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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지방법원
광주지방법원 ⓒ 안현주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절차를 법원 공탁으로 마무리하고자 했던 정부의 방침에 제동이 걸렸다. 4일 광주지법이 강제 동원 피해자 중 1명인 양금덕 할머니의 공탁 사건에 대해 불수리 결정(받아주지 않는 결정)을 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정부(외교부)는 법원을 향해 "유례없는 일", "법리상 승복하기 어렵다"며 강한 유감을 표명하는 등 반발했다.

외교부 대변인실도 "공탁 공무원(정확한 명칭은 '공탁관')이 '제3자 변제에 대한 법리'를 제시하며 불수리 결정을 한 것은 공탁 공무원의 권한 범위를 벗어난 것이자 헌법상 보장된 '법관으로부터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며 즉각 불복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정부는 "면밀한 법적 검토를 거쳤다"고 하는데, 법원은 왜 공탁을 받아주지 않았을까. 공탁관의 불수리 결정은 과연 부당한 것일까.

공탁은 법에 정하는 사유 있어야 가능

우선, 공탁이 무엇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공탁이란 금전, 유가증권 등 공탁물을 법원에 맡기게 하고 채권자 등이 공탁물을 찾아감으로써 법률 문제를 해결하는 제도다. 공탁물을 맡기는 사람을 '공탁자', 공탁물을 찾아갈 권리가 있는 사람을 '피공탁자'라고 한다. 공탁 사건의 절대 다수는 금전, 즉 돈을 맡기는 공탁이다. 우리나라 1년 공탁 금액은 10조 원이 넘는다.

공탁은 공탁자가 피공탁자와 대면하기 싫다거나 시간이 없다는 식의 단순한 편의를 위해서 할 수는 없다. 법령에 근거가 있어야 한다. 민법에 나오는 대표적 공탁 사유는 채권자가 돈을 받지 않거나(수령 거절), 연락이 두절된 경우(수령 불능) 등이 있다. 이런 공탁을 변제 공탁이라고 한다. 변제공탁을 하는 순간 변제(돈을 갚는 것)와 동일한 효과가 발생하고 공탁자는 이자 지급 의무도 사라진다. 대신 채권자(피공탁자)는 공탁물을 찾아갈 수 있는 권리가 생긴다.

법원은 왜 정부의 공탁을 불수리했나

얼핏 보면, 강제동원 손해배상 사건도 판결금을 수령하지 않고 있는 피해자들을 피공탁자로 지정해 변제 공탁을 하는 것이 가능해 보인다. 그런데 걸림돌이 하나 있다. 해결사를 자처한 한국 정부가 사건의 당사자(채무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정부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판결 확정 후 해결책으로 '제3자 변제'라는 방식을 시도해 왔다. 즉, 소송에서 피고였던 미쓰비시중공업 대신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하 지원재단)을 통해 기금을 조성하여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절차를 마무리하겠다는 것이다.
  
 정부가 강제징용 피해자 측에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을 통한 제3자 변제 방식으로 지급할 판결금을 법원에 공탁하겠다고 밝히면서 법적 효력과 현재 진행중인 재판에 대한 영향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사진은 서울 종로구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2023.7.4
정부가 강제징용 피해자 측에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을 통한 제3자 변제 방식으로 지급할 판결금을 법원에 공탁하겠다고 밝히면서 법적 효력과 현재 진행중인 재판에 대한 영향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사진은 서울 종로구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2023.7.4 ⓒ 연합뉴스
 
이에 대해 일부 피해자는 거부 의사를 밝혔고 정부가 '제3자 변제'를 강행할 경우 소송도 불사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정부가 공탁을 하기 전부터 제3자 변제가 가능한지를 두고 법률 전문가들도 다양한 견해를 밝힐 정도로 정부의 방침은 논란과 분쟁이 예고되었다. 제3자 변제는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았던 것이다.

