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조선의 운명을 가름하는 갑신정변(1884) 140여 년이 되는 시점에서 그 주역 김옥균(1851~1894)을 소환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에는 역사적 의미와 함께 현실적 의미가 부여된다.
언제부터인지, 한국(조선)·중국·일본을 '동양3국'이라 불렀다. 19세기 후반~20세기 초에 3국 중 조선은 온식민지, 중국은 반식민지, 일본은 제국주의국가가 되었다. 그리된 배경은 무엇일까. 전통적으로 중국은 동양의 최강자이고 조선은 그 다음, 일본은 문화수준이나 국력에 있어서 최저급이었다. 그럼에도 짧은 기간에 위상이 뒤바뀐 이유는?
여러가지 이유와 배경 즉 복합성이 작용하지만, 여기서는 지도층의 자질과 시대인식, 위기 대처 방식을 중심으로 살피고자 한다.
중국(청국)에서는 1860년부터 증국번(曾国藩)·이홍장(李鴻章) 등이 서양 근대의 기계문명을 도입하여 자강을 이루려는 양무운동(洋務運動)이 전개되었다. 아편전쟁과 영·불연합군의 활약에서 서양무기의 우수성을 지켜본 그들은 열강의 침략과 국내의 농민반란(태평천국난)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서양근대의 무기를 들여와야 한다고 내세웠다. 증국번의 사망 후 이홍장에 의해 주도된 이 운동은 무기제조 뿐만 아니라 제지공장·윤선국·신식군인학교·서양서적 번역국·외국어학습을 위한 학당 등을 서둘러 설치했다.
이를 양무운동이라 부른 것은 양무(洋務, 서양인에 관한 사무)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는 중체서용(中體西用) 곧 중국 전통의 문화와 제도를 본체로 하고, 서양의 기계문명을 부대적으로 이용한다는 사상에 근거를 두었다. 이것은 조선의 유생들에도 전해졌다. 하지만 정치·경제제도 등에 손을 대지 않고 체제개혁없이, 수용한 이같은 조치는 열강의 침략에 대한 저항으로서는 거의 효과가 없었다.
서구 열강은 중국 내륙 깊숙이 들어가 상품을 팔고 원료를 사들이게 되면서 중국은 서양의 완전한 식민지는 아니지만 주권을 빼앗기는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하였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을 단행했다. 일황중심의 중앙집권체제로 근대적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구성한 데 이어 3권분립, 민권보호, 국민개병제, 초등교육 의무제, 부국강병책의 근대국가로 발돋움하였다.
이 시기 조선의 정황과 세계사의 주요 사건을 살펴본다.
1863년 1월 미국 링컨 대통령 노예해방, 12월 고종 즉위
1864년 3월 동학교조 최제우 사형
1865년 4월 경복궁 중건, 만동묘 철폐
1866년 1월 병인박해, 9월 병인양요
1868년 1월 일본 메이지유신
1869년 10월 스웨즈운하 개통
1871년 3월 파리코뮨, 4월 신미양요, 11월 최익현 대원군 탄핵상소
1874년 2월 고종, 만동묘 다시 세울 것 허락
1875년 4월 운요호 사건
1876년 2월 강화도조약, 3월 미국의 벨 전화기 발명
1882년 4월 조미통상조약, 6월 임오군란, 7월 제물포조약
1884년 1월 갑신정변
세계사적인 대격변기였다. 국제사회는 과학기술과 인권보호의 흐름이 이어졌다. 그 시기 조선은 여전히 낡은 주자학 체제에 붙박혀 외래사조를 탄압하고 쇄국정책의 동굴에 갇혀 있었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영민한 군주가 없었던 것도 비극의 단초가 되었다.
조선왕조 500년사에서 아까운 인물들이 있었다. 그들이 제대로 뜻을 폈다면 우리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터, 불행하게도 이들 모두 개혁(변혁)을 주도하다 비명에 갔다.
