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젊은 초등교사가 자신이 매일 학생을 가르치던 학교에서 스스로 유명을 달리했다. 필자의 교사 지인들이 쓴 페이스북의 글, 언론 보도, 교사 지인들과의 대화, 수천 명이 모였다는 합동 영결식에서 나온 교사들의 반응을 필자는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학교나 교육청의 제도적 지원 없이 교사들만의 힘으로 과도한 민원을 처리하느라 학생의 학습권이 침해되고, 교사들이 심각한 정신적, 신체적 피해를 겪어왔지만, 여전히 교사 혼자만의 힘으로 악성 민원을 응대해야 하는 현실을 교사들이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 공립학교 교사로 17년을 근무하다 미국의 학교들을 경험하고 지금은 미국 한 주립대학의 교육리더십학과에서 가르치고 있는 필자는, 학부모 민원 해결 과정에 '교장이 보이지 않음'을 문제의 원인 중 하나로 진단하고, 제반 행정업무 및 학부모 민원 처리에서 교장과 교감의 실무 참여를 대폭 강화하도록 제도 및 관련 법령을 개정할 것을 해법으로 제안한다.
한국의 한 교사가 학부모의 민원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언론 보도의 내용을 미국 공립학교의 교감으로 일하는 필자의 지인에게 들려주었다. 그리고 비슷한 일이 그 교감이 근무하는 미국의 학교에서 일어났다면 학교는 어떻게 반응했을지 물었다. 학생 상호 간 폭력, 교사에 대한 학생의 폭행 및 폭언 그리고 학부모의 도를 넘는 민원은 미국의 학교도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다만 대처 방법에는 차이가 있었다.
교장에게 보고하면 끝
미국의 학교에서 초등학생이 다른 학생의 팔에 연필로 상처를 냈다고 가정하자. 교실에서 이를 목격한 교사의 임무는 일어난 일을 정확하게 교장에게 보고하는 걸로 끝난다. 신속한 보고를 위해 교사들과 교장은 무전기를 휴대한다. 보고를 받은 교장은 현장에 도착하여 가해 학생을 곧바로 교장실로 데려간다. 이 자리에는 사회복지사, 상담사, 교감이 배석하고, 교장은 자신이 보고 받은 일이 사실인지 가해 학생에게 확인하고 다른 학생에게 상해를 입힌 일이 얼마나 중대한 잘못인지 인식시킨다.
학생은 교칙에 의거 수일간 정학에 처해지고, 곧바로 하교 조처된다. 교장은 가해 학생의 학부모를 소환한다. 학생과의 만남과 마찬가지로 교감, 상담사, 사회복지사 등 관련 전문가들이 동석하여, 일어난 일을 학부모에게 상세히 알리고, 학생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유를 알아내고자 애쓰고, 학생이 가정에서도 유사한 폭력성을 보였는지, 다른 문제 행동은 없었는지 학부모의 의견을 청취하고, 학교의 지도 방침 및 추후 지도 방향을 전달한다.
학교와 학부모 사이에 오간 모든 대화는 꼼꼼히 기록하여 추후 있을지 모를 민원이나 송사에 대비한다. 필요에 따라 상담사 또는 사회복지사는 상담 등 지역사회 안에 학생과 학부모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들을 안내하고 학교가 추천한 도움을 학생이 받고 있는지, 학교가 더 필요한 도움을 제공할 수 있는지 추후 확인 작업을 한다.
학교 폭력 및 민원 처리 과정에서 주목할 사실은, 학부모의 정당한 민원 제기에 교장은 합당한 대응을 하되, 반복적이고 도를 넘는 학부모의 민원 제기는 허래스먼트 (harassment, 괴롭힘)로 규정하고 단호히 대처한다는 점이다. 배닝(banning, 학교 접근 금지) 조치가 대표적이다. 배닝 조치가 내려진 학부모는 학교의 건물에 접근할 수 없다. 더불어, 교사의 핸드폰 번호는 어떤 경우에도 학부모와 공유되지 않는다는 점 또한 카톡 등을 통해 24시간 민원에 시달리는 우리나라 교사의 경우와 차이가 있다.
