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의사의 권유로 반강제로 개를 키우게 된 우울증 환자가 개로 인해 웃고 울며 개와 함께 성장해 나가는 이야기. [기자말] |
타고나길 예민하게 타고난 건지 삼풍백화점 참사 피해 이후 이렇게 된 건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는데 나는 타인에 비해 민감한 사람이다. 좋게 말하면 눈이 좋고 촉이 좋은 편이고, 다르게 말하면 슬픈 예감이 잘 들어맞는다. 하지만 단점은 평소에는 감각을 거의 쓸 일이 없다는 거다. 내가 서울이라는 도시가 아니라 아마존에 살고 있다면 이 능력을 십분 발휘하며 살지도 모르겠다.
정신과 의사 선생님에 그러는데 나 같은 사람을 학계에서는 HSP(Highly Sensitive Person)이라고 한단다. 타인보다 민감해서 모든 상황에 철저하게 미리 계획 세우고 실천해야 하는 강박이 있고 위기를 극복할 완벽한 방법을 머릿속에 늘 그려두어야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불안감 높은 사람 말이다.
이런 성격을 익히 알고 있기에 평소에 나는 외부에서 오는 과다한 자극을 의식적으로 차단한다. 또 정신과 약을 먹어 생체적 민감도를 떨어트린다. 그래야만 일상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쩌다 스트레스를 받아 이 기능을 통제하지 못하게 되면 나는 바로 '지옥행 특급열차'를 탄다.
봄이 되면 악화되는 질병
지독한 불면과 편두통을 시작으로 극도의 우울과 불안감에 시달린다. 가만히 있어도 손이 덜덜 떨리고 심장이 뛴다. 상황이 안 좋을 땐 약도 잘 안 듣는다. 병증이 심할 땐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고 싶다거나 운전하다가 핸들을 그냥 놓고 싶다거나 하는 충동에도 휩싸였다. 다행히 마흔을 넘기니 신체 기능이 떨어져 증세가 자연스레 호전됐다. 남들에게 노화는 악몽인데 내게는 반갑고 반가운 길몽이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아무리 좋아졌다 해도 나는 여전히 불안증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런 연유로 규칙적인 삶을 살려고 꽤나 노력한다. 그래야 병증에 덜 시달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꿈은 남들처럼 부자가 된다거나 유명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니다. 그저 매일매일 낮에 잘 먹고 밤에 잘 자는 거다. 물론 살아보니 이 또한 작은 꿈은 아니더구먼. 이찌 됐든 지금 상황에선 그렇다.
또 이 병은 최초 발병 이후 여태 나를 일 년에 한 번씩 지독한 독감처럼 괴롭혀왔다. 보통은 연말쯤 불안의 바다에 몸을 던지곤 했는데 2014년 이후, 그러니까 세월호 참사 이후로는 희한하게 매년 이른 봄이면 앓는다. 또 다시 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 왜 그렇게 암담하고 무기력한지 모르겠다.
나도 내가 왜 봄마다 앓는지 모른다. 하지만 아프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괴로워지기에 나는 바로 병원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의사 선생님과 상의한다. 선생님은 이런 내게 늘 '트라우마 재발'이라고 한다.
회사에 다닐 땐 아플 때 아프더라도 돈은 벌어야 하니까 연차를 쓰며 사나흘 호되게 앓고 다시 회사에 나가 일상을 회복했는데 문제는 프리랜서가 되면서 시작됐다. 첫 해에는 너무 힘들었다. 그땐 정신과 의사 선생님께 '가까운 정신과 폐쇄 병동에 나 좀 입원시켜 달라'고 했다.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나 같은 케이스, 그러니까 입원 병동에서 상대적으로 가벼운 증상에 해당해서 입원이 쉽지 않고 혹여 입원을 한다 해도 별다르게 치료받는 것 없이 시간만 보내는 거니 그냥 그 돈 가지고 친구들과 여행을 가고 맛있는 걸 사 먹으라고 하셨다.
또 그 모든 게 다 싫거든 하루에 한 번씩 병원에 다녀가라고 했다. 그도 아니면 집에서 개라도 키워야 한다, 라고 해서 개를 키우게 된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선생님의 이 처방은 대단히 유효했다. 정말이지 놀랍게도 개를 키우고 난 후 지난 세 번의 봄이 지나도록 나는 여태 아프지 않았다. 신기하지 않은가. 몇 년 간 치른 '연례 행사'를 개 때문에 멈추게 됐다.
