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지 사람들에게 제주는 버려진 땅이었고 죄수를 보내는 유배지였다. 지금은 이익을 노려 자본이 몰려들지만 진정으로 제주를 위하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나 또한 제주 사람 눈에는 그렇게 비칠 수 있으리라. 그런 제주인의 한과 정서를 이해하려다 제주학에 빠졌고 도민이 됐다. 키아오라리조트를 운영하면서 제주가 진정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의 중심이 되게 하겠다는 각오로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한미리스쿨)을 설립했다. 제주는 오름의 섬인데 키아오라 바로 뒷산이 대수산봉이고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었기에 '수산봉수'라는 팻말을 발견하고 반가웠다. '수산봉수의 제주살이'는 제주학을 배경으로 내 일상에 사회적 발언을 실어 보내는 글이다.[편집자말] |
'줄서기'에 '도둑질'까지… 흉흉한 '소금 민심'
일본 후쿠시마 원전 핵오염수 방류를 앞두고 '소금대란'이 일어난 건 다 알지만, 눈길 끈 뉴스들이 대개 제주발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챈 이는 드물 터이다.
6월 19일 하나로마트 제주시농협본점이 천일염 20kg들이 280포를 선착순으로 판매한다고 안내문자를 보내자 새벽 5시 이전부터 인파가 몰려 장사진을 이룬 장면이 보도됐다. 한 포씩 팔았는데도 200여 명은 빈손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6월 23일에는 60대 부부가 서귀포시 한 폐축사에 보관 중이던 소금 700포를 사흘에 걸쳐 화물차 4대를 이용해 훔친 혐의로 체포됐다는 뉴스가 보도됐다. 이들 부부는 피해자와 아는 사이였는데도 소금을 훔쳐 이미 100여 포는 지인들에게 나눠주거나 팔았다. 도둑, 거지, 대문이 없어 '삼무(三無)의 고장'이라 불린 제주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까?
"겉절이도 못 담그게 생겼어요"
첫째는 천일염 품귀 현상이 특히 제주에서 극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6월 30일 성산읍 365식자재마트와 하나로마트 등을 둘러본 결과, 천일염은 판매대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성산읍에서 식당을 운영한다는 60대 여성은 천일염 대신 조그만 맛소금 몇 봉지를 사면서 일본의 핵오염수 방류를 걱정했다.
"이런 날벼락이 없습니다. 금은 돈 주면 살 수 있지만 천일염 소금은 돈 주고도 못 사니… 이러다가 김장은커녕 겉절이도 못 담그게 생겼어요."
제주는 갈치소금구이 같은 수산물 요리와 젓갈·고등어자반 등 수산물 가공에 이르기까지 소금 소비가 특히 많은 곳이다. 제주 해안가에 줄줄이 들어 서 있는 양식장도 엄청난 바닷물을 끌어다 써야 한다. 제주의 대부분 산업은 바다와 연관된 것이어서 바다의 청정 이미지가 훼손되면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반면 제주는 갯벌이 형성되지 않아 갯벌 천일염은 생산하지 못한다. 육지에서 들여오더라도 무게가 많이 나가 만만치 않은 수송 비용이 추가된다.
제주에 온 벼슬아치들의 소금 걱정
제주에서 소금의 중요성에 관한 인식이 얼마나 뿌리깊은지를 육지 사람은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기묘사화로 제주에 유배됐다가 사약을 받은 김정은 <제주풍토록>에서 '서해처럼 전염(밭소금)을 만들자고 해도 만들 땅이 없다'고 썼고, 1601년 반란음모사건을 위무하러 제주에 온 안무어사 김상헌은 <남사록>에 제주에서 생산되는 소금은 관가에 공급되지만 민간에서는 쓸 수 없다고 기록했다. 제주목사 이원진도 <탐라지>에 소금이 귀한 이유를 밝혔다.
'해안가는 모두 암초와 여로 소금밭을 만들 만한 해변의 땅이 매우 적다. 또한 무쇠가 나지 않아서 가마솥을 가지고 있는 자가 적어 소금이 매우 귀하다.'
암반 위에서 '돌소금' 만들어야 했던 절박함
그러나 궁하면 통하는 법. 명종 때 대정현감, 선조 때 제주목사가 된 강려(姜侶)는 해안가 평평한 암반 위에 둑을 쌓아 돌소금을 만들게 했다.
