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지 사람들에게 제주는 버려진 땅이었고 죄수를 보내는 유배지였다. 지금은 이익을 노려 자본이 몰려들지만 진정으로 제주를 위하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나 또한 제주 사람 눈에는 그렇게 비칠 수 있으리라. 그런 제주인의 한과 정서를 이해하려다 제주학에 빠졌고 도민이 됐다. 키아오라리조트를 운영하면서 제주가 진정한 미디어와 인문학 교육의 중심이 되게 하겠다는 각오로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한미리스쿨)을 설립했다. 이 기사는 한미리스쿨 초집중언론인양성과정 학생들이 수료 후 계속 취재 지도를 받으면서 제출한 과제를 데스크 본 것이다. 이 과정은 겨울방학 때 한 달 간은 수강료·숙식 무료 기숙학교로 운영된다.[기자말] |
'여름여행'의 추억과 기획이 각별한 이유
아무 문장 끝에나 '여름이었다'를 붙이면 특별해진다는 말이 있다. 평소와 다름없는 세상이지만 여름날은 누구에게나 추억이 있기 마련이고 여행 구상으로 설렌다. 아들 승빈(가명·13)이 발달장애인인 성아(가명·40대)씨에게 여름은 더 각별하다. 발달장애인에게 큰 도움이 되기에 가족여행을 꿈꾸지만 갈 만한 여행지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아직 사회는 발달장애인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발달장애인 가족은 여행을 아예 포기하기도 해요. 몇 번 출입을 거부당하다 보면 부모는 위축돼요. 아이들도 경험할 기회가 줄어들어 결국은 고립되고 말아요."
비장애인은 살아가며 자연스럽게 습득하는 것들을 발달장애를 가진 아이들은 잘 배우지 못한다. 발달장애인은 비장애인이 흔히 하는 경험도 해보지 못한 게 많다.
"말 안 듣는 아이에게 가정 교육이 부족하다고 하잖아요. 발달장애인 부모라고 주위의 눈총을 피할 수는 없죠."
발달장애인에게 안전한 숙소는 어디에
여행을 떠날 때는 주변에 이해를 구하기 힘들어 빈틈없이 준비한다. 그러나 하루나 이틀 정도 머물 숙소를 구하기도 간단하지 않다. 성아씨는 '까다로운 엄마'가 돼 여러 군데 전화를 건다. 아들 승빈은 환경이 바뀌면 어떤 게 위험한지 알지 못한다. 유리로 된 컵이 깨질 수 있고, 날카로운 포크나 칼, 뾰족한 서랍의 모서리가 상처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려도 상관없는 안전한 공간이 필요하다.
여행지로 이동하는 내내 긴장한 승빈이 도착할 때쯤 배가 아플 것도 예상한다. 승빈은 낯선 소음과 북적이는 공간을 벗어나고 싶어한다. 또래 아이들이 모여 노는 놀이터보다 무당벌레가 사는 풀밭 있는 숙소를 찾는다.
"며칠동안 검색을 하다 보면 부러워지는 문구가 있어요. '펫프렌들리 반려견 동반 가능 숙소' 말이에요. 반려견이 안전하고 즐겁게 놀 수 있는 숙소가 많아졌어요. 홈페이지에 안내도 친절하고요. 발달장애인에게 '프렌들리한' 숙소는 여전히 찾기 어려워요. 필요한 안내는 어디에도 나와있지 않으니 일일이 전화해서 물어봐요."
이렇게 고른 숙소는 대개 비용이 문제다. 내야 할 카드값과 아들의 편의를 저울질해 본다. 통화 내용을 들은 동생인 딸이 팔을 당기며 물어본다.
"우리 여행 가?"
열 살 난 아이 얼굴에 기대보다 걱정이 앞서는 것을 보고 휴대전화를 내려놓는다. 성아씨는 지난 휴가를 떠올린다. 제주도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딸이 불만을 터뜨렸다.
"엄마는 만날 오빠만 중요해?"
성아씨는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자꾸만 화장실에 가고 싶어하는 아들 승빈을 돌봐야 했다. 남편은 차를 돌려 아이스크림 가게로 향했다. 숲속 놀이터를 누비며 옷을 더럽히던 딸은 가야 한다는 말에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나중에라도 투정을 부려주니 고마운 마음이었다.
"승빈이 상태에 따라 일정을 포기해야 할 때가 있어요. 발달장애인은 힘들어하는 정도가 일정하지 않아요. 많은 변수가 있어요. 그럴 때면 제가 욕심을 부린 것 같아서 모두에게 미안해요."
발달장애 아들 스케치북에서 발견한 희망
성아씨는 자주 아이들 방에 들어간다. 바닥에 흩어져 있는 장난감과 색연필을 줍다가 승빈이 스케치북을 열었다. 공항 창문에서 바라본 풍경, 차 밖 풍경... 승빈은 자기가 본 것을 사진처럼 정확하게 기억해 모두 화폭에 옮겨 놨다.
청량하게 쏟아지는 천지연 폭포의 기억은 아크릴판 위 과감한 붓질로 다채롭게 태어났다. 승빈의 마음 한 칸에 비행기가 두둥실 떠오를 때 창문 너머 보이는 넓은 날개, 얕게 펼쳐진 구름, 푸르른 하늘이 전부 깔려 있었다.
