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책을 주로 사서 보는 편이었다. 새 책, 중고책, 선물 받은 책 등 다양한 조합으로 점점 부피를 더해가던 녀석들은 어느새 책장이 아닌 창고 구석 테이핑 된 박스 어딘가에 방치되어 갔다. 여기에 아이들의 책들까지 무서운 기세로 가세했다. 집에서 내게 허락된 유일한 공간인 서재가 위협받고 있다. 혹시 10년 뒤 내 모습은 아니겠지?
오래된 책들이 중구난방으로 꽂혀있다. 경험상 10년이 지나면 보존이 제대로 안 된 책들은 눈에 띄게 상태가 나빠졌다. 내가 좋아하는 책들로 공간을 채워나가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정리를 할 필요가 있었다.
요즘은 어디서든 도서관을 볼 수 있고 전자책 시장도 발달했지만, 그럼에도 누군가는 책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폐기하기보다는 기부를 해서, 그 책들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연결된다면 좋을 것 같았다.
책을 정리하는 방향은 판매와 기부, 2가지로 정했다. 거르고 걸러서 책을 뽑아보니 대략 160권 정도가 나왔다. 버리지는 않기로 했으니, 책을 판매하면서 동시에 기부를 할 수 있는 곳을 검색했다.
다양한 이별의 모습들
첫 번째로 활용한 방법은 '행복한 책 나눔'이었다. 부산시 예산을 활용해서 지역 서점들과 연계한 프로모션으로, 다 읽은 책을 50% 상당의 '방문서점 도서교환권'으로 환불해 주는 것이었다. 2021년 이후 발행된 책들 중 소장하지 않을 책들을 추려보니 5권 정도가 있어서 어렵지 않게 반납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알라딘 중고서점'을 활용했다. 캐리어 2개에 책을 한가득 담아 오프라인 중고서점에 판매를 한 적이 있었다. 장마철이기도 하고, 무거운 짐을 들고 계단을 내려갈 정도로 튼튼하지 않은 나의 하체를 생각하며 이번에는 오프라인 서점이 아닌 온라인 판매에 도전했다.
바코드를 찍어서 판매 가능한 책들을 선별하고, 박스에 패킹한 뒤 집 앞에 두기만 하면 택배사가 방문해서 가져가는 시스템이었다. 책이 회수된 이후 상태에 따라 판매가 불가능한 것들은 다시 돌려받거나 현장 폐기된다고 했다. 나는 후자를 택했다. 정리를 해보니 판매 가능한 책은 대략 60권이었다. 책들을 정리해서 박스에 담아 문 앞에 두니 3일 내에 사라졌다. 금전적인 이득은 크지 않았지만 오프라인 판매에 비해 무척 편리했다.
마지막 판매과정은 '당근마켓'이었다. 돈을 버는 것이 1차적인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균일가 1천 원'으로 사진과 함께 글을 게시했다. 오래된 책들이 제법 있었고, 대부분의 책이 소설과 종교서적이었기 때문에 선택의 폭이 넓지는 않았지만, 다행스럽게 책을 사겠다는 톡이 하나 둘 오기 시작했다.
당근마켓은 직거래를 선호하는 편이다. 중고거래 특성상 제품 확인이 필요한 부분도 있지만, 그보다는 직거래의 소소한 느낌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쭈뼛거리면서 "당근... 이세요?"라고 물으며 어색하게 서로를 검증하는(?) 순간이 재미있다. 익숙해지면 자연스럽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며 물건을 바로 건네주기도 한다.
기억에 남는 사람도 있다. 최근에 내 책을 구매한 분은 대중교통으로 한 시간 거리를 아무런 불평 없이 한달음에 달려와주었다. 이 동네가 초행길인 것 같아 지하철역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는데, 역까지 나와준 것이 고맙다고 하며 귀한 윌 요구르트를 주는 것이 아닌가! 멀리 와준 것이 고마워서 나도 소설책을 추가로 줬다. 직거래를 통해서만 누릴 수 있는 감격의 순간이었다.
한 번은 '대형 라이언인형'을 판매했다. 인형이 사람만 한 크기라서 차로 옮겨야 했는데, 구매자는 자차가 아닌 택시를 타고 왔다. 인형의 가격보다 몇 배는 더 나갔을 택시비용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인형을 끌어안고 함박웃음을 짓는 그녀를 보며 뿌듯했던 기억이 난다.
당근마켓까지 활용한 이후 남은 책들은 50~60권 정도가 되었다. 남은 책들은 판매가 아닌 기부를 통해 처분해야 했다. 검색을 해보니 직접 방문해서 수거를 하는 중고책 판매점들이 있었는데, 이 정도 책의 규모로는 수거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한 지인은 '구세군 미혼모 아파트 기부'를 추천해 줬는데, 지방이 아닌 서울에 위치해 있어서 접근성이 떨어졌다.
그러던 중에 2022년에 개관한 '국회 부산도서관'을 알게 되었다. 지방 최초의 국회 도서관으로 국가문헌의 보존을 위해 만들어진 곳인데, 시민들을 대상으로 '공유서가'라는 것을 운영하고 있었다. 다 읽은 책을 기증하고, 필요한 책은 누구나 가져갈 수 있었다. 지역 도서관의 경우 발행된 지 3년 이하의 책만 기증할 수 있었는데, 이곳은 그런 제약이 없었다.
"이렇게나 많이... 너무 감사합니다."
사서는 책의 양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의미 있는 곳에 책을 내놓을 수 있어서 오히려 내가 감사했다. 국회도서관의 도움으로 꺼내놓았던 책들을 모두 정리할 수 있었다.
비움을 통한 소소한 즐거움
소설 덕후인 나는 좋아하는 작가의 책은 대부분 소장하고 있다. 책을 비워내면서 책장에 제법 많은 공간이 확보되었다. 때마침 좋아하는 작가가 한 명 추가되기도 했다. 비워낸 만큼 새로운 것들을 채울 수 있다는 사실은 무료한 삶에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적은 금액이지만 수익도 발생했다. 내가 기증한 책이 누군가에게 읽히는 것처럼, 책을 판매하고 얻은 수익의 일부도 다른 사람을 돕는 데 사용되면 좋을 것 같았다. 때마침 둘째의 유치원에서 도움이 필요한 노인들을 대상으로 모금활동을 하고 있어서 작은 보탬을 주기로 했다.
가파른 물가상승으로 먹고살기가 팍팍하다. 1만 원이 넘지 않는 밥 한 끼를 찾기 힘들어 너도나도 허리띠를 졸라맨다. 중고책 거래의 가장 큰 장점은 가성비가 우수하다는 것이다. 한 권 값으로 몇 권을 살 수도 있다.
종이책에서 모바일로, 텍스트에서 영상으로 문화의 소비가 옮겨가면서 책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읽는데 몇 시간이 걸리는 책 보다 보는데 1분도 걸리지 않는 영상이 익숙한 시대를 살아간다. 누군가의 서재에 있는 책들보다 주인을 찾지 못해 버려지는 책들이 많아지고 있다. 효과는 미비할지 모르지만 버려지는 책들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폐기가 아닌 기증을 택했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이 가장 멀다고 한다. 약 3주간 책을 정리하면서 다양한 경험과 느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생각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실행했기 때문이다. 삶에 작은 변화를 주고 싶다면 주변 정리를 한 번 해보는 것은 어떨까. 예상하지 못했던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게재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