일반론으로 접근해보자. 예컨대 채무자 A가 채권자 B를 위해서 변제하거나, (변제가 불가능한 사유가 있을 경우) 공탁하는 것은 특별한 제한이 없다. 그런데 A가 아닌 C가, B를 위해서 변제 또는 공탁할 수 있을까. 답을 먼저 얘기하자면, 원칙은 가능, 예외적으로 불가능이다.

정부의 '제3자 변제' 방식, 논란과 분쟁 예고

민법(제469조)을 보면 채무의 변제는 채무자뿐 아니라 제3자도 할 수 있다. 그러나 ① 채무의 성질 또는 당사자의 의사 표시로 제3자의 변제를 허용하지 않을 수 있고 ② 이해관계 없는 제3자는 채무자의 의사에 반하여 변제할 수 없다.

쉽게 얘기하면, 원칙적으로 제3자라도 채무 변제(또는 공탁)는 할 수 있다. 다만 계약이나 의사표시 등으로 불허할 수 있고, '이해관계'가 없는 제3자는 채무자가 반대한다면 변제할 수 없다.

여기서 '이해관계'란 법률상 이해관계만을 뜻한다고 대법원은 좁게 해석한다. 다소 어려운 표현이 있지만 대법원 판례를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변제를 하지 않으면 채권자로부터 집행을 받게 되거나 또는 채무자에 대한 자기의 권리를 잃게 되는 지위에 있기 때문에 변제함으로써 당연히 대위의 보호를 받아야 할 법률상 이익을 가지는 자를 말하고, 단지 사실상의 이해관계를 가진 자는 제외된다.

이 기준에 따르면 대한민국 정부는 이해관계가 있는 것일까.

언론 보도와 대법원·정부의 발표 자료 등을 종합해 보자. 사실관계는 다음과 같다. 지난 3월, 한국 정부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 손해배상 문제를 지원재단을 통해 '제3자 변제' 방식으로 해결하겠다고 밝혔다. 그 후 피해자 15명 중 11명이 정부의 방식에 따라 판결금을 수령하였고 나머지 피해자들은 거부 의사를 밝혔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가 2022년 9월 1일 광주광역시 자택에서 박진 외교부 장관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할머니는 편지에서 "나는 일본에서 사죄 받기 전에는 죽어도 죽지 못하겠습니다. 대법원에서 승소했다는 소리를 듣고 너무도 기뻤습니다. 그런데도 몇 년째입니까? 우리 정부 무슨 말 한마디 못하고 있지요. 왜, 무엇이 무서워서 말 한 자리 못합니까? 미쓰비시가 사죄하고 돈도 내놓으세요. 다른 사람이 대신 주면 나는 무엇이 될까요? 일본에서는 양금덕을 얼마나 무시할까요? 만약에 다른 사람들이 준다면 절대로 받지 못하겠습니다. 우리나라 대통령에게 양금덕 말을 꼭 부탁, 부탁한다고 부탁합니다"라고 썼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가 2022년 9월 1일 광주광역시 자택에서 박진 외교부 장관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할머니는 편지에서 "나는 일본에서 사죄 받기 전에는 죽어도 죽지 못하겠습니다. 대법원에서 승소했다는 소리를 듣고 너무도 기뻤습니다. 그런데도 몇 년째입니까? 우리 정부 무슨 말 한마디 못하고 있지요. 왜, 무엇이 무서워서 말 한 자리 못합니까? 미쓰비시가 사죄하고 돈도 내놓으세요. 다른 사람이 대신 주면 나는 무엇이 될까요? 일본에서는 양금덕을 얼마나 무시할까요? 만약에 다른 사람들이 준다면 절대로 받지 못하겠습니다. 우리나라 대통령에게 양금덕 말을 꼭 부탁, 부탁한다고 부탁합니다"라고 썼다. ⓒ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그러자 정부는 나머지 4명이 받아야 할 판결금과 지연손해금 등을 변제 공탁하고자 했다. 그런데 광주지법은 그 중 '(일본 기업이 아닌) 제3자의 변제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의사 표시를 한 양금덕 할머니의 사건을 공탁요건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수리 결정했다(그 이외 일부 사건도 공탁관이 서류 보정을 권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정부가 이의신청을 하겠다고 밝혔으므로 이제 공은 다시 법원으로 넘어갔다. 공탁관의 처분에 이의가 있으면 재판(판사의 판단)을 받도록 되어 있다. 재판에서도 제3자의 변제가 적법한지가 최대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공개적으로 사법부에 "유감 표명" 적절했나