여행 계획을 짤 때 승빈은 이번 여행에서 어떤 동물을 만날 수 있을까 궁금하다고 했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듯했다. 아들에게 새로움은 두려운 것이지만, 동시에 기대되는 것이다.
가족여행에서 관계 맺는 법을 배운다
성아씨는 그림을 보고 여러 가지 감정을 느꼈다. '여행이 정말 아이에게 도움이 될까, 혹시나 내가 아이를 더 힘들게 한 건 아닐까' 하던 걱정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아이에게 지난 여름은 생각보다 깊게 스며들어 있었다. 승빈의 그림에 고스란히 녹아 있는 여행의 기억을 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부산 '깡통시장'에 갔을 때 먹고 싶은 음식을 실컷 먹고 기뻐하던 승빈의 미소가 떠올랐다. <백종원의 도전 요리왕>에 나오는 고수의 짜장면을 직접 먹고 자랑스러워하던 아이였다. 모든 행복이 그림으로 옮겨지지는 않았지만 그때 그 미소를 떠올리면 어쩐지 몇 날 며칠 여행계획을 짠 것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성아씨에게 여행은 가족과 함께하기 위한 것이다. 비록 고될지라도 서로를 이해하는 길이라 생각한다. 딸은 오빠 승빈이 언제 긴장하는지 알아야 하고, 승빈 또한 동생을 배려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실패와 시행착오가 있더라도 우리 가족은 '할 수 있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싶었다.
훗날 승빈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연약함을 노출하면서도 사회적 관계를 맺어가야 한다. 작은 사회라 할 수 있는 가정에서 관계 맺는 법을 알게 된다면 더 큰 사회에서도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미술치료 받으며 '그림 그리는 사람' 자부심
승빈이 미술치료를 받게 된 계기는 불안을 다스리기 위해서였다. 서귀포종합복지관에서 진행하는 꿈나무 육성 지원 사업에 선정돼 미술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이제 승빈에게 그림은 커다란 의미를 갖게 됐다. 담당 복지사는 "승빈이 그림을 그리며 사회에서 해야 할 자기 역할을 규정한다"고 말했다.
"치료를 시작하면서 본인을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고 표현해요."
승빈은 여행의 기억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그림을 그리며 자부심을 갖게 됐다. 그러나 성아씨는 걱정을 내려놓지 못한다. 부쩍 자란 아들을 볼 때마다 엄마가 함께할 수 없는 순간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낀다.
25만 발달장애인이 사회를 경험할 기회
발달장애인 가족은 대부분 혼자 남겨질 자식을 걱정한다. 보건복지부가 2022년 발표한 발달장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등록 발달장애인은 약 25만5000명이다. 그들 가족 중 34.9%가 '보호자 사후에 대한 막막함', 12.2%가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호소했다. 발달장애인 스스로도 미래를 걱정한다. 33.4%가 '혼자 남겨진다는 두려움'을 가장 큰 어려움으로 꼽았다. 성아씨는 발달장애인이 사회를 경험할 기회가 적은 탓이라고 진단했다. 아이가 식당에서 소리지르고 울어서 식당에서 쫓겨난 적도 있다.
"발달장애인도 함께 살아갈 공동체가 필요해요. 그 공동체 안에서 아들이 사회 경험을 넒혀 나가면 엄마 없이도 잘 살아갈 수 있겠죠."
발달장애인 가족 위한 '맘 편한 가게' 지도 제작
성아씨만 이런 소망을 가진 게 아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어우러진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제주의 발달장애인 부모가 힘을 합쳤다. 2021년 9월 설립된 '행복하게협동조합'은 한국자폐인사랑협회 제주지부 부모 모임에서 만나 다양한 지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조합은 제주시 소통협력센터와 협업해 '발달장애 가족이 맘 편한 가게 지도'를 만들었다. 이 지도에는 식당, 카페, 마트, 병원, 미용실 등 10개 분야 73개 가게 정보가 담겼다. 행복하게협동조합 김덕화 이사장은 더 많은 발달장애 가족이 지도를 공유한다면 훨씬 편안한 일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제주에 살거나 관광 온 발달장애 가족이 이 지도에 관심을 가질 때면 '굉장히 필요한 일을 했구나' 하는 보람을 느껴요. 저희는 이게 1단계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가게 정보를 업데이트하면서 업소가 발달장애 가족을 대할 때 매뉴얼이나 맞춤형 메뉴판 등도 제작해보려고 해요."
캠핑에 도전하는 '더 특별한 여름여행'
성아씨는 '맘 편한 가게 지도'를 통해 혼자 여행 계획을 세우는 부담을 덜게 됐다. 숙소 중에는 발달장애인 가족을 위한 캠핑 프로그램이 준비된 곳도 있다.
"아들이 씻거나 용변을 볼 때 예민해지기 때문에 화장실이 편안해야 해요. 그래서 캠핑은 꿈도 못 꿨는데, 이번에 도전해 보려고요. 제가 준비해야 할 게 더 많아지겠지만, 승빈이 좋아하는 자연 속에 종일 있을 수 있잖아요."
가족들은 지도 이곳저곳을 손으로 짚으며 가고 싶은 숙소를 고른다. 승빈네 가족에게 이번 여름여행은 '더 특별한 여름이었다'로 기억될 것만 같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김명근, 이예원, 정혜빈 기자도 함께 취재·작성했습니다. 시민언론 <민들레>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