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근무하는 학교에서 숨진 채 발견된 선생님, 그리고 제자에게 맞아 신체적, 정신적 상처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선생님. 먹먹하다. 가슴이 아프다는 말도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가장 안전하고 행복한 공간이어야 할 학교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된 것일까. 앞으로 어떤 일들을 겪게 될지, 두렵고 암담하다.
서초구 한 초등학교에서 발생한 교사 사망 사건이 공론화되자, 많은 이들이 분개하며 '교권 추락'을 개탄하고 있다. 교권이 바로 서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국가의 미래가 어둡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래서인지 최근 그 어느 때보다 교권 추락의 원인을 다양하게 진단하고 있다.
교사들에게 주어진 너무 많은 잡무, 코로나19로 인한 아이들 인성 교육 부족, 일부 교사들의 일탈행위로 인한 학교에 대한 불신 등 모두 교권 추락의 원인이다. 제발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진지한 성찰과 그에 따른 실천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보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것 같아서 걱정이다.
학생 인권과 교권은 대립항이 아니다
가장 걱정스러운 건, 나라의 교육을 책임지는 자리에 있는 몇몇 인사들이 교권 추락의 원인을 학생의 인권, 학생인권조례 등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 교육부 장관은 교사들에 대한 '아동학대처벌법 면책'을 추진하겠다고 하고, 경기도 교육감은 학생인권조례를 전면 개정하겠다고 한다. 최근 나온 조치들의 공통점은 아이들을 미성숙한 존재로 볼 뿐 아니라, 아이들의 인권을 제한해야 교권이 바로 선다는 공감하기 어려운 주장이 담겼다는 것이다. 그럼 벌주고 혼내는 '훈육'을 하자는 말인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학생의 인권과 교사의 교권을 대립항으로 보는 사람들이 교육을 책임지는 자리에 앉아 있다니, 학생의 인권도 교사의 교권도 바로 서기는커녕 더 망가질 것 같아 걱정스럽다.
선생님이 학생에게 맞은 것은 교사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아이를 혼자 감당하라고 놔둔 시스템 때문에 벌어진 일이지, 학생의 인권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더구나 학생의 인권, 아니 누구의 인권이든 인권은 어떤 이유로도 제한해선 안 된다. 또 학생의 인권과 교사의 교권은 어느 하나가 커지면 다른 하나가 작아지는, 서로 상충하거나 대립하는 관계가 결코 아니다.
궁극적으로 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사람답게 행복하게 사는 법'이다. '사람답게 행복하게 사는 법'이 '인권'이다. 그렇다면 학생의 인권은 교사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목적이자 내용이다. 그런데도 왜 그 '뛰어나신' 분들은 학생의 인권 존중이 교권 추락의 원인으로 보는 것일까?
혹시 교권의 회복보다는 국민의 분노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싶은 것은 아닌지, 그것도 아니라면 어른들의 통제에 순응하는 아이들이 모범생이라는 시대착오적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어느 쪽이든 한심하고 걱정스럽다.
'정글'에 홀로 던져진 선생님
사실 최근 벌어진 일련의 일들은 교단을 떠나는 교사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최근 추세를 봤을 때 어쩌면 예견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정년이 보장되고, 방학이 있어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교사들은 왜 교단을 떠날까? 답은 단순하다. 너무 힘들어서다. 너무 힘들어서 그 좋은 직장에서 버티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다. 그래서 교권 회복의 출발은 교사의 힘든 현실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체로 교사들은 아이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최소한 싫어하지는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교사가 되기 전부터 학교에 가면 아이들과 무엇을 하며 어떻게 보낼까 기쁘게 상상하며 꿈을 꾼다. 하지만 출근한 학교는 자신이 꿈꿔왔던 그런 학교가 아니다. 자신의 꿈이 헛된 것이었음을 알게 되는 데는 교직에 들어선 뒤 단 며칠밖에 걸리지 않는다.
학교보다는 병원에 있어야 하는 아이들, 자기 자식은 무조건 피해자이며 교사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학부모, 그런 학부모들의 기분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며 문제 발생을 교사의 무능력으로 돌리는 관리자, 그리고 민원의 전달자에 불과한 교육청, 교육 정책의 신뢰성을 떨어뜨리기에 바쁜 교육부 모두 제각각이다. 학생, 학부모와 함께하는 교육은 그저 꿈일 뿐이다. 현실의 학교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으며 혼자 살아남아야 하는 그야말로 '정글'이다. 교사는 이 '정글'에 혼자 던져진 것이다.
담임이 제일 힘들다
얼마 전 30여 년의 교직 생활 중 처음으로 비담임의 여유, 그리고 어쩔 수 없는 허전함을 즐기고 있던 나에게 한 선생님이 물었다.