그 현장을 복원해 놓은 곳이 '소금빌레'로 불리는 '구엄리 돌염전'이다. '빌레'는 '박힌 돌 또는 '너럭바위'를 뜻하는 제주어다. 내 단골식당 이름이 '빌레와 너드랑'인데, '너드랑'은 '널브러진 돌'을 뜻하는 경상도어다. '박힌 돌' 제주 여자와 '굴러온 돌' 통영 남자가 만나 백년해로하고 있어 식당 이름을 그렇게 지었단다.
큰딸에게만 상속했던 '돌염전'
돌소금은 너럭바위 위에 찰흙으로 둑을 쌓고 허벅으로 지어올린 바닷물을 햇볕에 졸이는 방식으로 만든다. 햇볕이 좋으면 7일 정도 소요되는데 구엄리 소금밭은 300m 해안을 따라 1,500평이나 조성돼 한창 때는 1년에 2만8800근(17톤)을 생산했다. 한 집에 20~30평씩 소금밭을 소유해 상속도 가능했는데, 주로 여성들이 관리했기에 큰딸에게만 상속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잘못 기록된 돌염전 안내판
돌염전 안내판에는 '1559년 강려 목사가 부임하면서 구엄리 주민들에게 바닷물로 소금을 암반에서 제조하는 방법을 가르쳤다'고 써 놨는데 이것은 잘못된 기록으로 보인다. <선조실록> 등에 따르면 그의 제주목사 재임기간은 1573년 6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다.
청음 김상헌은 <남사록>에 돌염전의 유래를 '지방민에게 물어보니 무오년에 강려가 목사로 된 때부터'라고 썼다. 무오년은 1558년이니 1559년은 강려가 대정현감으로 재직한 때다.
모래 위에서도 소금을 만드는 기술
제주도 동쪽 '땅꼬리'를 뜻하는 지미(地尾)봉 아래 종달리에는 '모래염전'이 있었다. 모래염전 작업은, 갯벌처럼 물이 새지 않게 바닥을 다질 수 없기 때문에 모래 위에 바닷물을 뿌리고 햇볕에 말리는 일을 반복해 '소금모래'를 만드는 일로 시작된다. 이것을 염전 구석에 마련된 '서슬'에 넣고 '소금모래'로부터 함수(간물)를 분리해낸 뒤 긴 솥에 넣고 가열하면 '구운 소금'이 된다.
1702년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형상은 <남환박물>에 철 4000근으로 가마솥 3개를 제작해주고 소금을 생산하게 했다고 썼다.
제주 모래염전에서 '구운 소금'은 고급 상품으로 여겨져 육지로도 많이 팔려 나갔다.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종달리 353가구 가운데 160명이 소금 생산에 종사했는데 이들은 '소금바치' 또는 '소금쟁이'로 불렸다. 1950년대까지도 소금바치들이 있었으나 인건비가 많이 들고, 서해안 천일염에 견줘 생산성이 뒤져 모두 사라져버렀다.
1969년에는 간척사업이 완료돼 지금 모래염전은 종달리 소금밭 체험시설로만 남아있다. 종달리에는 간척사업을 준공한 구자춘 도지사의 공덕비가 서 있는데, 모랫벌이나 갯벌의 가치가 나날이 높아가는 상황에서 그의 공덕을 기릴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체험시설을 관리하는 김성란 해설사는 체험시설 밖으로 안내하며 "한때 이곳 10여만 평이 모두 모래염전이었는데 지금은 밭으로 변하고 펜션이나 카페 같은 것이 들어서서 소금값이 아무리 올라도 염전을 복구할 수 없다"고 아쉬워했다.
가볍게 여겨선 안 되는 '소금 민심'
소금은 원래 외국에서도 '고귀한 몸'이었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Salzburg)는 독일어로 '소금'(Salz)의 '성'(burg)이란 뜻이다. 근처 암염광산에서 나는 소금을 보관했다. 과거에는 소금을 지배하는 이가 권력자이면서 소금을 안정되게 공급할 책임도 졌다.
제주의 목민관들이 그토록 소금 생산에 신경을 썼던 이유도 소금 행정이야말로 민심을 사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소금을 둘러싼 제주 민심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는 이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언론 <민들레>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