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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증의 성인 발달장애인을 위한 대안학교의 특수교사로 11년째 근무하고 있습니다. 발달장애 학생들이 자립과 취업을 준비할 수 있도록 다양한 활동 및 수업을 합니다. 캠핑, 농사, 라이딩, 메타버스 등 여러 가지 도전을 하다 드디어 해외 자유여행까지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미디어에 자주 비치는 중증의 장애인들과 또다른 발달장애인들을 보며 장애에 대한 인식을 넓히고, 비슷한 어려움을 가진 사람들에게 힘이 되길 바라며 글을 씁니다. [기자말]
일본 오사카에서의 마지막 아침은 분주했다. 짐은 매일 밤 정리를 했지만 잠옷, 세면도구, 충전기 등을 아침까지 사용한 물건들을 마저 챙기고 분실물이 없도록 꼼꼼하게 확인해야 했다. 

용돈도 최종 점검을 했다. 지속적으로 교육한 덕분인지 용돈이 부족한 아이는 없었다. 하지만 해외여행에서 현금은 많이 남는 것도 골치 아팠다. 

그래서 외화 충전식 선불카드인 트래블월렛 카드를 만들고 번거로워도 소액씩 출금을 한 것인데, 그렇게 애쓴 보람이 있었다. 대부분 남은 현금이 많지 않아서 한 끼 식사나 간식 정도를 사면 다 소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지막날이니 현금을 우선적으로 사용해 소비하도록 당부했다.

카드에 남은 돈은 '환불하기' 버튼 하나면 원화로 다시 환전할 수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실제로 아이들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일본을 떠나자마자 잽싸게 환불까지 완료했다. 
 
 트래블월렛 카드로 출금하기
트래블월렛 카드로 출금하기 ⓒ 권유정
 
충전이 너무 쉬운 나머지 귀국 후에도 틈틈이 환전을 시도해, 부모님이 카드가 남에게 복사된 줄 알고 놀라 연락을 해 오는 우스운 일도 있었다. 통장에서 트래블월렛 이름으로 자꾸 돈이 빠져나간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나도 깜짝 놀라 카드활성화를 off로 바꿀 것과 충전된 엔화를 전부 환불할 것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환불은 진작 다 했다는 것이 아닌가. 

무언가 이상했다. 트래블월렛 카드는 충전하지 않으면 원화 계좌에서 곧장 결제가 되지 않는다. 충전한 만큼만 사용할 수 있어 무분별한 결제에 대한 염려 없이 만들어온 것인데… 아니나 다를까 원화 계좌에서 빠져나간 금액은 트래블월렛 계좌에 고스란히 충전되어 있었다. 

처음 해보는 경험이라 재미있었는지, 자신도 할 수 있다는 뿌듯함에서였는지 여행 중에도 자꾸 충전을 하더니 여행이 끝난 후에도 계속했던 것이다. 다행히 바로 환불할 수 있어 큰 손해 없이 끝이 난 귀여운 소동이었다.

오사카 최대 수족관을 가다 

아침식사를 하는 중에 창밖으로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단체복을 입고 무리 지어 가는 모습이 보였다. 하나 둘 보이던 단체가 꽤 여럿이 되었을 무렵, 문득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저들의 목적지가 우리와 같을지도 모른다는. 
 
 가이유칸 티켓. 입장시간이 정해져 있으니 기다리기 싫다면 미리 티켓을 끊어야 한다.
가이유칸 티켓. 입장시간이 정해져 있으니 기다리기 싫다면 미리 티켓을 끊어야 한다. ⓒ 권유정
 
우리의 마지막 일정은 가이유칸 수족관이었다. 아이들이 아쿠아리움을 좋아해서 이기도 하고, 가이유칸은 숙소에서 도보 5분 거리로 가까웠기 때문이다.

4박 5일을 꽉 채울 수 있도록 귀국일 오후 4시 비행기를 끊다 보니 마지막날 짐을 들고 돌아다녀야 하는 일정이 걱정이었는데, 가이유칸은 물품보관소가 있었고, 또 바로 옆에서 간사이공항으로 가는 리무진을 탈 수 있었다.

앞선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우리가 가이유칸에 도착했을 때는 매표소 앞에 늘어선 줄이 한가득이었다. 

