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형 보험사들이 백내장 진단으로 수술받은 환자에 대해 석연치 않은 이유로 보험금을 내주지 않고 있다. 특히 한국소비자원의 지급 결정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시간을 끌거나 무리한 의료자문을 근거로 지급을 거절하고 있다. 의사 진단에 따라 수술받은 환자들에게 일방적인 잣대로 보험금 지급을 거절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2021년 10월 무대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전민용(54)씨는 색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음을 느끼고 안과를 찾았다. 이곳에서 중등도의 양안 백내장(질병코드 H2502)을 진단받은 뒤, 다음 달 또 다른 안과에서도 같은 결과를 듣게 됐다.
이에 전씨는 백내장 치료를 위한 수술을 받고, 현대해상화재보험에 보험금을 청구했다. 전씨는 앞서 2007년과 2020년 각각 현대해상과 '무배당행복을다모은','무배당뉴간편플러스' 상품 관련 계약을 맺고, 매월 꾸준히 보험료를 납입했었다.
하지만 현대해상은 보험금 지급을 거절하면서 "수술이 적정했는지 여부 등을 확인해야 한다"며 제3 의료기관의 의료자문을 요구했다. 전씨가 계약한 보험상품 약관에는 의료자문을 요구할 수 있다는 내용 자체가 없었다.
다른 보험사는 모두 지급, 한국소비자원도 손 들었지만...
이에 부당함을 느낀 전씨는 소비자원에 조정을 요청했고, 소비자원은 전씨의 손을 들었다. 전씨가 안과 전문의의 백내장 진단에 따라 수술받았으며, 같은 수술에 대해 메리츠화재해상보험, DB손해보험 등 다른 보험사에서는 보험금을 지급했음을 고려한 결과였다.
지난 3월 소비자원의 이같은 결정에도 현대해상은 현재까지 1500만원이 넘는 보험금을 주지 않고 있다.
전씨는 지난 17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처음에는 현대해상 쪽 담당자가 소비자원에서 지급 결정이 나오면 보험금을 지급한다고 했지만, 지금까지도 지급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1년 반이나 기다려도 보험금이 나오지 않아 금융감독원에도 민원을 넣었는데, 현대해상은 '금감원 결정도 법적으로 강제성이 없다'고 버티고 있다"며 "15년 넘게 보험료 낼 때는 한마디도 하지 않더니, 소비자가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나 황당하다"고 덧붙였다.
시간별 안압 수치 프린트한 의무기록지도 '무시'
올해 4월 백내장 수술을 받은 제갈민희(52)씨도 이런 피해자 중 한 명이다. 제갈씨 역시 안과 전문의로부터 양안 백내장(질병코드 H2512)을 진단받고 수술을 진행했다.
수술 후 안통, 어지럼증, 구역, 유리체 탈출, 녹내장 등 증세로 각각 약 8시간씩 두 차례 입원한 제갈씨는 KB손해보험으로부터 수술비는 받았지만 800만원이 넘는 입원비는 받지 못했다. 입원 치료까지는 불필요했다는 보험사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2015년 'KB Yes! 365 건강보험' 상품 계약을 맺었던 제갈씨는 다툼 끝에 다른 병원에서의 의료자문을 받았고, 보험사는 "입원 치료의 필요성에 대한 근거는 부족하다"는 결과를 얻어냈다.
제갈씨는 의료자문 과정에서 자신을 직접 치료한 집도의가 작성한 소견서와 안압 변화 경과를 매시간 프린트해 첨부한 의무기록지 내용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실제 제갈씨의 의무기록지를 보면, 수술 직후 1시간 간격으로 측정해 프린트한 안압 수치 자료와 관련 약물치료 과정 등이 상세히 기재돼 있다.
그런데 제갈씨를 직접 치료하지도, 만나보지도 않았던 다른 병원의 의사는 이런 기록을 외면한 채 통원만으로도 치료가 가능했을 것이라고 결론 내린 것이다. 보험사는 이를 근거로 현재까지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고 있다.
지난 17일 제갈씨는 기자와 통화에서 "수술받은 직후 머리가 심하게 아프고, 미식거리고, 토할 것 같은 상태였다"며 "주사 등 처치를 받으면서 계속 안압을 체크했지만, 안압이 내려가지 않아 병원에 머무르게 됐다"고 당시를 떠올리며 말했다. 이어 "1시간에 한번씩 바늘로 눈에서 물을 빼는 처치도 받았는데, 굉장히 두렵고 무서웠다"고 했다.
'문제 없다'는 보험사들..."진단 적정성, 환자 아닌 의사에 물어야"
그러면서 "같은 병원에서 저와 똑같은 수술을 받고 입원한 환자들은 다른 보험사에서 모두 보험금을 받았다고 들었다"며 "실제 통증이 심하고 안압이 내려가지 않아 입원할 수밖에 없었는데, 보험사는 무조건 보험금을 못 준다고만 한다"고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보험사들은 보험금 부지급이 적정했다는 입장이다. 전씨의 경우에 대해 현대해상 관계자는 "전씨가 제출한 서류만으로는 백내장 진단의 적정성 여부를 판단하기 곤란해 소비자원에도 (지급 결정) 결과를 수용할 수 없다는 의견서를 보냈다"며 "다만, 전씨가 추가 서류를 제출하거나, 의료자문에 동의하면 보험금 심사 절차를 신속히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KB손해보험 관계자는 제갈씨 경우와 관련해 "의료자문을 시행했지만 입원해 치료해야 할 부작용 및 합병증 등이 확인되지 않아 입원 치료의 필요성이 인정되지 않았다"고 했다. 이어 "또한 청구인은 다툼이 있을 경우 약관에 따라 제3의 전문기관 전문의에게 판정을 의뢰할 수 있다는 내용을 안내받고 서명했으나, 제3자 의료자문을 진행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환자를 직접 치료한 의사가 아닌 환자를 대상으로 진단의 적정성 여부와 이에 따른 보험금 지급 여부를 따지는 것은 부당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득의 금융정의연대 대표는 "보험사들이 일방적인 잣대로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는 것은 '횡포'"라며 "특히 소비자원에서 지급 결정을 내린 사안에 대해서도 보험금 지급을 거절한 것은 과도하다"고 말했다.
이어 "일부에서 불필요한 경우에도 백내장 수술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보험사는 환자가 아닌 의사에게 책임을 묻고 구상권을 청구하는 것이 맞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