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현지에서 75세 사부에게 정원사 일을 배우는 65세 한국 제자의 이야기.[기자말] |
3차 입국신고를 하려고 사부께 전화를 걸었다. 안 받는다. 일하고 계신가 했더니 바로 전화가 왔다(발신음을 몇 번 더 기다려 볼 걸). 반가워 하신다. 흠흠흠. 내 이럴 줄 알고 있었다. 이 훈훈한 분위기. 이미 예상하고 있던 바다. 한국에서 스마트폰 어플로 미리 아부를 떨어 놨으니까.
라인으로 문자를 보냈었다. 덕분에 잘 도착했다고. 지금쯤 백내장 수술이 무사히 끝나서 이 문자가 전보다 더 명확하게 보이실 거라고. 하루 빨리 사부에게 재미있는 정원 일을 많이 배우고 싶다고. 기승전결로 단순 명료하게 밑밥을 깔아 놨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지만 '유 사마'로 시작되는 답장도 왔었다. 나도 그대와 함께 일할 날을 기다리고 있노라고. 유 사마라니? 사부가 제자에게 왠 극존칭을? 이곳 어법으로는 상대방 성명 뒤에 '상'을 붙이는 게 통상적이다. 그러니까 '유 상' 정도면 지극히 일반적인 호칭이 되는 거다.
우리처럼 사제 관계는 더 아랫 단계의 호칭도 가능하다. 그런데도 '사마'라는 극존칭이 써 있어서 의아했었다. 뒤에 알게 된 사실인데 병원에서 간호사에게 부탁해 간단하게 답장을 썼단다. 간호사의 어법과 사부의 내용이 뒤죽박죽 돼서 극존칭 '유 사마' 답장이 날라왔던 거다.
사부와의 전화 끝에 저녁 약속을 잡았지만 나는 그보다 사부 정원이 더 보고 싶었다. 내가 손질해 놓은 나무들이 얼마나 변했는지 어떻게 달라졌는지 궁금했다. 지금 뵈러 가겠노라 하고 바로 자전거로 달려갔다.
달라진 사부의 정원
입구의 철쭉부터 보였다. 지난번에 첫 작품으로 가지런하게 다음어 놓은 두부깎기(라고 했지만 가리코미라는 정식 명칭이 있다)가 그동안 새순이 돋아나 제법 정원의 일부로서 꼴을 갖추고 있었다. 짙은 초록색 묵은 잎 위에 돋아난 연초록 새순이 단정하게 정리되어 그라데이션이 돋보였다.
정원 안에서 철쭉이 담당하고 있는 디자인 라인이 제대로 살아난 것 같았다. 메인 트리가 빛나려면 조연의 도움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철쭉 없는 메인트리는 없는 거다. 각각 맡은 자리에서 약방의 감초같은 역할이 필요한 거다.
적송은 정문에서 현관에 이르는 어프로치의 중간 쯤 서 있다. 사부는 어프로치를 곡선길로 처리했다. 정문에서 현관이 직접 보이지 않게 감췄다. 곡선은 중간에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 내면서 좁은 통로를 넓게 보이게 하는 기술이다.
사부와 정성을 다해 손질한 적송 가지가 부지런히 새 눈을 내밀고 있었다. 발그스레한 피부에 여리디 여린 연초록 새 눈을 밀어올리는 품새가 영낙없이 성장한 여인이다. 여인송이라는 별명이 있는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다. 사부정원의 메인트리가 단풍에서 적송으로 옮겨온 느낌이랄까. 첫날 사부가 말했었다.
다들 적송을 메인트리로 심지. 비싸고 귀한 나무거든. 나는 일부러 비켜 세웠어. 대신 남들이 보조수로 심는 단풍을 메인트리로 세웠지. 나한테는 귀한 나무거든. 적송은 입구에서 모습을 비치고 나면 역할이 끝이야. 응접실에서 정면으로 돋보이는 건 단풍이거든.
메인트리 단풍은 그사이 녹음 속에 묻혀 버렸다. 핑크에서 연초록으로 변화를 거듭하며 정원의 주역으로 빛나던 봄날이 가버린 거다. 이제 손질을 끝낸 적송이 슬그머니 돋보이기 시작하는 여름이 시작됐다.
그녀도 시간이 흐르면 어김없이 풍경속으로 녹아들겠지. 가을이 되면 붉디 붉은 단풍이 왕좌자리를 되찾게 되는 것처럼. 작은 사부정원 안에서도 서로 경쟁하며 아우르는 나무들로 계절의 변화를 흠씬 누린다. 풍부한 계절감은 일본정원의 큰 특징이기도 하다.
