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작가, 책을 통해 대한민국을 읽다
"전태일 평전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전태일 같이) 나와 비슷한 동년배들은 이렇게 좋은 남한사회에서 태어나 자랐으니 나보다 행복하고 유의미한 삶을 살았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지난 20일 서울 종로 인사라운지에서 <한국이 낯설어질 때 서점에 갑니다>를 지은 북한 출신(북한이탈주민) 김주성 작가가 북토크에서 한 말이다. 그는 <전태일 평전(조영래 저)>에 대해 이 같이 말했다. 이어 "현재의 행복이 전태일 열사 같은 분의 희생 덕분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오해했다"면서 "이 책을 읽고 그 여운 때문에 하루 꼬박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덧붙였다.
가난한 집에서 나고 자란 평범한 노동자가 20대의 청춘을 바쳐 노동운동을 위해 분신하기까지의 과정을 상세히 그린 전태일 평전을 보고, 김 작가는 "전태일은 '인간다운 삶'이라는 너무나도 당연한 권리를 대변하는 봉화였다. 미처 몰랐던 대한민국의 어제를 알고 전태일을 알게 되면서, 이 땅을 더 사랑하게 된 것 같다"고 강조했다.
위 독후감은 김주성 작가 책 <한국이 낯설어질 때 서점에 갑니다>에서 소개된 전태일 평전 중 일부이다. 작가는 자신이 읽은 43권의 책을 통해 남한사회에 대한 느낌과 생각을 가감 없이 전달하고, 탈북 전 북에서의 경험을 덧붙여 이야기하고 있다. 책에선 탈북인의 정체성을 이해할 수 있는 대목들이 참 많았다. 작가는 책을 통해 한국에 적응하며 낯설었던 과정을 쓰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다고 한다.
본래 일본 도쿄에서 출생한 김주성 작가는 1979년 할아버지를 따라 북송선을 타고 가 북한에서 '째포(재일교포)'나 '쪽XX(일본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소리를 들으며 '경계인'으로 살았다. 북한 진명대학교 국어문학부를 졸업하고 조선작가동맹의 현직작가로도 활동했던 그는, 지난 2008년 탈북에 성공해 대한민국 시민이 됐다.
그는 김훈의 책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를 접하고 한국사회의 보수와 진보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했다. 김 작가는 사회의 양극화가 이렇게 첨예한 줄은 솔직히 몰랐다고 토로했다. 이념의 차이는 남과 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남한 안에서도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단다. 마치 진보와 보수 양편 어느 쪽에 속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강박, 거기서 '멘붕'을 느낄 정도라는 것이다.
진보-보수 중 어느 쪽이냐는 질문에 "나는 둘 다 아닌 삼겹살 편"
과거 다른 한 탈북민조차, 같은 탈북민인 김 작가에게 그가 보수인지 진보인지를 질문한 적이 있단다. 김 작가는 이 에피소드를 설명하며 질문이 '북에서 온 사람들은 보수 편에 서야 한다'는 암묵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마침 그때가 삼겹살을 맛있게 먹던 중이라, 김 작가는 "삼겹살이나 빨리 드세요"라며 자신은 어느 편도 아닌 삼겹살 편이라고 에둘러 답했다고 한다.
진보와 보수는 각자가 판단할 몫이다. 자신도 한때는 보수 편에 속했었지만, 점차 생각이 바뀌어 이제는 자유롭고 행복한 '대한민국 편'에 있다고 그는 말한다.
김형석 교수의 <왜 우리에게 기독교가 필요한가> 책을 읽기 전에 김 작가는 서로 다른 교파가 있고 교회마다 교리가 다르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고 한다. 작가는 "김 교수는 기독교가 사회에 어떤 답을 주어야 할지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면서 '교회는 교리와 종교적 진리에만 머무를 게 아니라 사회가 원하는 진리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 특히 마음에 와닿는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북한에도 평양에 교회가 있다. '봉수교회'라는 곳인데 북한주민 아무나 드나드는 곳은 아니라고 한다. 김 작가는 저서에서 한국에 입국한 후 정착교육기관 '하나원'에서 생활하면서 다양한 종교체험을 통해 기독교를 만나 심취했던 과정을 담담히 술회하고 있다. 북한에서 30여 년 간 살면서 '1인 우상화교육'에 길들여졌던 그에게, 기독교는 한때 위안이자 사랑이었다고 말했다.