교육청과 교원노조 간의 협약에 의거, 학부모는 업무 시간 외에 교사에게 연락할 수 없도록 함으로써 교사의 사생활을 존중한다는 것 또한 차이가 난다. 이를 어기고 학부모가 교사에게 업무시간 외에 지속적이고 교사가 원치 않는 방식으로 접촉할 경우 교사는 이를 교원노조에 신고하고, 교원노조 소속 변호사는 교장과 교육감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적절한 조치를 요구한다.
대개의 미국 학교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한 가지 분명한 원칙은, 학부모의 민원을 받은 교사가 직접 학부모와 접촉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교사의 임무는 학부모 민원의 내용을 교장에게 전달하는 것이며, 학부모와의 대화, 나아가 법적인 사무는 교장의 업무라는 것이다.
더불어, 교사가 학부모의 민원 때문에 겪는 어려움에 대해 말하고 싶으면, 교장이 나선다. 교장이 동료 교사 그룹과의 대화를 주선하거나 교장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교사가 겪는 어려움을 청취하고 학교와 교육청 차원에서 도울 방법이 있는지 찾는다. 간단히 말해, 괴롭힘에 가까운 학부모의 과도한 민원을 교사 혼자 짊어지게 하는 일은 없다는 점이다.
건축설계 등 리모델링까지 교사 업무
모두가 부러워하는 임용 시험을 통과한 대한민국 교사들이 겪는 실상은 밖에서 보는 것과 달리 살인적인 행정 업무량과 학부모 민원에 학교폭력 처리까지 도맡느라 녹록지 않다. 맡은 행정업무가 뭐냐고 미국 교사들에게 물으면 대개 의아해한다. 행정업무는 교장, 교감 또는 담당 업무를 맡은 직원들의 몫이지 교사인 자신은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한국의 교사는 다르다. 급식비 수납 독촉, 교육행정정보 시스템 관리, 업무포털 예산안 입력, 체험학습 안내 학부모 문자 발송, 학부모 민원 상대, 영문 재학증명서 번역, 학적부 관리, 동창회 업무, 전·출입 업무, 학교폭력 건수 발생 현황 교육청 보고, 국회 요구자료 제출 등이 모두 교사의 업무이다.
국회 국정감사가 다가오면 국회의원 요구자료 요청이 쏟아진다. 이들 요구의 특징은 서너 시간 안에 관련 현황을 파악하여 공문서로 제출하라는 것인데, 해당 업무를 맡은 교사가 학교 전체 교사로부터 관련 자료를 제출받아 공문서로 서너 시간 안에 제출하라는 것은 수업을 포기하라는 요구와 다르지 않다.
교사가 과도한 행정업무를 맡은 또 다른 예가 있다. 2010년대 초 교육부는 교과교실제라는 제도를 도입했다. 해당 사업에 선정된 학교의 교실을 국어교실, 영어교실 등 교과의 특성에 맞게 리모델링하는 사업인데, 놀랍게도 건축설계, 소방, 전기, 배관, 페인트 작업, 가구 및 컴퓨터 구입 등에 전문성이 있을 리 없는 전국의 교사들이 각 학교에서 이 업무 담당자로 투입되어 일했다. 이 모든 일은, 행정업무를 위해 승진 및 고용된 교장, 교감, 행정직원의 업무가 되어야 마땅하다.
우리나라 교사들이 행정업무, 학부모 민원 및 학교 폭력 등으로 다른 나라 교사들에 비해 과도한 부담을 지고 있다는 사실은 국제 교육통계에도 드러난다. 2019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간한 교수학습 설문조사(Teaching and Learning International Survey) 보고서에 의하면 스트레스 요인으로 "수업 준비"를 꼽은 한국의 초등교사는 8.9%에 그친 반면, "행정업무(42.4%)" 또는 "학부모 민원 응대"(48.3%)를 꼽은 초등교사는 그 5배에 이른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학생으로부터의 협박이나 언어 폭력"이 업무 스트레스의 가장 큰 요인이라고 답한 교사가 21%로, 조사대상 18개국 중 1위를 차지했다는 점이다.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에는 급성 요로결석으로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는 고박사씨를 교도소 바깥 병원에서 진료받게 해달라고 장기수 민철씨가 교도소 간부 나 과장에게 부탁하는 장면이 나온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추후 감사에서 있을지 모를 지적 사항을 피해 갈 수 있는 간부 공무원(나 과장)과 고통에 시달리는 고박사를 돕고 싶은 자(장기수 민철)가 충돌한다.