여기서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정부의 주장대로 공탁관의 처분에 승복하기 어렵다면 재판 과정을 통해서 공탁 불수리가 적정했는지 다시 따지면 될 일이다. 그런데도 재판 절차 외에 공개적으로 사법부를 향해 유감을 표하는 것은 성급한 행동으로 보인다.

정부는 "법관으로부터 재판받을 권리 침해", "유례없는 일"이라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공탁관이 요건에 맞지 않은 공탁 사건을 불수리 결정하는 것은 결코 유례없는 일이 아니다. 아니, 자주 발생한다. 외교부의 발표 자료를 보면 공탁관이 "기계적 처리, 형식적인 처리"만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언급하고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 공탁관은 자기 책임하에 독립적인 판단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가 제3자 변제를 거부하는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및 유족을 상대로 공탁 절차를 개시한 가운데, 4일 오후 외교부 앞에서 ‘대일굴욕외교, 역사정의-피해자 인권 짓밟은 윤석열 정부 규탄 - 공탁 철회 긴급기자회견’이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주최로 열렸다.
윤석열 정부가 제3자 변제를 거부하는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및 유족을 상대로 공탁 절차를 개시한 가운데, 4일 오후 외교부 앞에서 ‘대일굴욕외교, 역사정의-피해자 인권 짓밟은 윤석열 정부 규탄 - 공탁 철회 긴급기자회견’이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주최로 열렸다. ⓒ 권우성
 
공탁관은 단독으로 공탁 사무를 처리하는 국가기관이다. 공탁관은 법원장이 법원사무관, 서기관 중에서 지정한다. 현재 전국 법원에서 일하는 공탁관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법원 근무 경력 20년이 넘는 베테랑 직원이 맡고 있다. 공탁관은 민사, 형사, 가사, 강제집행 등 법원 업무 전반을 파악하고 있어야 일을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탁관은 사건을 심사할 때 ▲정당한 근거 법령이 존재하는지 ▲법에서 정한 공탁 사유가 존재하는지 ▲정당한 당사자에 의한 공탁인지 ▲관할이 있는지 등을 중점 심사하도록 되어 있다. 심사의 방법은 공탁서와 첨부 서류에 의하되, 심사의 범위에 대해서는 절차 법적 요건은 물론 실체법적 요건도 함께 심사해야 한다는 것이 판례의 입장이다.

법원이 행정부 견제 못 하면 피해는 국민에게

이번 사안도 다르지 않으리라. 그런데 결론의 당부를 떠나 정부가 법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미리 법원을 향해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하는 것이 과연 적절했을까. 유난히 법치주의를 강조하는 현 정부의 태도를 감안할 때 분명 아쉬운 점이 있다. 혹시라도 사법부가 정부의 시책에 적극 협조하는 기관이라는 인식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심은 기우이기를 바란다.

최근, 대법원장의 대법관 임명제청권이 침해당했다는 우려가 제기된 적이 있다. 대법원장이 새로운 대법관 후보를 제청하기도 전에 대통령실이 특정 인사에 대해 임명 보류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하는 뉴스들이 나오면서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대통령실이 배제 대상으로 지목한 이들은 새 대법관 후보자에서 모두 배제됐다. 정부가 바뀌었다고 해서 법원의 역할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사법부가 인권의 보루로서 역할을 못 하고 나아가 행정부를 제대로 견제하지 못 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공탁#강제동원#제3자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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