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998년 경제 위기 이후 한국 사회에서 비정규 노동자는 해마다 증가했다. 비정규 노동자의 급속한 증가는 노동시장을 분단시키고, 노동 빈곤층을 양산했다. 그 결과 사회적 양극화는 가속화되었다. 비정규 노동 개혁 과제는 여전히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비정규 노동 문제는 노동에 국한된 의제가 아니라 인권의 문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비정규 노동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노동 있는' 민주주의 사회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이 글은 아카이브의 중립성을 부정하고, 비정규 노동자의 당파성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우리 사회, 그리고 아카이브가 비정규 노동자의 기록을 적극적으로 기록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 비정규 노동 수기에 주목하는가?

첫째, 비정규 노동 수기는 적나라한 노동 현실을 폭로하고 있으며, 그것을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현장의 절박함과 진실성을 담고" 있으며, "노동자 현실을 당사자 시각으로 정직하고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또한 우리 사회 곳곳에서 분투하고 있는 비정규 노동자들의 아픔과 고단함, 절망하지 않고 꿋꿋이 살아가는 힘과 희망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비정규 노동 수기는 현재의 노동자 문화를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되는 노동자들이 직접 생산한 노동 주체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둘째, 기록 측면에서 비정규 노동 수기는 자기 증언 기록ego-document이고, 일상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기록이면서, 공론장에 참여하여 발화된 공동체 기록이며, 사회와의 관계에서 생산된 '사회 기록'이다. 요컨대 비정규 노동 수기에는 개인의 고단한 삶뿐만 아니라 현재 노동자의 존재를 규정짓고 있는 우리 사회의 다층적 모순 관계가 드러나 있다.

셋째, "사회적 기억에서 소외되고, 배제되고, 누락되었던 기억을 소환하고 기록화" 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자기 재현 기록인 노동 수기, 곧 실제 기록에 기초한 기록화 주제의 선별을 통해 노동자들이 발화한 노동 현실을 드러내고자 한다.

비정규 노동 수기는 아카이브가 담아야 할 기록이 무엇인지를 증거하고 있다. 아카이브는 그 기록의 가치에 주목해야 한다. 또한 "기록하는 일이 저항의 한 방식"이라는 주장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 사회가 무엇을 기록으로 남길 것인지에 대한 실마리를 찾고자 한다. 이 글은 비정규 노동 문제와 관련된 사건과 행위를 발견하기 위해 한국비정규노동센터에서 발간하는 잡지 <비정규노동>에 주목하였다.

기록되지 않은 노동, 그리고 아카이브

아카이브는 '지금, 여기, 우리'의 기록과 기억을 남겨야 한다. 아카이브는 "사람의 흔적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기록을 기록화해야 한다. 곧 사람의 감정과 의식이 재현되어 있는 기록이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 공공아카이브에 소장된 기록은 행정 행위의 결과를 반영하고 있을 뿐이다.

첫째, 비정규 노동은 기록되지 않는다. 공공기록 가운데 비정규 노동을 증거하는 기록은 법률기록, 통계기록 등에서 주로 남겨진다. 그러나 자본에 편향된 노동 정책을 드러내는 기록, 잘못된 법령 운영으로 삶의 조건이 달라지는 비정규 노동자의 기록, 비정규 노동 문제에서 자주 언급되는 기업의 불법 노동행위 기록은 남겨지지 않는다.

둘째, 아카이브는 비정규 노동을 기록화하지 않는다. 현재사를 구성하는 핵심 의제 가운데 하나는 노동 문제이며, 노동 문제는 곧 비정규 노동 문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카이브는 거시사를 구성하는 노동 기록 일부를 파편적으로 저장하고 있을 뿐이다. 거시사를 서술하는 데에만 일부 도움이 되는 기록으로 아카이브는 오늘의 시대를 기록으로 증거했다 할 수 있을까?