"선생님, 선생님은 부장도 해보시고 담임도 해보셨잖아요? 뭐가 더 힘드셨어요?"
난 1초도 고민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담임이지."
"학생부장이나 교무부장이 더 힘드시지 않으셨어요?"
"물론 힘들었지. 학교폭력 담당 부장인 학생부장을 할 때는 일부 학부모들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어. 아무리 선의를 갖고 대해도 학교에 대한 불신, 피해의식,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학부모들의 감정 배설구가 될 때면 이걸 계속해야 하나 싶었던 적도 많았지. 내 자존감은 무너지고 문득문득 찾아오는 모멸감에 견디기 어려웠지. 정말 힘들었어. 하지만 그래도 학생부장은 안 보고 싶으면 안 봐도 되는 제삼자잖아. 그리고 관리자도 (나에게) 고생한다고 했지 내 능력 때문이라고 하지는 않았거든."
"하지만 담임은 학급에서 벌어지는 일만 책임지면 되지만 학생부장은 학교에서 벌어지는 모든 학교폭력을 처리하잖아요?"
"맞아. 일이 많기는 하지. 그래서 아무도 학생부장을 안 하려고 하잖아. 물론 나도 안 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학생부장은 담임처럼 책임지지는 않지? 학생부장은 아무리 일이 많고 힘들어도 퇴근하고 나면, 또 규정에 맞게 처리하고 나면 그걸로 해방이야. 나도 처음에는 안 그랬는데 하도 시달리다 보니 사무적으로 규정대로만 일 처리를 했지. 그러고 나니 숨통이 트였어.
난 교육이 아니라 일 처리를 한 거야. 하지만 담임은 그럴 수가 없잖아. 물러설 곳이 없어. 혼자 버티고 버텨야 해. 하소연이라도 하면 다른 반, 다른 선생님은 안 그러는데 왜 선생님 반만, 선생님만 왜 그러냐고 하거든... 선생님이 학부모의 폭력에 시달리는 것을 알면서도 화단의 나무의 이파리에만 관심을 두는 관리자에게 쪼이기도 하는 날이면 자신에 대한 회의와 모멸감이 밀려들기도 하거든."
"그렇지만 담임의 보람도 있잖아요?"
"맞아.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이 보내주는 응원과 믿음 때문에 담임선생님들이 버티는 거야. 하지만 일부, 아... 일부라고 하기엔 너무 많고, 너무 잔인한 그 일부 때문에 너무 견디기 힘들어. 선생님도 알겠지만 몇 년이 지나고도 그 상처는 치유되지 않아. 그래서 어느 정도 경력이 있으신 분들은 담임을 맡지 않으려고 갖은 노력을 하지. 그러다 보니 담임은 저 경력 교사나 기간제교사에게 떠맡겨지고 있는 게 현실이지. 그러다 보니 학부모들은 더 무시하고. 이대로 가다간..."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나 역시 비담임으로 빠지면서 힘없는 선생님을 '정글'로 몰아넣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웠다. 누가 누구를 욕한단 말인가?
교권의 추락은 분명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동안 학생의 폭력과 학부모의 폭력이 이슈가 될 때마다 교권보호위원회, 피해 교사에 대한 법적 절차 지원, 생활기록부 기재 등 수많은 대책이 쏟아졌다. 하지만 교실 그리고 교실 밖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담임, 선생님 혼자 책임져야 하는 것은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현장에선 문제 발생을 죄악시하고 그 해결을 사명감에만 기대고 있다. 혹여라도 해결을 못 할 시는 교직에 맞지 않는 교사로 낙인찍는 문화 역시 여전하다. 희망을 품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자신의 이름을 한 번 불러주는 것에 해맑게 웃는 아이들을 보며 오늘도 겨우 버티는 것이 지금 교단의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는 게 없지 싶다. 학부모의 이기심이 좋아질 것 같지도 않고, 맘카페를 두려워하는 관리자들에게서 소신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물론 교권의 추락을 학생 인권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을 가진 교육 당국에 대한 기대는 접은 지 오래되었다.
그렇다고 남 탓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더 비극적인 일이 벌어지기 전에 뭐라도 해야 한다. 많은 머뭇거림 끝에 난 나만 살려고 내빼지지 말고 그 '정글' 속으로 들어가자. 담임을 하자. 그리고 옆에서 힘들어 하는 선생님을 모른 척하지 말고 "선생님 잘못 아니에요. 선생님이니까 지금 버티시는 거예요. 그러니 자책하지 마세요"라고 위로해 주고 위로를 받자고 결심했다. 그것이 교권 회복을 기대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싶다. 나는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