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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재외동포청이 인천 송도에서 출범했다. 재외동포청은 "재외동포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것은 물론, 재외동포와 모국 간 교류 협력을 촉진하는 연결고리 역할을 수행"한다. 한국 재외동포는 약 193개국 730만 명이다. 세계지도에 표시되는 국가는 237개, UN 회원국은 193개라고 하니 전 세계 어디를 가도 한국 사람이 살고 있다는 얘기다.
재외동포청 출범을 기념해 한국이민사박물관은 근대 한인 이민의 발자취와 인천의 근현대사를 살펴보는 인천역사기행으로 '한민족 첫 공식 이민, 포와(布哇)로 가는 길' 도보 답사프로그램을 마련했다. '포와'는 개화기 때 중국과 일본이 하와이(Hawaii)를 표기한 한자어로, 1960년대까지 사용했다.
지난 10일 동인천 전철역 앞에 20명의 시민이 '포와로 가는 길'을 함께 걷기 위해 모였다. 박물관에서 준비한 안내자료와 이어폰, 생수, 사탕이 들어있는 에코백을 하나씩 받아 어깨에 메고 답사를 시작했다. 이번 답사의 인솔과 해설을 맡은 한국이민사박물관 김상열 관장을 따라 동인천역에서 200m쯤 떨어져 있는 옛 축현역 터로 향했다.
첫 하와이 이민은 1902년이고, 지금 동인천 위치로 역을 이전한 건 1908년이다. 경인철도 종착지인 인천역은 화물과 일본인을 위한 역이었고, 한국 사람들은 주로 축현역을 이용했다.
"처음 경인 철도를 놓을 때 선로가 지금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저기 보이는 주차장 부근에 역이 있었고 그 뒤쪽이 싸리재입니다. 싸리재를 한자로 표기하면 축현(杻峴), 그래서 축현역으로 불렀던 거죠. 하와이로 이민 가는 사람들이 인천에 와서 처음 발을 디딘 곳이 바로 축현역이었습니다."
김상열 관장의 우렁차고 생생한 이야기를 들으며 빛바랜 사진 속 축현역 풍경을 지금 주차장 풍경 위에 재구성했다.
하와이 이민 적극 권장하던 목사
인천 용동을 지나 큰 차도를 건너 내리교회로 이동했다. 내리교회와 하와이 이민은 관계가 매우 깊다. 당시 내리교회에서 목회하던 존스 목사는 교인들에게 하와이 정황을 설명하고 이민을 적극 권장했다.
첫 하와이 이민단에 내리교회 교인만 50명이 있었고, 인천 사람이 86명으로 상당수를 차지했다. 영어를 잘하는 한국인 감리교 지도자들은 통역과 신앙생활 지도를 위해 교민들과 함께 이민 길에 올랐고, 후에 이들이 주축이 되어 하와이 한인교회를 설립했다.
내리교회에서 좁은 골목길을 따라 성공회내동교회로 오르는 길에 빗발이 제법 굵어지고 갑자기 천둥이 친다. 12월 말 영하의 추운 날씨에 낯설디낯선 땅으로 향했던 첫 이민자들의 마음에도 천둥, 번개, 비바람이 몰아쳤을 것이다.
다음 목적지는 감리서 터다. 내동성공회교회에서 신포시장으로 내려가는 길에 12층짜리 스카이타워아파트가 서 있는데, 이곳에 개항장의 통상·행정·사법 기능을 담당하던 관공서인 감리서(監理署)가 있었다. 한때 이곳에 수감되어 옥살이를 하던 김구 선생이 독립자금 모금을 위해 해외교포들에게 열심히 편지를 쓰던 곳이기도 하다.
다음은 데쉴러 저택 터다. 데쉴러는 미국인 사업가로 동서개발회사와 데쉴러은행을 설치하고 하와이 이민사업을 대행했다. 그의 저택이 있던 자리는 현재 인성초등학교 운동장이 되었다. 답사단은 홍예문 옆 언덕으로 올라 자유공원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지를 지나고, 인천 내항이 내려다보이는 조계지 계단을 내려와, 나가사키와 인천항을 오가는 배를 운영했던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에 들렀다.
