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방 안은 늘 숨이 막힌다.
단순히 뜨거운 공기와 비좁은 공간 때문만은 아니다. 주방에서의 노동은 온통 규칙으로 가득하다. 칼을 들고 이동할 때에는 반드시 칼끝이 땅을 향해야 한다. 재료를 다듬을 때는 한 재료 한 도마 원칙을 지킨다. 손을 씻고 손을 탈탈 터는 짓도 안 된다(손이 어딘가 부딪칠 수 있고 튀김 기름에 물이 들어가 사고가 날 수 있다). 누군가의 뒤를 지나칠 때에는 "지나갑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 외에도 주방 안에서의 규칙은 수없이 많다.
레시피 역시 그렇다. 뭔가를 더 넣거나 덜 넣는 건 손님의 요구가 아니라면 원칙적으로 금지다(체인점은 특히나 더 그렇다). 레시피는 날줄과 씨줄로 엮인 옷과 같다. 간장 한 숟갈, 파 한 줌으로도 맛은 완전히 바뀐다. 이 변화를 되돌리려면 추가로 물과 설탕, 소금 등등을 넣어가며 예정에 없는 고생을 해야 한다. 손님들은 이 변화를 귀신 같이 알아챈다.
이렇듯 즉흥적으로 음식을 만들면 손님의 반응도 예측할 수 없을 뿐더러, 일이 밀려 주방이 난장판이 된다. 일하는 환경이 이러니 가끔은 내가 공장의 기계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한다. 아니, 주방은 분명 공장이다. 공장제 대량생산이냐 가내수공업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스태프밀이 근속 여부 결정하기도
이 틀을 벗어던질 수 있는 시간이 딱 두 번 있다. 직원 점심시간, 그리고 마감 직후다. 짧은 시간이지만 이때만큼은 자유롭게 먹고 싶은 음식을 만들 수 있다. 흔히 말하는 '스태프밀'이다. 구내식당의 수준이 사내 복지의 척도인 것처럼, 주방 노동자들에게 스태프밀은 근속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일도 힘든데 밥까지 부실하다면 누가 와서 일을 할까(그 전에 내 배가 고파서 안 된다).
가족들끼리 있을 때에는 한식 밥상을 차리기도 하지만, 나와 직원들만 있을 때에는 각자 만들어 먹기도 한다. 특히 여름은 그렇다. 일 년 중 가장 바쁜 계절이라 찌고, 무치고, 끓일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이럴수록 남은 재료를 활용해 여러 가지 요리를 만들어 내는 임기응변은 필수다. 이때 우리를 구원해 주는 건 메밀면이다(우리는 우동과 메밀국수, 그리고 돈가스를 판다).
매장 레시피대로 쓰유(가다랑어포를 간장과 함께 끓여 내린 것) 육수에 무와 파, 고추냉이를 넣어 먹어도 좋지만, 매운 양념장에 상추와 깻잎을 썰어 비빔국수를 만들어도 좋다. 직원들은 여기에 새우튀김이나 가게에서 담근 열무김치를 고명으로 올려 먹기를 좋아한다.
땀 흘려 일한 뒤에 먹는 김치말이 국수
물론 그게 다는 아니다. 직원들의 식사를 직접 책임질 때가 일주일에 두세 번은 생기는데, 이때를 위해 나는 5월부터 필살기를 준비해 놓는다. 우리 가게는 한 달에 한 번씩 대량으로 깍두기를 담그는데, 초여름이 오면 마지막 깍두기 통에 남은 김칫국물을 따로 담아 냉장고에 보관한다. 날이 더워지고 장마가 찾아오면 체에 고춧가루를 걸러낸 뒤 마트에서 사 온 사골국물을 부어 육수를 만든다.
식사시간이 되면 메밀 면을 삶은 뒤 김가루와 통깨, 열무김치와 삶을 계란을 고명으로 올려 상에 내놓는다. 아, 참기름을 한 바퀴 두르는 것도 잊으면 안 된다.
근데 이것만 먹고 저녁까지 버틸 수 있냐고? 그럴까봐 오후 두 시쯤에 정육점에서 돼지 앞다릿살 한 근을 떼와 수육을 만들기도 한다(참고로 우리 가게의 식사시간은 오후 세 시다). 그럴 시간이 없을 때에는 오후 네 시쯤 커피에 달달한 간식을 추가로 먹는다. 일을 위해서는 포만감이 느껴질 때까지 뭐든 먹어야 한다. 이때를 놓치면 마감시간 때까지 입에 뭘 넣기가 힘들다.
누군가의 방해 없이 오롯이 식사에 집중한다는 것
마감 후 식사는 오로지 나만의 것이다. 보통은 집에 와 저녁밥을 먹지만, 대청소를 하거나 내일 장사 밑작업이 필요할 때에는 가게에서 끼니를 때운다. 이때는 시간 제약이 없기 때문에 여러 요리에 도전할 수 있다. 여건이 안 돼 상품으로 내놓을 수 없었던 메뉴들이 생명력을 얻는 시간이기도 하다.
며칠 전에는 아게다시도후를 만들었다. 튀긴 두부에 쓰유를 부어서 먹는 일식 요리다. 한가한 시간에 미리 튀겨 놓은 두부에 팔다 남은 육수를 부으면 끝. 여기에 간 무와 고추냉이,가다랑어포와 대파를 고명으로 올린다. 한 입 먹으니 부드럽고 든든한 기운이 서서히 위장을 채운다.
짭짤한 우동국물에 튀긴 두부를 적셔 먹는 맛이라 특별할 건 없지만, 쓰유의 강한 감칠맛과 무의 알싸함이 만나니 밥반찬으로는 그만이다. 무엇보다 나의 식사를 방해할 그 무엇도 없다. 오직 식당에서 일한 이들만 알지 않을까. 누구의 방해 없이 오롯이 식사에 집중할 때 느껴지는 해방감을.
오로지 자신을 위한 밥상, 모든 사랑의 시작
대단한 건 아니지만 이 일을 하면서 깨달은 게 있다. 남들을 행복하게 해 주고 싶다면 우선 내가 행복해야 한다는 것. 그러려면 우선 나부터 맛있게 잘 먹어야 한다는 것. 그 경험이 다른 이들의 끼니를 살필 줄 아는 공감으로 옮아간다는 것.
이탈리아 요리를 배우고 싶어 직장을 그만두고 주방 노동자가 된 저널리스트 빌 버포드는 자신의 책 <앗 뜨거워!>에서 동료들과 스태프밀을 해 먹었던 경험을 이렇게 표현한다.
"사랑으로 만들지 않은 음식은 실패작이다."
나는 저 구절을 읽자마자 페이지 귀퉁이를 살짝 접어 놓았다. 스스로에게 동력을 주는 일이야말로 모든 사랑의 시작임이 절절히 느껴져서. 자신을 위한 식사를 정성들여 차려 먹는 일. 나에게는 그것이 모든 사랑의 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