구현해내지 못한 점을 성찰하는 게 먼저다. 과목 융합형 수업을 권장해놓고선 학교에서 가르칠 수 없다고 전제한 뒤 수능에 출제하지 말라고 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대통령이 과연 현행 교육과정을 주마간산식이라도 훑어는 보셨을까 싶다. 그러잖고선, 교육부장관 앞에서 교육과정을 희화화한 발언을 할 리 없다.
그나저나 지엽적인 시험 문제로 아이들을 괴롭히지 말라는 학부모에게 대꾸할 말이 생겨 좋긴 하다. 대통령이 나서서 수능조차 쉽게 출제하라고 하는 마당에 한낱 기말고사에 '킬러 문항'을 꽂아 넣긴 뭣하다. 문제는 그로 인해 파생되는 온갖 부작용은 대통령이 책임지거나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다. 대통령이 임기 초부터 부르댄 교육 개혁의 배가 자꾸만 산으로 가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