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이 화두이다. 누구나 '워라밸'을 꿈꾸지만 현실은 번아웃에 지친 영혼들로 가득하다. 지치고 팍팍한 업무를 견딤과 동시에 지속가능한 일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내가 좋아하는 것에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덕질은 취미보다는 한층 더 강한 느낌을 준다. 취미는 바쁘거나 지겹다는 이유로 시들해지기도 하지만 덕질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대상을 향한 마음이 '찐'이라는 점, 힘든 여건에서도 어떻게든 연결의 끈을 놓지 않는다는 점에서 덕질은 취미보다 끈적하고 견고하며, 밀도가 높은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취직을 해서 일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다양한 취미를 갖고 있었다. 농구와 등산을 좋아했고, 노래와 악기연주(피아노, 기타)를 즐겼다. 고등학교 1학년때 스타크래프트를 처음 접하게 되면서, 교실이 아닌 PC방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갔다.
지금껏 내가 살아온 삶은 하고 싶은 것보다는 해야 하는 일들로 가득했다. 퇴근 이후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어야 2시간이었다. 집으로 오면 새로운 무언가를 하는 것보다 쉬는 것에 익숙해져 갔다.
하루 중 회사와 일을 제외하면 남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 와중에 꾸준히 자기 계발을 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게 현실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주변에서 직장을 잃는 사람들 얘기도 넘쳐났다.
쓰는 것에 진심인 사람들
그런 와중 우연히 글 쓰는 플랫폼을 새롭게 알게 되면서 작년부터 글쓰기를 취미로 하고 있다. 거창한 것은 아니고 내 일상을 끼적이는 정도이지만, 꾸준히 쓰다 보니 글쓰기는 어느덧 내 삶의 일부로 당당하게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독서가 작가의 정서와 느낌,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받는 형태라면 글쓰기는 내 생각을 나만의 언어로 직접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책을 읽는 것과는 다른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접근성도 우수하다. 종이와 펜만 있으면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으니까. 대부분의 글쓰기 플랫폼은 모바일 환경에 최적화되어 있기 때문에 핸드폰만 있다면 언제 어디서든 끼적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글쓰기의 최대 장점은 '사유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넘치는 정보 속에서 내일을 예측하지 못한 채 선택이 강요되는 삶을 살아간다. 이런 환경에서 글쓰기는 내 생각과 관점을 환기시켜 준다.
글쓰기는 남들과 내가 똑같은 삶을 살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무엇이 내가 원하는 삶인지 고민하고 의심하며 사유하게 만든다. 소소한 일상, 생각과 시선을 공유하는 수 백개의 글을 쓰면서 나는 단순히 혈액형과 MBTI의 한 줄기로 구분되는 집단이 아닌, 지구상에 하나밖에 없는 독립적인 개체가 될 수 있었다.
형식적인 글쓰기가 아니라, 삶과 마음을 담은 글을 쓰면서 나는 많은 변화를 느낀다. 살면서 진심으로 좋아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팍팍한 현실의 무게를 견디는 데 많은 위로가 된다. 덕질의 농도가 짙어질수록, 나만의 생각과 시선이 다듬어지고 정교해지는 것은 덤이다.
'공개적인 글쓰기'의 장점은 또 있다. 혼자만 읽는 일기가 아닌, 모든 사람에게 오픈되는 글이기 때문에 하나를 쓰더라도 허투루 쓰지 않고 정성을 들여 쓰게 된다. 이 과정에서 필력이 조금씩 향상되는 것 같다. 때로는 내 글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서 힘을 얻기도 한다.
글쓰기 덕후가 되면서 얻은 소소한(?) 부작용들도 있다. 일상에 관한 글을 주로 쓰다 보니 '소재거리 찾기'에 항상 혈안이 되어 있다. 딱히 관심이 없던 것들도 예의주시하면서 나만의 시선으로 재밌고 의미 있게 표현할 수는 없는지 늘 고민하는 습관이 생긴 것이다.
가벼운 일기를 쓰는 것과는 달리,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하는 글의 경우에는 글 하나에 일주일이 넘는 시간이 소요되기도 한다. 현재는 육아휴직으로 시간적인 여유가 있지만, 다시 복직해 일을 하며 분주한 삶을 살게 되었을 때엔 지금과 같은 시간과 열정을 들여 쓸 수 있을지가 걱정이 될 때도 있다.
가끔 글을 쓰면서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거나 집중이 안 될 때는 답답함을 느낀다. 수 천자를 쓰던 글 전체를 삭제하고 다시 처음부터 쓸 때에는, 글뿐만이 아니라 거기 쏟았던 내 열정과 에너지가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물 흐르듯 하면서도 탄탄한, 읽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고수들의 글을 읽을 때면 한없이 위축되기도 한다.
작가 은유는 저서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에서 자신이 글을 쓸 때 초고와 퇴고의 비율이 4:6 정도라고 했다. 4시간 정도를 들여 초고를 쓴다면 퇴고하는데 6시간을 할애하는 것. 퇴고를 마치고 글을 발행하는 시점은 '작성한 글을 너무 많이 읽어서 토할 것 같을 때' 혹은 '이제는 더 이상 글을 읽을 기력이 조금도 존재하지 않을 때'라고 한다.
얼마 전에 있었던 시민기자 모임에서도 비슷한 말을 들었다. "언제까지 퇴고해야 하나요?"라는 질문에 누군가가 "내 마음에 들 때까지요"라는 답을 한 것. 이 말은 내게는 '한 달이 지나도, 내 마음에 안 들면 마무리하지 않습니다'라는 의미로 들렸다. 자신의 글에 대해 한 치의 빈틈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굳게 느껴졌다.
최저시급 대비 아쉬운 일? 덕후들은 다릅니다
'쓰는 것에 진심'인 사람들을 보면서 글쓰기에 대한 열정이 잠시나마 흔들렸던 나를 반성했다. '글쓰기 덕후'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어떤 환경에서도 적당히 타협하거나 대충 쓰는 법이 없었다. 그들은 수십 번 글을 다듬고 고치면서, 말이 아닌 행동으로 글쓰기에 대한 태도와 마음가짐을 확고히 했다.
단어와 단어가 모여 하나의 문장이 되고 그것들이 얽히고 설켜 하나의 글로 완성되는 과정은 결코 쉽지는 않다. 경제적인 관점에서 생각해 보았을 때 글쓰기의 금전적인 가치는 올해 최저시급인 9620원에 한참 못 미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덕후들에게 그런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쓴다는 것, 즉 쓰는 행위를 통해 나를 알아가고 내 삶을 채워나가는 기쁨을 느끼는 것이지 않을까.
하나의 글을 완성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압박을 받지만, 그 사이 쌓여가는 글감을 보며 다음 글을 쓸 생각에 설레기도 한다. 치열하게 일을 하는 와중에도 사유하고 쓰는 것을 놓지 않는다면, 당연히 지금보다는 더 성장하는 삶이 되지 않을까.
차고 넘치는 소재들을 모두 다 써내는 그날까지, 글쓰기에 여전히 진심일 나와 시민기자들의 삶을 응원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노트북을 연다. 오늘은 또 어떤 글을 써 볼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제 블로그와 브런치에 실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