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나자마자 우선 급식증을 목에 건 학생들이 급식소로 달려온다. 오늘도 H 리그 경기가 있나 보다. H 리그는 우리 학교의 이름을 딴 스포츠 리그로 1년에 걸쳐 점심시간에 남학생은 축구를 여학생은 피구를 한다. 1학기에는 반별로 네 번씩 경기를 해 승점이 높은 팀이 본선으로 올라가고, 2학기엔 본선에 올라온 학급끼리 토너먼트로 경기를 해 우승 팀을 가린다.
학생들은 특히, 남학생은 이 H 리그에 진정을 쏟는다. 형형색색의 축구화를 신고 운동장을 누비는 아이들과 관객석에서 응원을 하는 아이들을 보면 그들의 진심이 느껴진다. H 리그가 있는 날이면 결석과 조퇴를 밥 먹듯이 하고, 수업 시간의 대부분을 엎드려 자는 아이들도 꼬박꼬박 학교에 나온다.
교실에서와는 전혀 다른 얼굴
경기를 나가기 전 아이들을 복도에서 만나면 자신이 속한 반의 승리를 기원해 달라고 한다. 교사는 자신이 담임인 반을, 자신이 수업을 담당하는 반의 승리를 기원하는데 사실 이보다도 승리를 거머쥐었으면 하는 반은 따로 있다. 바로 5교시에 수업을 하게 되는 반이다.
점심시간의 경기 결과에 따라 5교시에 들어가는 교사들의 희비가 엇갈린다. 경기에 진 반의 5교시 분위기는(안 그래도 5교시는 식곤증에 허덕이는 아이들의 정신줄을 부여잡고 겨우겨우 수업을 해야 하는데!) 초상집 분위기라, 나도 겉으로 티는 안내지만 내가 수업 들어가는 반이 이기길 속으로 기원한다.
육아 시간을 쓰고 있어 업무를 처리할 시간이 항상 모자란 나는 점심시간도 보통 컴퓨터 앞에 앉아 행정 업무를 처리하며 보내지만, 내가 가르치는 3학년의 경기는 웬만하면 보려고 노력한다.
얼마 전 3학년 OO반의 경기를 처음으로 본 적이 있었는데, 정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반은 교사들 사이에서도 수업하기가 힘든, 무기력이 교실 여기저기에 똬리를 틀은 반이다. 하지만 교실에서와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아이들. 축구 경기에 임하는 그 아이들은 강렬한 생명의 에너지를 내뿜으며 뛰고, 서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며 공을 가지고 논다. 반짝반짝 빛나는 청춘 그 자체인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주책바가지처럼 눈물이 고인다.
경기가 끝나고 다음날 수업에 들어갔는데, 아직도 여운이 남았는지 내 앞에서 까불거리며 "선생님 우리 경기 봤죠? 어땠어요?" 하며 소감을 묻는다. 전날 경기에서 나도 감동을 먹은지라 답변이 길다.
"희채야, 너는 정말 적토마 같더구나. 삼국지에 나오는 전설적인 명마인데, 그라운드에서 너의 몸놀림은 적토마 그 자체였어. 나중에 <삼국지>를 꼭 읽어보도록 해!"
"준호야, 나는 이번에 확신했다. 너는 정말 영리한 아이야. 수비하는 너의 모습을 보니 얼마나 똑똑한지. 상대방 공격수를 무력하게 만들더라."
"승만아, 민성아! 너희들은 역시 예상한 대로 잘하더라. 명불허전이야."
한 명 한 명의 플레이에 대해 나름 평을 해줬다. 뿌듯해하며 눈을 반짝이는 아이들이 얼마나 기특해 보이는지, 마음껏 뽐낼 수 있게 판을 깔아줬다.
다음날 또 내가 가르치는 OO반의 경기가 열렸다. 이 반은 최약체로 평가되는 반으로 적토마가 있던 반과 붙었을 때 십몇 대 영으로 진 반이다. 오늘도 이 반이 진다는 것은 당연한 거고 과연 몇 대 몇으로 질까가 관심사였다.
시작은 좋았다. 운 좋게 이 반이 선취점을 딴 것이다. 기쁨의 함성을 지르며 좋아하던 것도 잠시, 상대방이 연속해서 골을 넣기 시작했다. 이 반에서 가장 운동에 진심인 아성이는 골키퍼와 포지션을 바꿔 더 이상의 실점을 허용하지 않았다. 질게 뻔한 경기인데, 다현이와 경준이는 휘슬이 울릴 때까지 공을 쫓아 운동장 여기저기를 뛰어다녔다.
그렇게 패배가 분명한 경기임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하는 것을 보니 또다시 나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경기가 끝나고 다현이를 쫓아가 오늘 정말 멋졌다고 하이파이브를 청했다. 다음 수업 시간에 가서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너희들을 보고 선생님은 정말 감동 먹었다고, 폭풍 칭찬을 했다.
H 리그여 영원하라!
H 리그의 번외로 사제동행 축구 경기도 열린다. 한 학년이 한 팀이 되어 남교사 팀(남교사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라 교감 선생님도 함께 하신다. 아이들을 좋아하셔서 사람이 부족하지 않아도 함께 하실 거 같긴 하다)과 한 번씩 총 세 번의 경기가 열리는데, 이날의 함성은 하늘을 찌르고 누구는 교사팀을 누구는 학생팀을 열띠게 응원하느라 열기가 대단하다.
남자들만 하는 게 불만이었는지, 얼마 전부터 여학생들이 교무실로 쫓아와 사제동행 여교사 대 여학생도 경기를 하자고 조른다. 거사를 도모해 볼까. 배구 선수 출신인 나도 이 경기가 성사되어 불꽃슛을 뽐내고 청춘들 사이에 끼어서 반짝이고 싶다.
H 리그에 진심인 아이들은 크고 작은 부상을 당한다. 찰과상은 기본이고, 얼마 전에 영리한 수비수인 준호는 쇄골이 부러지는 큰 부상을 당했다. 영준이도 겨우 풀었던 다리 깁스를 부상을 당해 다시 하게 됐다. 그럼에도 이들은 방과 후에 집에 가지 않고, 축구를 한다.
교감 선생님이 "얘들아, 너희 집에 안 가냐?" 하며 창밖으로 소리를 지르시지만, 아이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푸른 잔디밭을 강아지처럼 뛰어다닌다. 심지어는 시험 기간에도 오전은 시험을 치르고 오후에 수십 명이 남아 한 게임을 하고 집에 간다.
어찌나 축구에 진정들인지. 시험 기간에도 축구하는 물색없는 아이들이지만, 축구에 미친 이 아이들은 학교에 오기를 좋아하는 거 같아 보인다. 훗날 어른이 되어 운동장을 누비던 자신들을 추억하며 소주 한 잔을 기울일 날이 눈에 선하다. 학교에 오는 발걸음이 H 리그 덕분에라도 가볍다면, H 리그여 영원하라!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에도 올릴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