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쉬고 싶을 때 또는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을 때 우리는 여행을 떠난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야 차고 넘치겠지만, 특히 쉬고 싶을 때 사람들이 찾아가는 곳은 대개 자연이 아름다운 곳이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자연의 아름다움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걸까?
볼 게 없을 거라 막연히 생각했던 겨울 숲에서 나뭇가지에 매달린 연둣빛 고치를 발견한 적이 있다. 유리산누에나방의 고치였다. 회갈색 겨울 숲에서 밝은 연둣빛 고치는 무척 아름다웠다. 그날 이후 겨울 숲에 갈 때면 연둣빛 고치를 찾곤 한다.
한번은 기생벌의 공격을 받아 무려 여섯 군데나 작은 구멍이 뚫려있는 고치를 발견한 적도 있다. 고치를 짓고 우화(번데기가 날개 있는 성충으로 되는 것)를 기다리던 번데기는 기생벌의 먹잇감이 되면서 꿈을 이루지 못했다. 유리산누에나방의 입장에선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런데 기생벌의 입장에선 고치가 다음 세대를 기약해주는 고마운 존재다. 만약 기생벌이 없다면, 그래서 고치마다 나방이 우화했다면, 나방이 낳은 알에서 애벌레가 부화하고 수많은 애벌레가 잎을 갉아 먹는다면, 숲은 어떻게 될까? 누구의 입장에 서느냐에 따라 해석은 갈리지만 그 모든 입장의 총합이 바로 자연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것, 좋고 나쁜 판단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질서, 그게 자연이다.
그러나 인간은 한 푼 대가도 치르지 않고 자원을 욕심껏 채굴한다. 인간의 편리를 위해서라면 그곳이 누구의 삶터인지 따위는 고려조차 하지 않고 언제든 밀어 버린다. 그리고 그 자리에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킬 인공구조물을 만든다. 그것이 어떻게 자연을 위협할지는 가늠조차 하지 않으면서도 위로가 필요할 때면 자연을 찾는다. 인간에게 자연이란 '아낌없이 주는 나무'인가?
호텔 성벽 너머 가려진 바다, 그 속은 폐허였다
"바다가 죽었어, 바다가." 폐허가 된 바닷속을 표현한 어느 해녀의 말이다. 바닷속에는 감태 같은 해조류가 숲을 이루고 그 숲에 기대어 해양생물이 살아간다. 그런데 해조류가 사라지고 석회조류가 하얗게 암반을 뒤덮을 때가 있다. 이를 갯녹음이라 한다. 숲이 녹아내린다는 뜻이다. 해수 온도 상승과 오염물질 유입, 해안에 들어선 건축물에서 유입되는 석회석 등을 갯녹음의 원인으로 꼽고 있다. 우리나라 동해, 남해 그리고 제주 연안에서 갯녹음이 진행 중이다.
해안가에는 초록의 공포가 엄습하고 있다. 해마다 벌어지는 연례행사다. 기온이 올라가는 봄부터 제주 바닷가의 조간대 지역(썰물에 물이 빠져 드러나는 경계 지역)에는 코를 찌르는 악취와 함께 바닷가를 뒤덮는 초록 풍경이 펼쳐진다. 초록의 정체는 구멍갈파래·괭생이모자반 같은 해조류다. 해안에 방파제 같은 시설물을 건설해서 해류의 흐름이 느려진 데다 주변 양식장에서 배출하는 영양염류가 풍부한 물, 거기다 수온 상승과 일조량 증가까지 더해지면서 기하급수적으로 해조류가 발생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결국 갯녹음 현상과 흡사한 원인은 모두 인간 활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6월에 강연 일정이 있어 제주에서 일주일을 지냈다. 첫 삼일은 서귀포시에서 지냈는데 화가 이중섭이 제주 시절 살던 동네에 숙소를 잡았다. 숙소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섶섬과 문섬이 보였다. 이중섭이 집 뒤 언덕(현재 이중섭미술관이 있는 곳)에 올라 그렸다는 '섶섬이 보이는 풍경'을 보면 황톳길과 나무 사이, 초가가 어우러진 풍경 너머로 푸른 바다가 보인다. 지금은 초가지붕과 황톳길과 나무가 있던 자리에 크고 높은 호텔들이 들어서 성벽처럼 바다를 가리고 있다.
근사한 도회지 풍경을 만들어주고 많은 관광객에게 편안한 잠자리를 제공하는 이런 건물들과 해안가에 건설된 콘크리트 구조물들은 단지 바다 풍경을 가리는 정도를 넘어서 바다 생태계를 교란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자연이 그리워 찾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자연은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는 아이러니라니.
자연을 망치기 위해 여행을 가는 건 아닐까
서귀포 일정을 마무리하고 제주시로 이동하는 날, 볕이 엄청나게 내리쬐는데 택시 안은 에어컨으로 한기가 느껴졌다. 에어컨을 꺼주십사 기사님에게 부탁하고 창을 내렸다. 서귀포에서 제주로 이어진 도로는 마침 한라산 기슭을 지나고 있었다.
한낮인데도 우거진 숲속은 약간 어둑했고 기분 좋게 서늘한 데다 숲의 향기까지 전해졌다. 문명의 이기가 발전할수록 인간이 자연에 기대 살아간다는 사실은 잊혀진다. 그런 편리함이 올려놓은 지구의 기온은 우리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자연을 빠르게 지워버리는 중이다.
여느 지역들처럼 제주도도 날마다 공사 중이다. 찾아오는 관광객이 늘어날수록 도로도 늘어날 테고, 해안을 따라 더 많은 호텔과 펜션이 지어질 테고, 해수 온도는 상승할 테고, 갯녹음은 가속도가 붙을 테다. 우리는 정말 자연을 보기 위해 여행을 가는 걸까? 자연을 망치기 위해 여행을 가는 걸까?
욕망의 크기와 온전한 자연은 반비례 관계라는 걸 알기에 나는 해마다 여행의 총량을 정한다. 온전한 여행도 아니고 강연 때문이긴 했지만, 나는 올해 제주를 두 번 다녀왔고 대략 1860km를 비행했다. 올해 가능한 비행기 여행을 다 써버렸다.
덧붙이는 글 | 글 최원형 환경생태작가. 이 글은 참여연대 소식지 <월간참여사회> 2023년 7-8월호에 실립니다. 참여연대 회원가입 02-723-4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