정도전은 56세에 암살, 조광조는 37세에 사약, 정여립은 45세에 사약, 허균은 49세에 능지처참, 최제우는 40세에 참수, 김옥균은 44세에 암살, 전봉준은 40세에 교수형. 하나같이 국정개혁, 새로운 이상사회의 건설을 위해 나섰다가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비명횡사한 것이다.
조선시대 개혁의 진취적 인물에 속한 이들은 개인적 안일을 거부하고 사회와 나라의 변혁을 꿈꾸며 치열하게 살다가 훈구세력, 수구파에 밀려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들은 암살·사약·능지처참·교수형 등으로 처단되었다. 따라서 나라는 개혁의 기회를 놓치고 긴 침체의 늪에 빠져들었다. 결국 망국에 이르고 오늘의 분단상태는 그 상처로 남아있다.
여기서 우리가 소환하는 김옥균은 중국의 양무운동과 일본의 메이지유신과 비슷한 시기에 국가개혁(갑신정변)을 시도하다가 수구세력과 외세에 밀려 패퇴, 일본으로 망명하여 재기를 꿈꾸며 청국 이홍장과 담판하고자 상하이에 갔다가 정부가 보낸 밀사에게 암살당했다. 그의 암살에는 고종 정부, 일본과 청국의 '미필적 고의'가 작동되었다.
"그 시기 조선은 청국과 일본이라는 두 제국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한 쪽은 저물어가는 제국이었고, 다른 한 쪽은 이제 막 떠오르는 제국이었다." (주석 1)
또 김옥균이 암살된 1894년은 1월 갑오동학농민혁명(2월 김옥균 암살), 6월에 일본군 경복궁 침입과 청일전쟁이 수원부근 청도에서 발발하고, 갑오개혁이 시작되었다. 그의 삶과 죽음(죽임)은 동양 3국의 정세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김옥균, 그는 혁명가인가 풍운아인가, 영웅인가 권력을 탐하는 소인배인가.
현 시점에 그를 소환한 것은, 모름지기 지도자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시대정신과 국제정세를 통찰하면서 (특히 한국과 같은 지정학과 국제역학 구조가 복잡하게 얽힌 나라에서) 국민의 뜻을 모아 지혜롭게 대처해야 한다는 교훈을 일깨우고자 함이다.
김옥균과 그의 동지들이 갑신정변에서 실패한 것은 자신들의 비참을 넘어 조선사회에 엄청난 퇴행과 낙후를 안겼다. 실패한 개혁·변혁은 역사의 진전을 가로막고 오히려 반동으로 치닫는 경우가 너무 많다. 더욱이 내부의 역량 없이 외세에 기대는 변혁은 국가운명에 돌이킬 수 없는 치명타가 되고 만다.
지금 한국(한반도)의 상황은 150년 전 갑신정변기와는 많이 다르다.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의 당당한 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초강대 미·중의 패권다툼에 잘못 끼어들거나 서툴게 대처하다가는 일순에 나락에 빠지게 되는 것은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외교에 무지한 지도자의 경우라면 사태는 더욱 암담하다.
갑신정변을 '실패한 정변'으로 부정일변도의 평가는 역사인식의 무지에 속한다. 중국의 양무운동, 일본의 메이지유신과 함께, 그리고 동학혁명과 갑오개혁으로 이어진 동력이 되었다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비상한 재주를 갖고
비상한 시국을 만나
비상한 공도 없이
비상한 죽음만 있었다.
박영효가 일본에 있는 김옥균 묘비문에서 절묘하게 요약한 것처럼, 격동기 변혁을 주도했던 선각자 김옥균을 찾아간다.
주석
1> 앙드레 슈미드 지음, 정어울 옮김, <제국 사이의 한국>, 옮긴이 서문, 휴머니스트, 2007.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혁명가인가 풍운아인가, 김옥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