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추에 물을 주는 소녀가 밭고랑 뒤를 돌아보니 그새 상추가 자란 듯했다. 그만큼 초여름 상추는 키가 부쩍부쩍 자라 자칫 밭 임자가 부지런하지 못하면 말라 죽거나 녹기 십상이다. 부곡역 관사의 텃밭에 심어 놓은 채소를 관리하는 것은 거의 소녀 영자의 몫이었다.
경기도 화성군 일왕면(현재의 의왕시 부곡동)에 위치해 있던 부곡역(현재의 의왕역)에 부역장(副驛長)으로 근무했던 아버지를 따라 기차역 관사에 거주했던 오영자(1938년생) 가족은 남부러울 게 없었다.
부곡역은 경부선 수원~군포 사이에 있는 역이었는데, 일제는 용산역 기지창 기능의 일부를 부곡역에 이관시켰다. 만들어질 때부터 다른 일반역에 비해 규모가 컸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용산의 철도학교를 나온 오경순(1916년생)은 옥천의 이원역 등지에 근무하다가 1950년도 당시에는 부곡역에 부역장으로 근무했다.
상추에 물 주던 소녀는 트럭에 몸을 실었다
"영자 엄마. 10분 후에 차가 오니, 빨리 애들 챙겨요!"
"......"
철도 공무원 제복에 군인 철모를 쓴 남편을 본 박희연은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전쟁이 터져 모두가 피난 가는 상황에서 오경순이 아내에게 현재 상황을 차분하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상추에 물을 주고 있던 소녀 영자도 아버지의 성화에 동생들과 함께 트럭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오영자 가족이 트럭에 몸을 싣고 고향인 충북 영동군 영동읍 심원리로 온 것은 1950년 6월 말이었다.
심원리에 온 지 보름이나 지났을까. 1950년 7월 중순 새벽 마을 개들이 요란하게 짖어댔다. 잠시 후 마을이 시끄러워졌고, 경찰 두 명이 오명순(1926년생)의 양팔을 붙잡고 마을 어귀로 끌고 갔다. 영자가 아버지의 권유로 철도청에 입사해 영동역에 근무하던 명순 삼촌의 모습을 본 것은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심원리에서 20리(8km) 떨어진 영동읍 중앙동 시장통에 살던 영자의 사촌오빠 오영기, 오영건(1928년생)도 비슷한 시기에 연행되어 영동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됐다. 이들이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1950년 7월 20일 영동읍 일대에서 학살되었다는 사실을 오영자가 안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구세군병원 원무과장은 민전(민주주의 민족전선) 선전부장 오중순에게 "보증금을 내셔야 입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사람이 죽어가는데, 무슨 소리요. 우선 사람부터 살려 놓고 봐야 할 것 아닙니까"라고 호소했지만 원무과장은 묵묵부답이었다.
오중순은 민청(민주청년동맹) 회원을 영동읍내 유지에게 보내 입원비 보증금을 구해 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후에 돌아온 돈을 구하러 간 청년이 태극청년단원들에게 몰매를 맞았다고 했다. 오중순을 비롯한 민전 간부들이 영동경찰서로 몰려가 "모든 문제를 비폭력으로 해결합시다"라고 제안했지만 헛수고였다. (이종, <끝나지 않은 여정>, 대동)
결국 1946년 10월 1일부터 3일까지 진행된 영동에서의 좌·우 격돌로 수많은 부상자가 속출했고 장준을 비롯한 12명이 청주형무소에 수감돼 재판받았다.
영동에서 3일 동안 진행된 좌·우 격돌 사건의 본질은 무엇일까. 단지 우익청년단의 영동읍 비탄리 습격과 뒤이은 좌익들의 자위권 발동, 우익과 경찰들의 보복 테러와 좌익들의 관공서 항의였던 것일까. 문제의 본질은 그해 대구를 시발로 해 전국적으로 벌어진 추수봉기다.
1946년 1월 하순 미군정은 신한공사가 관할하지 않는 지방의 쌀 공출을 마을 원로와 명망가, 시·군·면 공무원, 경찰에게 다시 맡겼다. 이는 미군정의 식량정책의 실패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었다.
미군정이 시작되자마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물가고와 식량공출은 전체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농민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1945~1946년은 예년을 웃도는 풍년이었는데, 식량공출을 한 건 일본으로 유출된 쌀 때문이었다.
2차세계대전 이후 일본을 반공의 전초기지로 삼으려 한 GHQ(연합국총사령부)는 조선의 쌀을 일본으로 반출해, 일본 국민들에게 저렴하게 제공한 것이다. 대신 조선 농민들은 아사 직전의 상황이 됐다. 경찰과 공무원은 폭력적으로 쌀 공출을 집행했고, 일부 공무원들은 부정한 방법으로 폭리를 취했다.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1>, 글항아리)
이러한 미군정의 공출정책에 저항해 추수봉기를 일으킨 것이 소위 '10월 항쟁'이다.
충북에서의 추수봉기는 영동이 가장 격심하게 일어났으며, 농민 수백 명이 참여했다. 그런데 영동경찰은 추수봉기에 참여한 사회운동 지도자 12명을 체포해 청주형무소에 수감시켰다. 이들은 청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장준·장철과 오경순 등이었다.