따라서 '지금, 여기, 우리'의 아카이브는 노동 기록의 부재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삶의 흔적을 기록화해야 한다. 곧 비정규 노동자의 행위와 고통을 기록으로 재현하는 일, 이를 바탕으로 자본주의의 억압적 구조를 밝히는 작업은 당대 아카이브의 책무이다. 노동 수기 등 비정규 노동자의 삶을 표상하는 기록이 현재사를 상징하는 기록의 핵심이 되어야 하며, 아카이브는 이를 기록화해야 한다. 또한 아카이브는 중립성의 환상을 폐기해야 한다.

자기 재현의 비정규 노동 수기가 말하는 것들

비정규 노동 수기는 보이지 않는 노동 실태를 증거하고, 적극적으로 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록으로서 그 가치가 있다. 비정규 노동 수기에서 주목할 점은 비정규 노동자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이다. 곧 어떤 기억, 어떤 사건과 행위를 남기고 있는가를 발견하는 것이다.

첫째, 다양한 노동 형태는 비정규 노동의 '차이'를 말하고 있다. 통계청은 정규직을 근로 형태별로 한시적 근로자, 비전형 근로자, 시간제 근로자로 분류하고 있다. 그러나 비정규 노동 형태는 이보다 훨씬 복잡하다. 기간제, 임시직, 계약직, 촉탁직, 파트타이머, 아르바이트 등으로 불리는 노동자들인 직접고용 비정규직, 고용계약이 이중으로 돼 있어서 자신을 고용한 회사와 일하는 회사가 다른 노동자들인 간접고용 비정규직. 이들은 파견직, 사내하청, 외주용역 등이다.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특수고용직 노동자들로 화물운송 기사, 학습지 교사, 방송작가 등을 들 수 있다. 잡지 <비정규노동>에 수록된 노동 수기는 비정규 노동자의 다양한 노동 형태를 보여준다. 곧 "비정규직은 천차만별이어서 직종마다 노동 현실과 조건이 다르며, 같은 직종이라도 각각의 개인이 처한 현실과 조건 또한 다르다. 이러한 직종 간, 개인 간의 차이가 바로 내 수기의 개성이자 정체성(김하경, 수기는 감동과 위로다, <비정규노동> 134호, 2019.1, 79쪽)"이라는 언급은 비정규 노동 수기의 특징을 드러낸다.

비정규 노동 수기를 남긴 사람들은 여성 노동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는 여성 노동자가 다수를 차지하는 비정규 노동의 특징과 관련이 있다. 여성 비정규 노동 또한 이질적이다. 이러한 '차이'는 비정규 노동이 행해지는 장소가 사회 곳곳으로 확대되었음을 알려준다. 노동 수기에 드러난 장소는 국회·노동청·노동청 고용센터 등 공공기관, 학교, 성당, 병원, 백화점, 케이블 방송사, 지역 방송국, 학습지 회사, 제약회사, 마트, 자동차 판매 대리점, 패스트푸드점, 카페 등 매우 다양하다. 요컨대 비정규 노동 수기는 결코 동질적이지 않은 비정규 노동의 '차이'를 말하고 있다.

둘째, 비정규 노동 수기는 여러 형태의 '차별'을 말하고 있다. 비정규 노동자에게 가해지는 차별 가운데 가장 핵심은 임금 차별이다. 비정규직은 정규직에 비해 현저히 낮은 임금을 받는다. 수당 또한 차별한다. 여기에 사용주의 차별과 정규직 노동자로부터의 차별도 있다. 작업 현장에서 느껴지는 갑질·폭력·폭언·멸시·조롱·모욕·무시 등의 인격 차별이다. 작업 현장에서는 욕설과 폭언이 비정규 노동자들에게 가해진다. 곧 비정규 노동 수기는 비정규 노동의 "감춰진 충격적 현실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다. 마침내 '차별'은 사회적으로 일상화되고, 또 내면화되었다고 노동 수기는 말하고 있다.

