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는 살림을 함께 해보겠다고, 70대에 가까운 내가 연초부터 겁도 없이 설거지를 전담하겠다고 아내에게 선언하면서 어깨 너머로 배우게 된 것들이 한 둘이 아니다. 음식쓰레기 수거 및 처리에 이어 조리 보조 등, 부엌에서 지내는 시간이 이전보다 부쩍 늘어났다. 살림은 배울수록 끝이 없다지만 내 나름의 요령도 생기고, 나아가 욕심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컬러푸드' 레시피 실습에 도전하다
처음엔 채소나 감자 등 식재료를 아내가 씻거나 다듬을 때 단순히 돕는 역할이었으나, 이것들을 채 써는 단계로 발전했다. 이제는 오이나 양파 등 웬만한 채소는 다 내 손을 거쳐 반찬거리로 새롭게 탄생하고 있다. 내가 썬 어설픈 채소를 보며 스스로 웃기도 하지만, 하루하루 실력이 느는 것도 사실이다.
설거지에서 시작해 식재료까지 다루다 보니, 이제는 아내 도움 없이 내가 직접 밥을 짓고 찌개와 국도 만들어내고 싶은 욕구가 자연히 생겼다. 본격적으로 도전하기 위해 유튜버와 인플루언서들의 음식 레시피를 살펴보면서 보다 체계적인 실습 프로그램은 없을까 고민하던 와중이었다.
그러다 6월 초 서울시 평생교육시설인 '모두의학교'의 컬러푸드 레시피 실습과정을 발견하고는 여기에 등록했다. 빨강, 갈색, 초록 등 컬러푸드의 효능과 식재료를 활용한 레시피 실습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으로, 수강생들은 노후생활에 접어든 내 또래 70대 전후 고령자들이다.
프로그램에 참가한 사람은 총 20여명이었고, 남자는 나를 포함해 세 명, 나머지는 모두 여성들이었다. 노후생활대비 프로그램의 성격상 여성보다는 남성들이 더 많을 것으로 나는 예상했었는데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수업 또한 여성들이 좀 더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여성 수강생들은 강사가 하는 말을 쉽게 알아듣고 금방이라도 레시피대로 음식을 완성할 정도로 이해가 빠르고 능숙했다. 거기에 주눅 든 내가 여기서 제대로 버틸 수 있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교육에 빗대어 그들 실력이 대학생 수준이라면, 나는 초등학생 수준 정도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함께 과정에 참여한 여성들은 최소 20년, 최대 40년 이상 주방을 지킨 베테랑들이었다. 더 이상 배울 레시피가 없어 보이는 이들이 실습에도 적극적이어서 내가 좁은 '공유주방'에서 실습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소심한 탓에 이들을 제치고 내가 먼저 해보겠다고 나서지도 못했다.
내게 실습해 보라고 말하는 사람이 더러 있었지만 수업마다 나는 수강생들이 하는 실습을 곁에서 지켜볼 뿐이었다. 내심 섭섭했지만, 여성들이 집에서 남편들에게 일을 시키거나 함께 해본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또 나이든 남성들은 요리를 잘 안하다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와중에 내 속사정을 아는지 수강생 중 이아무개(여, 71)씨가 내게 먼저 말을 건넸다. 몇마디를 주고 받았다.
"우리는 집에서 자주 하니, 선생님께서 먼저 여기서 연습해 보세요."
"네, 감사합니다. 한번 해보겠습니다."
"제법입니다. 집에서 많이 해 보셨나요?"
"아닙니다. 배우려고 노력 중입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집에서 연마한 솜씨로 풋고추 두세 개를 열심히 다져 새우와 합쳤다. 표고버섯찜을 만들기 위한 사전작업이다. 얼떨결에 시작한 내 실습을 보고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별것 아닌 이 한 번의 실습으로 나는 뭐든 시키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색감을 살리면서 맛있게 볶기? 예전엔 이해 못했던 문장
실습은 자주 하지 못했지만, 이번 강좌를 통해 기본 식재료에 대한 안목을 배운 것은 나로서는 큰 소득이다. 예전에는 아내를 따라 마트에 가면 카트만 끄는 역할에 머물렀지만 이제는 어떤 채소가 싱싱하고 좋은 것인지 눈길이 간다. 채소를 고를 때 대화에 끼어들 수 있는 수준이 된 것이다.
채소를 꼭 칼로 다듬지 않고 손으로 찢는 경우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샐러드에 들어가는 양상추가 그렇다. 양상추는 칼로 자르면 영양도 떨어지고 모양도 자연스럽지 않다. 첨가하는 소스는 미리 섞지 말고 먹기 직전에 뿌려 먹는 게 좋다고 한다.
채소가 끓는 물에서 언제 익는지도 감을 잡았다. 샤브샤브처럼 살짝 데쳐 먹는 것이 있고 푹 익혀 먹는 것도 있다. 숙주는 불을 끈 상태에서 넣어야 식감이 살아나고, 표고버섯은 먼저 넣어 끓여야만 국물이 우려 난단다. 이처럼 인덕션을 활용할 줄 알면 더 맛있는 요리가 가능하다.
채소 볶는 요령도 유심히 살폈다. 그냥 먹어도 될 채소는 살짝 볶는 게 핵심이다. '채소의 색감을 살리면서 맛있게 볶는다'는 문장의 의미를 이제서야 제대로 이해했다. 아내가 지금껏 내게 채소를 볶는 것만은 안 시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불 세기가 그렇게 중요한 것을 이참에 배웠다.
한 달 동안 '색깔별 식재료'를 활용한 비빔밥, 곤드레밥, 소고기전골, 샐러드 등 여러 레시피를 배웠다. 식재료에서 표고버섯이 전골, 찜, 볶음 등에 다양하게 활용되는 것이 신기했다. 어제(27일) 배운 '새우버섯찜'은 감자전분을 바른 표고버섯에 새우살 다진 것을 넣어 찜한 것으로 향과 맛을 모두 잡은 레시피였다.
우리 집 샐러드는 내가 책임진다
특히 샐러드는 이번 프로그램에서 내가 확실히 '득템'한 레시피다. 다양한 채소와 소스를 활용해 풍미를 살린 샐러드는 건강에도 좋다. 눈으로 즐기는 원색 감상은 덤이다. 내 실력으로도 당장 만들어낼 수 있다. 예전에는 샐러드를 별로 먹지 않았는데 이제는 우리 집 매 밥상마다 올릴 작정이다.
강좌를 맡은 신정희(59) 강사는 "부담은 갖지 마시고, 계절별 채소를 챙겨서 간단히 샐러드 해 먹는 습관을 들이면 노년기 면역력 강화에 도움이 된다"라고 강조했다.
오는 7월 11일 종료 예정인 이 실습과정에는 향후 2번의 실습이 남아있다. 내가 왜 뒤늦게 이렇게 음식과 요리에 관심이 가는지를 가만히 생각해 봤다. 결국은 나를 위한 것이다. 가깝게는 아내를 돕는 것이겠지만, 이건 우리 둘의 노후를 준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음식 만들기를 단시일 내에 배우기란 어렵다. 그러나 이번 과정을 거치면서 이제부터 차근차근해도 늦지 않았다는 걸 깨우쳤다. 이걸 아내는 가족을 위해 평생 해왔다는 사실도 말이다.
덧붙이는 글 | 개인 계정의 <브런치스토리>에도 게재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