요약하자면 김 작가가 지은 책 <한국이 낯설어질 때 서점에 갑니다>는 그가 책을 통해 만난 대한민국에 관한 이야기다. 책이라는 창문을 통해 그는 우물 안의 개구리였던 자신이 우물 밖으로 뛰쳐나와 처음으로 '바깥세상' 즉 남한사회를 보았다. 아랫동네와 윗동네인 남과 북을 비교하며 그는 인간과 자유에 대해 치열하게 질문하기도 한다. 북한에서는 몰랐다가 남한에 와서야 비로소 맛본 '자유'의 진미가 때로는 달지만, 때로는 쓰기도 하다는 사실도 솔직히 고백한다.
특히 남한사회에 대한 그의 느낌과 입장에는 호불호를 떠나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그런 다른 시각이 탈북인들과 소통의 물꼬를 트는 단초인 것도 사실이다. 김 작가는 이 책이 나오기까지 바탕이 된 여러 저자들에게 감사를 잊지 않고 있다.
김 작가가 선정한 43권의 책은 지인 추천도 있었지만 인터넷 검색을 통해 선정한 것도 많다. 가정과 가족, 역사와 인문학, 음식과 반려동물, 바둑 등 취미까지 여러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외국 고전인 조지오웰의 <1984>도 포함됐다. 탈북민뿐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 유익한 책들도 많다. 작가라는 직업을 살려 책을 통해 간접체험하는 그의 노력은, 대한민국이 낯설지 않을 때까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북한사람들이 노래와 발표를 잘하는 이유
북토크이니만큼 책 내용이 주로 얘기됐지만, 현장에선 북한사회와 관련한 이색적인 질문도 여럿 있었다. 김 작가에 따르면 북한에선 컴퓨터가 부족해 손글씨로 제출하는 보고자료가 많고, 김일성 부자 전기나 정치교육과목 등 두꺼운 책을 소리 내어 읽는 시간이 소위 '생활총화' 등을 통해 조직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대부분의 북한이탈주민이 대중 앞에서의 노래와 발표에 두려움이 없는 것은 이런 습관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3만 4천 명에 이르는 탈북민이 이산실향가족 범주에 포함되면서 이들 간의 관계설정과 협력도 중요해졌다. 이에 대해 그는 불과 30여 년의 탈북민 역사는 해방 이후 1세대 이산가족과 후계세대들의 오랜 역사와 유산을 존중하는 풍토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현재 남북 당국 간에 가장 시급한 과제 또한 이산가족상봉이라 진단했다.
탈북민들의 한국사회 적응과 관련한 질문도 나왔다. 이에 그는 탈북민 의사·변호사 포함 인재들이 오면서 권익이 더 신장되고 있으며 사회적응도 빠른 편이라고 평가했다. 탈북 입국시기에 따라 정착 과정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최근 탈북 대학생들은 학습의욕이 대단해 전도가 유망하다고도 덧붙였다. 탈북민에 대한 한국 정부의 정책과 지원에 대해 김 작가는 "혜택에 안주하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아, 탈북인 복지는 명약일 수도 독약일 수도 있다"는 중간 입장을 취했다.
사단법인 '한반도평화연구원'이 주관하는 <북에서 온 작가들> 북토크 행사는 올해 서울시 공모사업이기도 하다. 김주성 작가의 북토크는 총 8번의 행사 중 첫 번째 시간으로, 이후 나머지 북토크는 오는 12월까지 여름 휴가시즌을 제외하고 매월 2회씩 진행될 예정이다. 두 번째 북토크는 오는 29일 <나는 북한댁이다>를 쓴 강하나 작가를 초대해 서울 도봉구에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신청(링크)은 '한반도평화연구원' 사이트에서 가능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게재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