오중순, '영동의 입'으로 농민을 대변하다
영동읍 심원리 오명순·오영기·오영건이 보도연맹사건으로 학살된 건 이들이 해방 후 영동에서 들끓었던 자주적 민족국가 건설 운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충북 영동은 일제강점기부터 농민운동과 청년운동·사회운동이 활발했던 지역으로 이 운동의 구심에 오중순이 있었다. 오중순의 동생 오명순과 오중순의 장남과 차남인 오영기·오영건도 해방 후 사회운동에 자연스럽게 참여했다. 오중순(1906년생)은 '영동의 입'(대변인)으로 활동했다.
해방이 되자마자 만들어진 건국준비위원회와 뒤이은 인민위원회에서 선전부장을 맡았으며, 각종 정치·사회 단체에서 선전부장을 도맡았다. 또한 그는 농업문제와 관련해서도 영동을 대표했다. 오중순은 영동심상소학교(6년제) 고등과(2년제)를 졸업 후 30세까지 농업에 종사해 전문성을 갖췄다. 특히 1920년대부터 영동청년회 사찰부장, 영동청년동맹 검사위원을 맡아 청년운동과 농민운동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1945년 12월 서울에서 열린 전국농민조합총연맹 결성대회에 장철, 이종과 함께 영동군 대표로 참여했다. 미군정이 조선공산당을 불법화하면서 좌익 3당이 합당한 남로당(남조선노동당) 영동군당에서는 농민부장(책)을 맡았다.
1933년 9월에는 영동청년회 주최로 영동청년회관에서 농촌문제에 관한 강연이 있었는데, 당일 연사로 나선 오중순은 '농촌문제와 청년의 사명'이라는 주제로 사자후를 토했다. 20대 중반의 청년이 이해용 영동군수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연단에 선 것이다.
일제강점기부터 독립운동(민족해방운동)에 참가한 오중순은 해방 후 왕성한 정치·사회운동을 하다 1949년 여름 서울에서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 구속 수감되는 신세가 됐다. 이는 불행 중 다행으로 '보도연맹 학살사건'을 피하게 되는 역사적 아이러니로 이어졌다.
'빨갱이 가족'이라는 굴레에 시달린 사람들
오영자는 영동 심원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시골에서 사촌언니 오영숙과 함께 소를 키웠다. 친구들보다 2년 늦게 대전에 있는 호수돈여자중학교에 입학했다. 아버지 오경순과 집안의 파멸이 영향을 미쳤다.
오경순은 영동의 '10월 사건'으로 인해 청주형무소에 구속되면서 철도청에서 해직됐다. 그를 포함한 12명의 활동가들은 1심에서 전원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오경순은 1심의 선고에 항소해 무죄를 선고받아 철도청에 복직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전쟁으로 인해 또 한 번의 평지풍파가 일었다. 영자의 삼촌과 사촌오빠들이 '보도연맹 사건'으로 죽임을 당한 것이다. 아버지는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1950년 가을에 대전철도청에 복귀할 수 있었다.
이런 집안 사정으로 인해 오영자는 친구들보다 뒤늦게 상급학교에 진학했고, 대전여고 졸업 후에는 대전철도청에 입사했다. 몇 년 후에는 서울로 갔는데, 여기서 새로운 시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원조회로 인해 정식사원이 되지 못한 것이다. 근무연한이 같은데도 정식사원 급여의 1/3밖에 받지 못했다.
신원조회의 그물은 오씨 집안 전체에 씌워졌다. 특히 영자의 남동생 오진식(가명)은 학자의 길을 걸었는데, 번번이 교수 임용에서 탈락했다. 다행히 그를 아낀 교수가 오진식을 이끌어 주어 부경대 교수에 임용됐다.
10년 전 오영자는 꽃을 제대로 피우지도 못하고 20대 청춘에 역사에서 사라진 삼촌과 사촌오빠들의 영가(靈駕)를 서울 보국사에 모셨다. 고인들의 해원안식을 위한 것이다.
친자식도 아닌 그가 이렇게 한 이유는 방학 때면 삼촌과 사촌오빠들이 옥천 이원역 관사에 놀러 와 영자를 예뻐해 준 탓이다. 일제강점기 말 오중순은 영동 시장에서 그릇가게를 운영했는데, 방이 비좁았다. 그렇기에 오중순의 막냇동생과 자식들은 방학 때마다 넓은 다다미방이 있는 이원역 관사로 놀러 갔다.
그때의 추억과 정을 잊지 못하는 오영자는 80대 중반이 되어서도 망자의 명예회복에 땀을 흘리고 있다. 오중순은 한국전쟁 통에 동생과 자식들을 잃고 실의에 빠졌다. 잠시 광주에서 인쇄소를 경영했으나, 낙심으로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1954년에 눈을 감았다.
남은 가족들도 반백 년 넘게 '빨갱이 가족'이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가의 집안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반역의 세월을 살아왔다. 이들의 깊은 상처를 누가, 어떻게 위로해 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