이 요청에 대한 나 과장의 대답은 "저도 내보낼 명분이 있어야 하니까, 방 사람 모두가 고박사씨의 병원 외진을 부탁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내일 밤 9시까지 제출하세요"이다. 응급 상황이므로 속히 환자를 병원으로 보내야 한다는 사정보다는, 혹시 꾀병 환자일지 모를 수감자를 내보냈다가 사고가 나면 책임지기 싫으니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근거를(탄원서) 마련해 두려는 것이다.
나 과장의 이러한 반응은 근거(예컨대 공문서를 통한 지침)가 없으면 자신의 업무 영역에 해당하는 사안일지라도 개입하지 않으려 했던, 필자가 교사로 근무하며 만났던 여러 교장들이나 교육청 업무 담당자들의 태도를 연상시킨다. 근거가 없으므로, 따라서 본인에게 닥칠지 모를 불이익을 우려해서 나서기 싫은 교장이나 교육청 담당자와 어떤 지원도 없이 최일선에서 모든 민원을 응대해야 하는 교사의 입장 차이.
필자는 이 입장 차이를 지적하고자 한다. 악성 민원 처리에 관해 교장과 교육청의 책임과 업무 범위에 대해 명확한 지침이 없는 상황에서 교장이 적극적으로 민원 해결에 나서지 않고 교실 안은 물론 심야 및 새벽 시간에조차 학부모 민원을 처리하는 것은 오롯이 교사의 몫인 것이 지금 한국의 교사들이 겪는 어려움의 핵심이다.
공문서 처리 전문에서 문제 해결하는 교장으로
따라서 필자는 학부모 민원에 대해 교장이 적극적인 리더십을 발휘하도록 하는 제도와 법령 마련이 절실하다고 제안한다. 교사의 정당한 교육 활동에 대한 폭언과 괴롭힘에 해당하는 민원에는 교장이, 교육청이 '적극적으로, 책임감 있게' 개입해야 한다. 교육부와 교육청은, 교장의 리더십을 뒷받침할 수 있는 해당 영역 전문가(상담사, 사회복지사, 특수교육 전문가, 행정담당 직원)를 학교 안에 신규·증원 배치하고, 수업에 임해야 할 교사가 학부모 민원 처리와 학교 예산 수립 및 집행 등 가르침과 무관한 행정 업무에 투입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더불어, 공문서 처리 전문가 선발에서 학교 내 실질적 문제 해결 능력을 측정하는 방식으로 교장 임용 방식을 전환할 것을 제안한다. 행사 기획 및 공문서 작성 능력을 측정하는 장학사 시험에 합격해서 교육청에 근무하다 교장, 교감으로 발령받거나 교사로 근무평정 점수를 쌓아 교감이 되는 한국과 달리, 미국은 대학의 교육리더십학과에서 교장이 되고자 하는 교사들을 교육하고, 학부모 민원 사항 대처법, 관련 법령 및 기존 판례 학습, 교장의 적절한 리더십 행동에 대해 2년 정도의 훈련을 거친 후 교장 자격을 부여한다.
문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내가 감사에 지적받거나 법적 책임을 지지 않고 승진할 수 있을지에만 민감한 교장, 교육청 업무 담당자보다 민원 발생 단계부터 마무리까지 세심하고 책임감 있게 관여할 교장을 선발하는 제도 변화가 시급하다.
또 한 번, 민원 처리 시범학교 운영 등 보여주기 행정으로 퉁치고 넘어가기에는 문제가 심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