사부가 수술 마무리 때문에 오늘도 병원에 다녀오셨다며 쌓인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굉장히 무섭더라. 다른 곳도 아니고 눈이잖아. 일은 할 만큼 해봤으니 괜찮은데 재미있는 골프를 못하게 되면 안 되잖아. 손을 너무 꽉 쥐고 있어서 손바닥에 땀이 났었어. 수술 시간 이십 분이 두 시간 같더라.
나는 대개 듣는 역할이다. 짬밥에 밀려 여기서만 그러는 게 아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듣는 걸 좋아한다. 밑밥 때문에 한층 돈독해진 한일 사제는 그동안 쌓인 이야기를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어려워서 말도 못 부칠 때에 비하면 이제는 관계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느낌이다.
저녁 약속은 하루미씨네 식당이다. 하루미씨가 나를 소개해줬으니, 소개해 준 사람에게 우리가 괜찮게 지내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모양이다. 밥값은 늘 사부가 지불하니 장소 선택도 사부 권한이다. 내게 메뉴를 묻긴 하지만 나는 대개 사부와 같은 걸 주문하는 편이다. 이곳 음식을 잘 모르거니와 그게 상대방을 더 편하게 해주는 것 같아서다.
사부는 건너편 테이블에 앉아 있는 하루미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하루미씨의 이웃 친구 히라야마씨도 함께 앉아 있다. 내게 우호적인 응원 그룹이다. 그들이 함께 내 정원 수업 이야기를 나누며 흐믓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훈훈한 풍경이다.
저녁상이 차려지고 하루미씨가 술은 어떻게 하겠느냐고... 사부는 술을 안 하신다. 마실 줄 알면 한 잔 하라고 내게 권 했지만 일단 사양했다. 내일부터 일을 해야 하니 마시지 않겠노라 너스레를 떨었다. 너는 운전을 안 하니 괜찮다며 재차 권할 때 마지 못 하는 척 맥주를 시켰다. 사부께서 허락하셨으니라며. 용의주도하게.
사실 전작이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먼저 혼자서 맥주 한 캔을 땄었다. 하고 싶은 일 찾아서 할 수 있는 지금 상황을 자축하며. 3차 연수도 열심히 해 나갈 각오를 스스로 다지며.
흉금을 털어놓는 자리
나는 원래 술을 싫어한다. 싫어하니 못 마시고 못 마시니 약하다. 독한 술은 더 쥐약이다. 맥주 한두 잔이면 오케이 땡큐다. 술꾼들은 그게 술이냐고 웃겠지만 그것도 술이다.
오래 전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는 걸로 시작해 종당에는 술이 술을 마시는, 막판에 다함께 천진무구한 개가 돼야 끝나는 전통적 음주절차도 많이 경험했다. 당시 개 사건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옛날에는 다들 맺힌 게 많았는지 목숨을 걸고 술을 마셨다. 해장술로 쓰린 속을 달래며 내가 다시는 그렇게 술을 마시나 봐라. 또 그렇게 마시면 성을 간다라면서 상황을 수습하러 다니다가 결국 다시 만나 한 잔 하게 되는...
술자리란 흉금을 털어놓는 자리다. 사람들은 속엣말을 듣고 싶어 술을 권하고 마신다. 두어잔 마시고 나니 자리가 편해졌다. 처음에는 사부가 말도 없고 해서 무서웠다고 했더니, 사부라는 자리가 그런 거니 신경쓰지 말란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란다. 좋은 사람이란다. 이제는 괜찮다고 했다. 현장 작업 때부터 이미 사부가 나를 믿는구나 느꼈다고.
내일부터 다시 오전 6시 출근이 시작된다. 1차 연수로 시동을 걸고 2차가 워밍업이었다. 이제 3차에 접어 들었으니 본격적인 일본정원 공부가 시작될 것이다. 낮동안 부지런히 관리 실무를 다루고 있으니 이론공부를 보충하기 위해 도서관에서 참고서도 몇 권 빌려왔다. 모처럼 알게 된 정원 디자이너 요시다씨에게도 때때로 신세를 져 볼 생각이다.
내일은 후쿠오카로 가는 길목인 도스라는 곳의 개인정원 출장 작업이란다. 열심히 해서 일도 잘 배우고 가능하면 사부에게 힘도 되어 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