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조회 시간, 내가 담임을 맡고 있는 고3 아이들은 당장 9월 모의평가가 걱정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열변을 토해냈다.
"대통령님이 입시전문가 맞아요?"
"킬러 문항 안 내면 뭐해요. 그 대신 어려운 문항수가 늘어날 텐데요."
"국어 비문학이 많이 어렵긴 해도, 학교에서 안 배우는 내용이 나오지는 않아요."
"수능이 코앞인데 지금 저렇게 막 바꾸면 우린 어떡해요?"
'교육과정에서 출제한 것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난이도가 높은 일부 킬러 문항이 사교육을 부추기고 있다'는 윤 대통령의 질타가 학교 현장을 뒤흔들고 있다.
결국 당정이 교육과정 외 킬러 문항 출제를 수능에서 배제하기로 결정하면서, 당장 9월 6일 치르게 될 대학수학능력시험 모의평가 대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우왕좌왕이다. 교사와 학생, 학부모 모두 대혼란에 빠졌다.
대통령의 폭탄 발언, 현장의 반응
현장 교사들은 대통령이 나서 저렇게 난리를 쳐도, 올해 9월 모평과 11월 수능의 난이도는 유지되거나 외려 더 높아질 것이라고 전망한다. 왜냐하면, 수능이 자격고사가 아닌 한 최상위권 변별을 위해서는 '적정 난이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수능'은 등급 공백을 불러온다. 경쟁이 치열한 서울 소재 주요 대학이 정시로 40% 정도를 선발하는 현실을 고려하면 그럴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킬러 문항을 출제하지 않고도 어떻게 적정 난이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 방법은 생각보다 쉽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수능을 다년간 연구하고 출제 및 검토 과정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 고난도 문항수를 줄이는 대신 중간 난이도 문항수를 늘리면 된다고 생각한다. 쉬운 문제는 자연스럽게 비중이 줄어들고, 수험생들은 고난도뿐만 아니라 중간 난이도 문제를 푸느라 시간이 부족하게 될 것이므로, 전체 난이도는 변함이 없거나 도리어 상승할 가능성이 크다. 애꿎은 아이들만 고통을 겪는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지난 30년간 수능 출제를 담당해온 전문연구기관이다. 대통령은 수능 출제와 관련해서는 비전문가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찌 비전문가가 대한민국 최고의 전문가 집단인 교육과정평가원을 가르치려 든단 말인가. 일부 비문학 문항이 지나치게 어렵게 출제돼 사교육이 번성한다고 생각했다면 이를 바로잡을 방법을 찾으라고 지시하면 된다. 킬러 문항 몇 개가 사교육의 '진앙'인 것처럼, 그것만 없애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더군다나, 6월 모평 채점 결과는 아직 나오지도 않았다.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내용이 '킬러 문항'으로 출제되었다는 구체적이고 정확한 팩트가 확인된 게 있는가? 도대체 무슨 근거로, 수능을 코앞에 둔 시점에 자신의 지시 사항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다며 교육부 국장을 경질하고 교육과정평가원장을 물러나게 하는가. 교육과정평가원은 "교육과정 바깥에서 수능 문항을 출제하지 않는다"는 대원칙을 견지하고 있었다. 대통령과 당정은 그 원칙이 깨졌다는 증거부터 내놓고 논의를 시작했어야 한다.
진짜 '진앙'은 따로 있다
백번 양보해 교육과정 바깥에서 출제된 것으로 의심되는 킬러 문항이 있다고 치자. 몇몇 킬러 문항이 사교육의 '진원'이라는 진단은 크게 과장된 것이다. 10%의 원인으로 나머지 90%를 퉁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문제의 핵심은 학부모와 학생이 사교육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적 현실에 있다. 고등학교만 나와서는 먹고살 수가 없고, 어떻게 해서든 '좋은 대학'에 진학해야만 그나마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믿게 만드는 살인적 경쟁체제가 사교육의 진짜 '진앙'이다.
교육과정 바깥에서 초고난도 문항을 출제해선 안 된다는 대통령의 문제의식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킬러 문항 몇 개를 없앤다고 사교육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왼손으로는 사교육을 때려잡겠다면서 오른손으로는 자사고·외국어고·국제고를 존치시키는 '창의성'이 참으로 놀랍다.
차라리 잘됐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인가. 어차피 대통령이 시작한 일이니 결자해지도 대통령이 이끌어내야 한다. 킬러 문항 하나를 잡는다고 사교육 광풍을 잠재울 수 없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사교육이 창궐할 수밖에 없는 근본 원인은 무엇인지, 공교육을 정상화하고 경쟁교육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어떤 개혁이 필요한지, 사회적 공론화와 숙의 과정을 통해 해법을 모색하는 일에 대통령이 발 벗고 나서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