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고한 전세사기 피해자 5명의 생명이 스러지고서야 전세사기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2023년 하반기에는 더 많이 터져나올 깡통전세, 전세사기 피해 상황을 보고, 사각지대를 보완하면서 전세제도의 개편을 준비해야 한다.
전세사기가 곳곳에서 터져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깡통전세가 만연했기 때문이다. 깡통전세를 들여다보면 전세제도 자체를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5월 16일 취임 1주년 기자간담회에서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전세 제도가 (가졌던) 역할이 있지만 이제는 수명을 다 한 게 아닌가 보고 근본적으로 검토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후 인터뷰에서의 발언을 볼 때 전세제도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이 엿보이고, 전세를 어떻게 축소할지 고민하는 뉘앙스가 느껴진다.
반면 이한준 LH 사장은 지난 5월 18일 기자간담회에서 "전세라는 게 우리나라에서 주거사다리의 중요한 지름길이었는데 그 자체가 붕괴된다면 소위 말해 내 집 마련하는 데 어려움이 생길 수 있다"며 전세제도의 인위적 폐지는 안 된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주거사다리로서의 전세, 20세기의 유물
전세제도는 대다수 선진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임차 형태이다. 전세제도는 과거 한국이 개발도상국이었던 시절에는 목돈이 없는 임차인은 월세로, 부지런히 저축해 목돈을 만든 임차인은 전세로, 전세보증금을 밑천으로 돈을 일부 융통해 자가로 가는 주거사다리의 중간 단계로 작동하며 디딤돌이 되어 주었다.
지금도 전세는 자가로 가는 주거사다리의 디딤돌이 되어 주고 있을까? 2000년대 이전의 한국에서는 전세가 주거사다리의 역할을 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오히려 전세가 임차와 자가의 거리를 더 멀어지게 만들고 있다.
가계금융이 미발달된 개발도상국 시절에는 전세가 강제저축의 기능을 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목돈이 없어도 전세로 다 들어가서 살고 있다. 정부가 서민들의 주거불안을 해소한다는 명분으로 저리의 전세자금대출을 남발하면서 목돈이 없어도 전세자금대출로 전세주택에 거주한다. 2008년부터 전세자금대출 제도가 시행되면서 개발도상국 시절처럼 목돈이 없으면 월세, 목돈이 있으면 전세라는 도식은 들어맞지 않고 있다.
아울러 전세자금대출로 마련한 전세보증금이 임대인의 갭투자 자금으로 사용되면서 주택 가격을 밀어 올려 서민들의 내 집 마련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이쯤 되면 전세가 내 집 마련으로 가는 주거사다리의 중간단계가 아니라 오히려 내 집 마련으로 가는 주거사다리를 붕괴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세제도의 득과 실
전세제도가 한국사회에 미친 득과 실이 있다. 한국의 소득 대비 주거비 지출비율이 OECD 평균 대비 낮은 수준인 이유는 월세 대비 주거비 지출이 적게 드는 전세제도에 기인한 바가 크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는 법이다. 전세제도는 부동산 가격 상승기에는 주택가격을 끌어올리는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정부가 아무리 LTV(주택담보대출비율), DSR(소득대비원리금상환비율) 규제를 강화하더라도 전세자금대출이라는 규제 사각지대를 타고 주택시장으로 흘러들어온 유동성은 갭투기꾼의 투기자금으로 활용되어 주택 가격 폭등의 마중물이 되었다.
반면 부동산시장 침체기에는 깡통전세‧전세사기로 인해 서민들의 전재산이나 다름없는 전세보증금 손실을 위협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역대 정부는 전세가 서민주거안정에 기여하고 주거사다리의 역할을 한다는 철지난 관점으로 무분별하게 전세자금대출을 확대하고, 전세보증보험으로 주택매매가격을 넘기는 전세보증금까지 과잉보호하며 전세보증금을 밀어올리는 데 기여했다.
전세에 대한 정부의 파격적인 인센티브 덕분에 임차인의 전세보증금만으로 집을 사는 무자본 갭투기가 성행했고 결국 수많은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양산되면서 임차인들은 가지고 있던 전재산인 전세보증금도 제대로 회수할 수 없는 지경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전세제도의 수명, 시장에 맡겨라
전세가 존속되는 가장 큰 이유는 월세보다 전세가 임대인과 임차인에게 경제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1995년 이후 전세 점유율이 꾸준히 떨어졌던 이유는 금리와 주택 가격 상승률의 추세적인 하락으로 인해 임대인은 전세보다 월세를 선호했기 때문이었다.
임차인 역시 전세와 월세의 주거비 지출 비용을 따져 유리한 점유 형태를 선택하기 마련이다. 지난 1년간 임차인들은 금리에 따라 전세와 월세의 비용 지출의 경중을 따지면서 점유 유형을 선택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여주었다.
1995년 이후 꾸준히 떨어지던 전세 점유율이 2015년 이후 횡보한 이유는 정부 보증을 통한 저리 전세자금대출, 전세보증보험 등 전세에 대한 정부의 정책적 인센티브로 인해 월세보다 전세가 임차인들에게 더욱 유리한 점유 형태가 되었고, 주택가격이 반등하면서 임대인 역시 임차인의 전세보증금을 레버리지 삼아 부동산매매차익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정부가 전세자금대출 보증, 전세보증보험 등 전세제도의 인위적인 유지를 위한 정책 인센티브를 제공하지 않았다면 2015년 이후에도 전세점유율은 횡보가 아닌 꾸준히 하락했을 가능성이 높다.
전세의 존속 여부는 시장에 맡겨두면 된다. 정부가 수명이 다 되었다고 판단했다고 해서 제도를 없앨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전세의 존속 여부는 시장에 맡겨두되, 정부는 전세에 대한 과도한 정책적 인센티브를 서서히 줄여나갈 필요가 있다.
전세자금대출의 정부 보증한도를 축소하여 은행이 대출에 대해 엄격히 심사를 하도록 유도하고, 주택가격의 90%(공시가격의 140%)인 전세보증보험의 보호한도도 더 낮추어야 원희룡 장관이 기대하는 것처럼 주택가격과 전세보증금의 갭이 벌어질 수 있다.
역대 정부의 전세에 대한 정책적 인센티브 제공이 서민들의 주거안정을 위한 선의라는 점은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과도한 선의가 시장을 왜곡시키고, 도덕적 해이를 일으킨다는 점을 확인했기에 전세에 대한 정책적 인센티브를 줄여나가면서 대한민국 경제 규모에 맞는 수준의 주택 점유 형태로 진입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