셋째, 비정규 노동자 일상생활의 팍팍함을 날 것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통장 잔액이 어김없이 세자릿수를 가리킨다. 부모님께 손을 벌린 지 얼마나 지났다고 또 이러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하나 사 먹을 돈도 이젠 없다. 냉장고는 텅텅 빈 지 오래다. 주머니에 남은 몇백 원, 가방 구석에 숨어 있던 몇백 원을 모아 마트에서 천 원짜리 콩나물을 사 왔다. 팔팔 끓인 물에 콩나물을 넣고 소금을 뿌리고, 냉동고에 묵혀뒀던 청양고추도 꺼내 잔뜩 넣었다. 그래야 국 한 숟갈에 밥이라도 잔뜩 먹을 수 있을 테니(이가현, 나도 '노동자'입니다, <비정규노동> 116호, 2016.1, 56쪽)."

넷째, 비정규 노동 수기는 '개인에서 조직으로' 문제의식을 발전시키고 있다. 곧 노동조합의 중요성, 노동자 투쟁에 대해 말하고 있다.

다섯째, 비정규 노동 수기는 노동자들의 내면과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어느 인터넷 설치 노동자는 자신을 "기업의 부품"으로 이야기하고, 또 다른 노동자들은 억울함을 토로하고, 자존감의 상실을 얘기한다. 요컨대 비정규 노동 수기는 비정규 노동 실태를 낱낱이 말하고 있으며, 비정규 노동자의 삶을 증언하고 있다.

무엇을 기록화할 것인가?

첫째, 비정규 노동자들의 기록과 기억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기록하는 것이 곧 비틀린 현실에 저항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둘째, 비정규 노동자들의 생생한 삶의 흔적을 기록화해야 한다. 조직·단체에서 생산되는 기록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 자체를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곧 역사이기 때문이다. "호명되지 않은 많은 노동자의 개인사를 복기하려는 시도"를 지금 시작해야 한다. 

비정규 노동자의 삶의 '흔적'을 기록화하기 위해서는 공공기록뿐만 아니라 공동체와 개인의 기억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나아가 비정규 노동자 내면의 감정과 생활까지도 기록화의 범주로 포함해야 한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지금 시대의 '살아 있는' 기록을 미래의 '살아 있는' 아카이브에서 대면하게 될 것이다.

셋째, 비정규 노동자의 노동수기가 말하고 있는 '차이'와 '차별', 작업 현장에 대한 '폭로'를 기록화해야 한다.

넷째, 비정규 노동의 기록화 대상은 문서에 국한되지 않는다. 비정규 노동자들의 삶을 재현하는 매체는 매우 다양하고 폭넓다. 곧 "시, 소설, 문학, 다큐멘터리, 수기, 르포, 연극, 타령, 춤, 굿, 신세타령, 그림 등 문자"로 표현되지 않는 것들이다. 또한 "트라우마를 지닌 이들은 자신의 행위 의도를 초과하는 감정과 경험을 흐느낌이나 울음, 떨림 등 소리 언어와 비언어적 표현"으로도 드러낸다(김원, 서발턴의 재림–2000년대 르포에 나타난 99%의 현실, <실천문학> 2012.1, 204~206쪽). 따라서 비정규 노동을 말하고 있는 다양한 매체를 기록화의 범주로 설정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아카이브는 현재를 기록하는 장소여야 한다. 현재의 기록이 없으면 미래에도 기록이 없는 아카이브가 지속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통계로부터 자기 재현의 기록으로, 거시에서 미시로, 국가에서 일상으로 아카이브가 자기 철학을 정립해 가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 시대 아카이브와 아키비스트에게 주어진 시대적 책무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곽건홍 한남대 교수가 쓴 글이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에서 발행하는 격월간 <비정규노동> 7,8월호 특집 꼭지에도 실렸다.


#노동#노동자#비정규직#기록
댓글

한국비정규노동센터는 비정규 노동 문제를 해결하고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활동하고 있는 비영리 노동시민사회단체입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한국에서 살아가고 싶기에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