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이야기 담당 편집기자로 일하며 더 좋은 제목이 없을까 매일 고민합니다. '우리들의 삶'을 더 돋보이게 하고, 글 쓰는 사람들이 편집기자의 도움 없이도 '죽이는 제목'을 뽑을 수 있도록 사심 담아 쓰는 본격 제목 에세이. [편집자말] |
"만인을 향한 메시지는 실은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않는 메시지입니다. 메타메시지의 가장 본질적인 양태는 그것이 수신자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 앞으로 온 메시지라는 것을 알면 비록 그것이 아무리 문맥이 불분명하고 의미조차 불분명하더라도 인간은 귀를 기울여 경청합니다."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를 쓴 작가 우치다 다쓰루의 글을 읽고 '이거네' 싶었다. 반가운 마음으로 포스트잇을 붙여두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읽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제목을 고민한다고 했지만 그 대상이 늘 모든 사람은 아니었다. 글도, 책도 그렇듯 제목에도 타깃 독자가 있다.
타깃 독자가 있는 제목
'제목의 이해' 제목만 놓고 봐도 그렇다. 제목 뽑기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관심이 갈 만한 요소를 곳곳에 숨겨 놓았다. 물론 제목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사람도 있다. 혹할 만한 문장으로 써두지 않고 '제목에 대한 글'이라는 내용만 흘려줘도 관심 있는 사람은 찾아 읽는 게 요즘의 읽기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몰리는 제목에는 틀림없이 이유가 있다고 본다. 우치다 다쓰루 작가가 그 이유를 친절하게 알려줘 내 눈이 번쩍 뜨였던 거다. 그게 뭐냐고? 그가 썼듯 '그것이 자기 앞으로 온 메시지'라는 것을 알아보는 것이다.
제목을 보자마자 '이거 내 얘긴가?' 혹은 '이 제목 쓴 사람 내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왔나?' 혹은 '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인가', 혹은 '귀신이네' 같은 반응을 부르는 문장들이 그렇다. 나에게도 그런 종류의 글이 있다. 그것들은 대부분 내가 관심 있는 것, 내가 고민하는 것과 관련 있는 제목이 많았다.
40대 직장맘인 나의 고민은 이런 거다. 일에 대한 고민,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 리더십에 대한 고민, 학부모로서의 고민, 대입에 대한 정보, 양육 문제, 좋은 부모의 역할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 등등 다양하다(코로나가 한창일 때는 평소에는 들여다보지 않았던 월간 <산> 기사들이 그렇게 내 눈에 띄더라는). 그래서 나는 이런 제목에 눈길이 간다.
아이 스스로 공부하게 하려면 이렇게 해야 합니다.
'직장존버' 고민하는 30후40중 직장인들에게
리더가 이 세 가지 못하면 조직이 산으로 가더군요
수능을 대학입학 자격시험으로 바꾸면?
어쩐지 나를 두고 말하는 것 같은, 혹은 나 읽으라고 쓴 것 같은 제목들이어서 반갑다.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만든다. 이것 말고 또 있다. 꼭 나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일단 보면 궁금한 제목들이다. 뭘까. 바로 전문가 상담 내용이 담긴 글들이다.
보편적인 감정을 건드릴 때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연재한 '오은영의 화해' 같은 종류의 글들이 그랬다. 타이틀을 아예 '사연 뉴스'라고 하고 온갖 사연들을 소개해 주는 글의 제목들도 그랬다. 일단 보자. 아래는 '오은영의 화해'에 실린 기사 제목들이다.
"우리 엄마가 그럴 사람이야?" 남편은 시댁 편만 들어요
엄마가 퇴근하면 우는 아들...아들이 절 싫어해요
집 사고 집값도 알려주지 않는 남편, 저를 못 믿는 걸까요
확실히 밝히건대 내 남편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아들이 없으니 내 아이들 이야기도 아니다. 공통점은 하나 결혼과 출산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 그래서 궁금한 마음이 일렁거린다. 안 들었으면 모를까 제목을 봤으니 더 궁금해지는 이야기다.