가이유칸은 할인 여부를 알 수 없어 예매를 하지 않았다. 홈페이지에는 장애인 할인과 학교 단체 할인이 모두 안내되어 있었지만 우리에게도 적용되는지 장담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할인이 가능하면 받아보고자 현장 티켓팅을 시도했는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냥 예매를 하고 갈 걸 그랬다. 장애인 할인은 일본인이 아니어서, 단체 할인은 성인이어서 적용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게다가 티켓을 끊고 보니 그것도 시간대별로 입장인원이 제한되어 있어, 우리의 입장시간은 무려 50분 뒤였다. 미리 알았더라면 먼저 일찍 와서 티켓을 끊었을 텐데 싶었으나 이미 늦은 걸 어쩌겠나. 

원래는 근처에서 점심식사까지 마치고 공항으로 이동할 계획이었는데, 계산을 해보니 시간이 촉박했다. 그래서 관람 후 우선 공항으로 이동하여 탑승수속을 하고 식사를 해결하는 것으로 급하게 일정을 변경했다.

입장시간을 기다리며 1층 스타벅스와 기념품 가게를 구경했다. 점심은 관광입장료를 절감한 비용으로 지원해 주기로 했기 때문에 아이들은 마음껏 용돈을 탕진했다. 그래봤자 남은 돈을 사용하는 거라 탕진이라고까지 부르긴 어렵지만, 내내 아껴 쓰길 강조하다 잔소리를 하지 않은 유일한 시간이었다.

새삼 트래블월렛 카드를 만들어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 것이, 남은 현금을 사용하기 시작하자 혼자서 계산할 수 있는 아이들이 몇 없었다. 지적장애를 지닌 아이들은 대부분 수 개념이 취약한 데다, 돈 계산이 가능한 아이들도 낯선 엔화를 계산하려니 도움이 필요했다. 심지어 엔화는 동전이 많아서 더 어려웠다. 

계산대에 교사들이 붙어 서서 잔돈을 소모할 수 있도록 일일이 세고 확인해 준 끝에 다들 무사히 결제를 할 수 있었다.

캐리어를 정리하고 음료와 기념품을 사는 사이에 금방 입장시간이 되었다. 가이유칸은 일본 내 3위권에 드는 오사카 최대 수족관으로, 고래상어가 유명하다. 회랑 형태의 통로를 따라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며 펭귄, 고래, 가오리, 해파리 등 다양한 해양생물을 만났다.
 
 가이유칸의 상징, 고래상어
가이유칸의 상징, 고래상어 ⓒ 권유정
 
개인적으로 동물원이나 아쿠아리움 등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데다 기대보다 작은 규모에 다소 실망스러웠으나, 연신 신기해하며 열심히 사진과 영상을 찍는 아이들을 보자 그런 마음은 한 편으로 밀려났다. 아이들이 행복해하면 많은 것들이 대개 괜찮아진다. 

아쿠아리움을 좋아한다던 한 아이는 길고 어려운 이름들을 줄줄이 외워댔다. 나는 글을 쓰려고 다시 떠올려봐도 기억나지 않는 이름들을 헷갈리지도 않고 외우는 걸 보면 참 신기하다. 

지난 3년을 보면서도 몰랐던 능력을 여기서 새롭게 알게 되는 것도 재미있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는 모르던 모습들을, 다양한 행사와 활동들을 하다 보면 알게 된다. 앞으로 더 넓은 세상과 마주하게 될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것들을 고민하고 교육하기 위해서는 보다 다양한 경험들이 필요하다. 

끝까지 험난했던 여정

가이유칸 관람을 끝내니 낮 12시 30분 무렵이었고, 마침 12시 53분에 간사이공항으로 가는 리무진 버스가 있었다.
 
 덴포잔에서 간사이공항으로 가는 리무진 정류장
덴포잔에서 간사이공항으로 가는 리무진 정류장 ⓒ 권유정

공항 리무진은 실물 티켓은 왕복으로 구매를 해왔기 때문에 따로 발권을 하지 않아도 됐다. 

다만 이번에는 캐리어마다 번호표를 부착하고 꼬리표를 떼어줬는데, 첫날 탑승권을 잃어버린 경험을 떠올리며 일괄 걷어서 보관했더니 내려서 짐을 찾을 때 일일이 번호를 대조해서 주는 바람에 애를 먹었다.