개도 나와 같이 살려고 노력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니 혼자 있으면 원 없이 망가질 수 있는데 일단 집에 개가 있으니까 전처럼 마음껏 망가질 상황이 안 됐다. 개는 말이다. 내가 전날 밤을 새웠든 말든 아침에 눈을 뜨면 밖에 데리고 나가야 한다. 게다가 상대가 개다. 사람이라면 앉혀두고 오늘은 이만저만 해서 산책을 나갈 수 없다고 설득하고 이해를 구하겠지만 개한테는 그게 통하지 않는다.
내 마음이 어떻든 개랑 사는 동안은 무조건 나가야 한다. 희한한 게 이렇게 억지로라도 몸을 움직이고 나면 기분이 어느 정도 괜찮아진다. 전에는 어쩜 그렇게 방에서 현관까지 나가는 게 힘들던지. 집이 넓으면 말도 안 한다. 손바닥만한 데 살면서 운동화 신는 거까지가 그렇게 괴로웠다.
개랑 있다 보니 뭉그적거릴 겨를이 없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나가야 했다. 그렇게 몸을 움직이면 희한하게 또 밥 한술 뜨게 되고 그러면 잠을 좀 자고 그러다 보면 기분이 어느새 좋아졌다. 언젠가 한 번은 산책 나가자는 개를 외면하고 돌아누웠더니 우리 개 복주가 글쎄, 내 앞에 신발을 물고 와 "탁" 하고 던졌다. 해가 중천인데도 보호자가 꿈쩍도 안 하자 제 딴에는 뭐라도 한 번 해본 모양이다.
그 생각을 하니 기특하기도 하고 웃음이 나 자리를 털고 일어서서 "그래 나가자 내가 졌다"고 했다. 강제로 나가 개가 좋아하는 야산을 함께 걸으니 저간의 시름이 절로 잊혔다.
또 개와 종일 붙어있다 보니 따로 시간을 정해 놓고 일하지 않으면 도무지 뭘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개 때문에라도 나는 전보다 더 규칙적인 생활을 하게 됐다. 누가 돈 주고 시켜도 이렇게 잘할 수 없다 싶게 최선을 다해 시계처럼 산다. 그러자 봄이 와도 이전처럼 누굴 죽이고 싶다거나, 죽고 싶다거나 하는 상황에 놓이지 않게 됐다.
요즘은 가끔 개를 보며 이 친구도 나와 살기 위해 나만큼 노력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맞는 말이지. 개는 개대로 얼마나 힘들었겠냐고. 이빨도 뭉툭하고 털도 없는 덩치 큰 동물이 자꾸 자기 보고 앉아라 말아라, 하는 것이. 아마 개가 말을 못 해 그렇지 내 생활 방식에 자신을 맞추는 게 쉽지만은 않았을 거다.
서로가 서로에게 적응하는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렸을까, 복주는 한 삼개월 걸린 것 같고 해탈이는 아직 적응 중인 것 같다. 그간의 세월 동안 우리는 서로 지극히 동물적인 언어로, 그러니까 눈빛과 손짓 만으로 어떤 게 되고 어떤 건 안 되는 건지 확인하며 왔으니까. 덕분에 이제는 전보다 평화로운 날들을 보내고 있다.
또 이런 상호 간의 적응 과정에서 나는 세상의 모든 동거는, 그러니까 사람이라 해도 각기 다른 영혼이 한데 모여 사는 데는 어느 한쪽만의 희생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자명한 사실을 깨달았다. 만약 우리 개가 나를 일방적으로 참아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그것은 '반려'라고 볼 수 없고 동거라고 부를 수 없다. 또 가능성은 희박해 보이지만 내가 개를 일방적으로 참아야 한다면 그것은 폭력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함께 어울려 산다는 건 모두 적당히 조금씩 참으며 지내는 일 같다.
간혹 사람들은 내가 유기견을 기른다고 하면, 그것도 두 마리나 기른다고 하면 다들 하나같이 "참 좋은 일 하시네요"라고 한다. 그런데 내 생각은 다르다. 좋은 일은 내가 아니라 개들도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개들 역시 나를 정서적으로 돌보고 있기 때문이다. 돌봄이란 게 꼭 누군가 흘리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아주는 행위만을 칭하는 건 아닐 것이다. 숨 죽이고 우는 내 손등에 가만히 자기 턱을 기대는 우리 개 역시 나를 돌보고 있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