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과 1942년, 두 음악가가 망명하다시피 뉴욕에 도착했다.
나라를 사랑했고, 민족을 사랑했던 당시 이들의 음악에는 민족적 정서가 그대로 녹아들어 있었다. 음악성을 인정받으면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그들이었지만, 타향살이는 녹록하지 않았다. 그들의 음악과 정서는 미국의 문화와 섞이지 못하고 겉돌았다. 조국과 유럽에서 만개했던 그들의 창작력도 신대륙이라는 토지에서 좀 채 피어나지 못했다. 혁명과 전쟁의 포화가 점차 사그라들기 시작했지만, 그들의 귀향은 쉽지 않았다.
생의 마지막 궤도도 둘은 비슷했다. 암과 백혈병이라는 병마와 싸워야 했다. 마치 하늘이 마지막 기회를 주려는 듯 병상의 그들에게 작곡 의뢰가 들어왔다. 죽음과 마주하고 있지만 그에 굴하지 않은 힘을 가진 명곡을 탄생시켰다. 평단의 호평과 관객의 찬사, 시민권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맨해튼 북쪽의 한적한 공원 묘지에 몸을 뉘었다. 라흐마니노프와 바르톡 이야기다.
망명의 이유
라흐마니노프는 러시아 혁명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왔다고 알려져 있다(1918년). 세계대전이 유럽을 휘몰아치면서 고국으로도, 그가 아끼던 스위스 별장으로도 돌아가지 못했다. 그의 유명한 작품들은 대부분 러시아와 유럽에서 활동하던 시절 쓰였다. 당시 미국 음악계는 현대 음악 기법에 매료된 한편 할렘 르네상스라 불리는 흑인 문화 예술이 주류로 밀고 들어왔다. 라흐마니노프에게는 생경한 환경이었다. 그의 망명 기간 동안 소련 정부와의 사이는 당연히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헝가리 출신 바르톡도 다르지 않았다. 그 역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지만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기반 위에 민족 정서를 유려하게 표현했던 라흐마니노프와는 달리, 민속음악에서 취득한 선법을 현대 음악 기법으로 승화시켜 작품에 적극 활용했다. 그럼에도 미국에서 그의 음악은 잘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강의를 하거나 가끔 부인과 함께 피아노 연주를 하며 어렵게 살아가야 했다. 바르톡은 파시즘 자체를 극도로 싫어했기에 나치는 물론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 체제의 우파와 척을 졌다. 나치즘이 팽창하던 시기 결국 우파의 미움을 견디지 못한 바르톡은 자유를 찾아 미국행을 결정했다(1940년).
라흐마니노프는 흑색종이라는 암으로, 바르톡은 백혈병으로 말년을 힘들게 보냈다. 투병 중인 그들에게 작품 의뢰가 들어왔다. 맨해튼 동쪽 롱아일랜드의 센터포트(Centerport) 해변에서 요양 중이던 라흐마니노프는 그곳에서 최후의 명곡 '교향적 무곡'(1940년)을 썼다. 그는 독실한 러시아 정교회 신자였다. 종교 음악과 민족 정서를 켜켜이 쌓아 올려 교향곡 버전과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버전을 만들어 냈다.
피아노 버전은 생전에 그가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호로비츠와 함께 초연했다. 바르톡 역시 뉴욕 북부의 사라낙 호수(Saranac Lake)가 있는 요양원에서 단 7주 만에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1943년)을 완성했다. 흥미롭게도, 그들의 마지막 곡에서야 미국의 색채가 반영됐다. 라흐마니노프는 곡에 색소폰을 삽입했고, 바르톡은 무너지는 나치를 조롱하는 한편 미국적 분위기가 풍기도록 마지막 악장을 구성했다.
애정과 이용, 애국와 업적 사이
비슷한 시기, 필라델피아로 유학 온 한 아시아 청년이 있었다. 그 역시 민속 음악을 채집하고 발전시키는 일에 관심을 두고 수십개국의 민요와 국가를 수집하고 연구했다. 제 곡조를 가지지 못한 나라 사랑의 가사에 곡을 붙여 세상에 내놓은 이,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였다.
라흐마니노프와 바르톡은 공산주의와 파시즘에 등을 돌리고 미국으로 건너와 고단한 생을 보냈다. 같은 시기 안익태는 미국 유학 후 유럽으로 들어가 나치와 일제의 천하에서 음악 활동을 활발히 이어갔다. 예술가로서 재능을 펼칠 기회를 좇는 것은 충분히 이해 가능한 부분이지만, 금도가 있는 법이다. 그에게서 애국애족의 마음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민속 예술이 애정의 대상인지, 이용의 대상이었는지는 그들의 행보를 보아 추정해볼 수 있다.
나치즘과 파시즘을 혐오한 바르톡은 자신의 작품이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에서 연주되는 것을 금지했다. 작품 출간도 기존 독일 출판사에서 영국 회사로 바꾸어 버렸다. 에디슨 축음기를 들고 다니며 동유럽 전역은 물론 터키와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민속 음악을 채집, 기록하고 교회 선법까지 연구해 음악 기법으로 발전시킨 바르톡이었으나 망명하느니 부역하지 않았다. 바르톡에 비하면 안익태의 선택은 실망스럽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안익태의 유럽 활동을 놓고서는 평가가 갈리지만, 적어도 그가 에텐라쿠(일본의 궁중음악) 환상곡, 교쿠토 환상곡, 만주국 축전곡 등을 작곡하고 지휘했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 같다. 그것도 만주국 건국 10주년 기념식에서 일본과 연합한 독일과 이탈리아를 격려하는 가사가 든 축전곡을 말이다. 그에겐 애국애족보다는 본인의 예술 활동이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북아의 민속 음악은 애정의 대상이기보다 그의 음악에 담길 독특한 소재였던 게 아닌가 싶다. 예술혼을 불태우고 싶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수많은 예인들이 붓을 꺾고 총을 잡던 시절이었다.
따라오는 후손은 앞선 이의 걸음만 보는 것이 아니다. 그 걸음이 이 사회에서 어떤 대우를 받는지 눈여겨보며 그들의 미래를 선택할 것이다. 권력 앞에 힘없는 한 사람의 음악가에게라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기대하는 이유이다. 애국애족보다 자신의 직업과 활동이 중요했던 것 같은 이들, 그들의 행보 일부를 덮고 지우려는 시도는 아마도 바로 그 행적이 수치요 오점이라는 반증일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간 이들, 돌아가지 못한 이들
1988년 7월 7일, 바르톡의 유해는 미국에서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이장되었다. 1977년 7월 8일, 안익태의 유해는 스페인에서 국립 서울 현충원에 이장되었다.
라흐마니노프는 결국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2015년, 그의 묘소를 소홀히 한다는 이유를 들어 러시아에서 그의 유해 송환을 요구했다. 공식적으로는 가족들에 의해 거절당했지만 직전 해에 러시아에 의해 강제된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합병 여파가 컸다. 그를 망명하게 했던 전쟁이, 죽어서도 돌아갈 수 없도록 길을 막은 것이다.
어디 라흐마니노프뿐이랴. 휴전 중인 한국도,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도 마찬가지다. 전쟁이 가로막아버린 귀향의 길이 모든 실향민에게 열리는 평화의 날이 오길 고대한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도 게재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