다른 탑승객들이 다 떠나가고 우리 일행과 짐 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번호를 확인하지 않고는 짐을 내주지 않던 완고한 직원들 덕분에 순서 없이 섞인 스물네 개의 짐과 번호를 맞추느라 한참이 걸렸다. 그냥 각자에게 나눠줄 걸 그랬다 싶다가도, 이번에 표를 잃어버렸다간 짐을 못 찾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항으로 오는 틈새에 한국 검역절차인 Q코드도 입력했다. 세관신고서는 5월 1일부터 규정이 변경되어 신고할 물품이 없으면 작성하지 않아도 됐다. 우리에겐 너무나 다행인 일이었다.

여행을 준비하며 여러 번 서류를 작성해 본 아이들에게 Q코드는 그리 어렵지 않은 절차였다. 링크를 보내주자 입력부터 다운로드까지 착착 해냈다. 혼자 입력이 어려운 아이들은 대신 입력하고 QR코드 사진을 저장하게 했다. 

"교수님, 해외여행은 해야 할 게 많네요."

어떤 아이는 이렇게 말하며 한숨을 푹 쉬기도 했지만, 그건 어렵다는 투정보다도 그럼에도 자신이 스스로 해냈다는 자부심의 발현이었다.

우리가 여행을 떠난 이유

여행은 끝의 끝까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한 아이는 인천공항에서 귀국 편에 맞추어 예매한 공항버스 두 대를 몽땅 취소하는 바람에 2시간 반을 기다렸다 다음 버스를 타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비행시간이 지연되어 놓칠까 봐 시간대별로 두 대를 예매한 건데, 하나만 취소해야 하는 걸 실수로 모두 취소했고, 당황한 사이 티켓이 모두 매진되어 버린 것이다. 울상이 되어 나타난 아이와 다시 티켓을 끊으며 다독였다.

"괜찮아, 실수할 수도 있어. 그다음 표를 끊으면 돼. 그리고 오늘의 경험을 잘 기억했다가 같은 실수를 또 하지 않도록 더 조심하면 되는 거야."

순탄하기만 한 여행도, 순탄하기만 한 인생도 없다. 문제에 부딪혀야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배운다. 해결 못할 것이 두려워 문제를 피하면 성장하지 못한다. 

우리의 목표는 아이들에게 실패하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실패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다. 여행은 완벽하지 않았으나 충분히 멋지고 성공적이었다.

"어때? 다음에는 너희들끼리 올 수 있을 것 같아?"

여행을 마치며 지도도, 번역기도, 배운 대로 제법 능숙하게 사용하던 아이들에게 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아이는 이내 자신 있게 말했다.

"숙소만 구하면,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도 여행 전에는 반신반의하며 그저 희망으로만 남겨두었던 바람인데, 실제 여행을 하고 나니 몇몇 아이들은 정말 가능할 것 같았다. 낯선 곳을 혼자 탐색하고 여행하기는 어렵겠지만 오사카를 다시 오는 거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취업하면 월급 모아서 꼭 다시 도전해 봐."
"그럴게요."


시원시원하게 답하는 아이의 눈은 여느 때보다 생기발랄했다. 조기취업을 하고 3년 여를 8시간씩 근무하다 자진퇴사를 하고, 최근 학교에 다시 편입을 한 아이였다. 취업 초기의 의욕을 잃고 직장생활에 지쳐 돌아온 아이에게, 오사카 여행은 다시금 취업에 대한 동기부여가 된 듯했다. 

삶이 즐겁고 행복해야 살아갈 의미도, 일을 할 의욕도 생긴다. 긴 인생에서 4박 5일은 지극히 짧은 시간일 테지만, 이 여행의 기억이 아주 오래도록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채워주기를 소망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브런치(brunch.co.kr/@h-teacher)에도 게재할 예정입니다. 여행 준비부터 실전까지 영상은 유튜브 '일본 자유여행 도전기(https://youtu.be/wktZL__3-GE)'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발달장애#해외여행#자유여행#오사카#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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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증의 성인 발달장애인을 위한 대안학교의 특수교사로 13년째 근무하고 있습니다. 자립을 꿈꾸며 열심히 삶을 준비하는 발달장애인들을 보며 장애에 대한 인식을 넓히고, 비슷한 어려움을 가진 사람들에게 힘이 되길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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