하와이로 가기 전에 나가사키 항에서 신체검사를 받아야해 이곳에서 나가사키행 배표를 샀다. 현재 인천문화재단 사무실로 사용 중인 일본우선주식회사 건물이 '포와로 가는 길'에 유일하게 원형이 남아있는 개항기 때 건축물이다.
사탕수수에서 시작된 이민생활, 어땠을까
하와이 이민단이 출국 심사를 위해 들렀던 인천해관 터를 지나,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 앞에 도착했다.
최초 이민단이 하와이로 가는 길은 녹록지 않았다. 우선 나가사키로 향하는 겐카이마루 기선에 올라야 했는데, 1902년은 인천 축항이 생기기도 전이어서 겐카이마루는 조수간만 차가 크고 수심이 낮은 제물포 해안가에 정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민단은 먼저 해안가에 설치된 잔교에서 나룻배를 타고 나가사키행 배가 떠 있는 월미도 근처까지 이동해야 했다.
"최초의 하와이 이민단은 잔교에서 가족과 해관·감리서 직원들의 마지막 배웅을 받았을 겁니다."
김 관장의 해설을 듣고 당시 바닷가 풍경이 담긴 사진을 보며 배웅 풍경을 상상해보지만 어디까지가 바다였고 어디쯤 잔교가 놓여 있었을지 가늠조차 하기 힘들다. 시간이 지나면서 제물포 바닷가의 많은 부분이 매립되고 축대가 쌓였다. 1974년에는 대대적인 공사로 현대식 갑문과 물류 설비를 갖춘 내항이 조성됐다. 한국의 산업화를 이끌었던 내항은 지금은 그 기능을 다 하고 원도심 재생의 구심점으로 새로운 변화를 눈앞에 두고 있다. 120년의 세월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1902년 12월 22일 오후 겐카이마루를 타고 인천항을 출발한 121명의 이민단은 12월 24일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해 신체검사를 받았다. 검사에 통과하지 못한 19명을 남겨둔 채, 102명의 이민단은 커다란 갤릭호를 타고 하와이로 향했다. 태평양 위에서 새해를 맞이했다.
출발한 지 22일째인 1903년 1월 13일 저녁 이민단은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다시 신체검사를 받고. 검사에 통과한 84명의 이민단이 협궤열차를 타고 최종 목적지인 와이알루아 농장에 도착했다. 신체검사에 떨어져 다시 되돌아와야 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시작된 이민 생활은 쉽지 않았다.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새벽 4시 반부터 시작된 농장일은 힘에 부쳤다. 노동은 땡볕에서 10시간 동안 계속됐다.
"월급으로 성인 남자는 15~17달러, 여자와 아이들은 50센트를 받았습니다. 필요경비를 제외하고 나면 한 달에 3~4달러가 남는데, 매달 1달러 이상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놓았습니다. 1920년대까지 모은 독립자금이 총 300만 달러 규모였습니다."
용현동에 위치한 인하대학교는 1954년 하와이 이민 50주년을 맞아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하와이 이민자들이 모은 성금이 건립금에 사용되었고, 그 의미를 기념하기 위해 인천의 '인(仁)'과 하와이의 '하(荷)'를 따서 학교명을 지었다.
"리처드 플로리다는 창조도시의 핵심 요소로 3T를 이야기합니다. 3T는 기술을 뜻하는 테크놀로지(Technology), 인재를 뜻하는 탤런트(Talent), 그리고 마지막으로 관용을 뜻하는 톨레랑스 (Tolerance)를 의미합니다. 120년 전 이곳에서 이민자들의 성공을 기원하며 배웅했던 것처럼 이제는 한국으로 돌아오는 재외동포들을 관용과 환대로 마중할 때입니다."
김 관장이 '포와로 가는 길' 도보 답사를 마무리하며 말했다.
■ 도보 답사프로그램 인천역사기행
한민족 첫 공식 이민, '포와(布哇)로 가는 길'
동인천역 (축현역 터) → 내리교회 → 성공회 내동교회 → 감리서 터 → 인성초등학교 (데쉴러 사택 터) → 인천해관 터 → 인천해관 잔교 터 →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 (약 2.5km)
글·사진 박수희 i-View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