반대로 결혼하지 않았다면 그다지 시선을 둘 필요가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겠지만, 글쎄... 결혼 여부를 떠나 궁금한 이야기라면 누구라도 반응하지 않을까. 크게 화제가 되는 프로그램이 아닌 <궁금한 이야기 Y>가 2009년부터 지금까지 방송되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다. 현대사 등 꽤 무거운 이야기를 다루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에 우리 집 어린이와 청소년이 환호하는 것도 괜한 게 아닐 테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사람들은 이야기를 좋아한다. 나랑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도 제목이 솔깃하면 내용이 궁금해진다. 무슨 사연인지 더 알고 싶고, 특히나 '오은영의 화해' 같은 경우, 국민 멘토 오은영씨가 어떤 말을 해줄까 싶어 마우스가 바빠진다. 장담컨대 나만 그렇지 않을 거다.
사연에는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라도 있는 걸까. 라디오 사연도 그렇지 않나. 무심코 듣다가 어느 대목에 꽂혔을 때 더 잘 듣고 싶어서 갑자기 볼륨을 높였던 적 있지 않나. 사연만 듣고도 응원해 주고 싶거나 위로해 주고 싶거나 격려해 주고 싶거나, 감동 받아서 혹은 슬픈 내용이라 그저 눈물만 흘렸던 적 있지 않나. 분명 남 이야긴데, 내 이야기처럼 느껴진 적 있지 않나.
공감지수가 '다소 높음'에 해당하는 나는 자주 이런다. 그래서다. 이런 제목에 자주 낚이는 건. 자주 당하는 만큼 나도 써먹는다. 가끔은 이런 스타일의 제목을 사용한다. 어딘가 나와 비슷한 공감지수를 가진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믿으며. 그래서 나온 제목들이 이런 거다.
내가 쓴 글이 점점 마음에 들지 않아요
"저는 왜 아이에게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를까요?"
결혼해서 독립했는데... 부모님께 육아를 부탁하고 싶지 않아요
글을 쓸 때부터 수신인을 생각한다면
이런 제목을 지으려고 마음먹었을 때는 평소보다 조금 덜 비장해진다. 어깨에 들어간 힘을 조금이라도 빼려고 한다. 독자에게 다가가는 느낌으로 문장을 쓰고 싶어서. 함께 고민을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더 다정하게 말을 걸고 싶다.
세상 고민 혼자 다 짊어진 것 같을 때 힘든 이야길 주변에 나누다 보면 '어? 나만 그런 게 아니네?' 하고 생각하게 될 때 있잖나. 아마도 이런 사연들이 그런 마음으로 쓰여지고 또 그것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읽히는 거라고 보기 때문에 제목도 그 틈을 조금 파고 들어가 보는 거다. 토닥이는 마음이 필요한 사람들,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의 심리를 건드린다고 해야 하나.
제목에서 보편적인 감정을 정확히 건드릴 때, 독자는 반응한다고 믿는다. 제목은 어쩌면 독자와 편집기자가 하는 고도의 심리전이 아닐까 싶다. 이왕이면 내가 짓는 제목이 N극을 당기는 S극처럼 독자를 끌어당기는 문장이었으면 좋겠다.
끝으로 처음에 소개한 작가의 글을 일부 더 인용한다. 글을 쓸 때 이처럼 대상을 떠올리며 문장을 쌓아나간다면 제목의 수신자는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겠다 싶어서.
"(글은) 상정하는 독자가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를 씁니다. 그런 구체적인 이미지가 없으면 밀어붙이듯이 글을 써나갈 수 없습니다. 상정하는 독자가 없는 텍스트는 꾸물꾸물합니다.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공중에 시선을 두고 이야기 하는 사람처럼 흐릿한 어조를 띱니다. 똑바로 시선을 맞추면서 알아듣겠어요? 하고 표정을 확인해 가면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속도를 낼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