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폭우와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여름이다. 한낮 기온이 36도를 웃도는 찜통더위가 이어지니 휴가에 대한 기대가 열기에 녹아버리는 듯하다. 더불어 '휴가철 피서객 1억명 이동한다...하루 차량 523만대씩'이라는 기사 제목은 여행에 대한 기대를기겁으로 바꿀 만큼 강력한 기운을 풍긴다.
2023년 여름, 과감하게 일본 여행을 계획했지만, 아이들 여권 만료를 뒤늦게 발견해 접었다. 아이들 기대 충족을 위해 제주도 여행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항공, 호텔을 예약하고 파워포인트로 제주 투어 일정표를 만들었다.
제주도 여행 일정 중반에 아내의 대학원 졸업식이 있다는 사실을 당사자도 가족도 뒤늦게 떠올렸다. 일단 취소. 항공료 환불 수수료 3만 5천원을 내고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원점에서 다시 생각하니 반드시 큰 비용과 시간을 들여 떠나는 여행만이 능사는 아니었다. '아이들을 위한 여행' 목적을 제외하면 사실 부모에게 큰 의미는 없다. 무더위와 스트레스에 지친 부모는 쉬는 날 집에 가만히 누워 있을 때가 제일 편안하다.
아이들은 올여름 교회 수련회를 두 번이나 간다. 덕분에 가족 휴가 원점에 대한 타격이 크지 않았다. 일본, 제주도는 아빠의 괜한 호들갑이라는 걸 깨달았다. 가족과 함께한다는 데 의의가 있다.
올해 휴가는 계곡에서 하루, 워터파크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무더위와 인파를 조금이나마 피하고자 8월 중순 이후로 일정을 잡았다.
바쁜 자녀, 한가해진 부모
아이들이 중학교 1, 3학년이 되니 바빠졌다.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늘고, 이번 방학부터는 주말에도 학원에 다닌다. '아빠 심심해요. 놀러 가요. 쇼핑가요' 하는 횟수가 현저히 줄었다. '주말이면 무조건 아이들과 뭐라도 함께 해야지'라는 나의 다짐도 무용지물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덕분에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고 방에서 휴식을 취하는 나만의 즐거움을 찾았다. 올해 한 모임에서 OTT 문외한으로 극한 소외감을 느낀 후 드라마 몰아보기에 동참했다. 새로운 세상을 만나자마자 'OTT 볼 시간에 책이나 읽지'라던 마음이 돌변했다.
올해부터 OTT를 접해 가끔 영화만 봤다. 모임 사건 이후인 7월부터 본격적으로 시리즈 시청에 돌입했다. 뒤늦게 시청자가 된 덕분에 볼거리가 넘친다. '더이상 볼 게 없어!'라는 주변 사람의 볼멘소리가 무색할 정도로 골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토록 즐거운 세상이 있다니 놀랍다. 특히 기다릴 필요 없이 1편부터 결말까지 논스톱으로 감상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가장 행복하다.
난생처음으로 OTT 바다에 빠져 드라마 정주행 휴가를 보내는 중이다. 오프라인 휴가를 길게 가지 않으니 틈틈이 연차와 반차를 쓰고 또 주말을 이용해 OTT와 함께 휴식을 만끽하고 있다.
막장을 완주한 이유는 '대리만족'
떠들썩했지만, 외면하던 드라마를 최근에 시청하기 시작했다. <SKY 캐슬>(2018), <부부의 세계>(2020), <펜트하우스>(2020)와 최신작인 <더 글로리>(2023), <마당이 있는 집>(2023), <셀러브리티>(2023), <악귀>(2023) 등등.
특히 막장의 최고봉이라 일컬어지는 드라마 <펜트하우스>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살인, 복수, 불륜, 사기, 폭력, 학폭 등 온갖 껄끄러운 소재를 다 끌어다 버무렸다. 사람들이 감동도 맥락도 없는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드라마를 왜 만들었냐고 욕하면서도 시청을 멈추지 않았던 드라마다.
나 역시 비슷한 심경으로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며 시즌3까지 마무리했다. 끝까지 완주한 이유는 딱 하나다. 등장인물의 대사가 하나같이 시원시원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출연자는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심지어 욕까지 난무한다. 재벌이어도 가난해도 악해도 착해도 주변 눈치를 보지 않고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감정 표출, 내게는 커다란 대리만족이었다.
십수 년 사회생활을 하면서 속마음 표현을 억압받아 온 직장인이 보기에 이만큼 시원한 광경이 또 있을까.
출생의 비밀이 밝혀질 듯 말 듯한 조마조마함이나 늘어지는 줄타기도 없다. 기물 파손은 기본, 싸우고 부딪히며 시종일관 입으로 독침을 날린다. 서로 물고 뜯으면서도 적당한 감정을 유지하고, 악을 쓰면서도 할 말을 차근차근 풀어낸다. 가장 재미있고 놀라운 건 서로 감정 찌꺼기를 전혀 남기지 않는 모습이다.
가장 원초적인 인간 내면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 드라마가 아닐까. 현실 세계 인간들의 페르소나를 걷어낸다면 모두 <펜트하우스> 등장인물들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들의 욕심과 욕망, 배신과 음모가 딴 세상일처럼 낯설지만은 않았다.
권선징악의 당연한 교훈, 현실에 사는 사람들 대신 할 말을 다 해주는 대리만족, 시원함과 통쾌함까지 선사한 드라마였다. 막장 드라마 덕분에 7월의 뜨거움을 쿨하게 날려 보냈다.
가족의 주말 루틴 OTT 휴가
아무리 OTT에 빠졌다 해도 방안에만 틀어박혀 오타쿠처럼 TV만 들여다보지 않는다.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기에 나만의 기준이 있다. 평일에는 머리 안 돌아가는 퇴근길, 주말에는 집에 아무도 없을 때나 늦은 밤, 모두가 잠든 새벽과 아침나절에 드라마를 시청한다.
아이들 취향을 함께 즐기는 시간도 있다. 주말 밤이면 아이들이 내 방에 모인다. 하루 종일 에어컨이 꺼지지 않는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모인 김에 함께 OTT 여행을 떠나곤 한다.
최근에 아들과 시원한 방에 누워 영화 <범죄도시> 1탄과 2탄을 함께 봤다. 곧 3탄도 시청할 계획이다. 딸아이와는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드라마 <악귀>를 보고 있다. 함께 치킨과 피자를 먹고, 팝콘을 집어 먹으며 여름밤을 달랜다. 무더운 날에 밖에 나가지 않고도 가족이 모여 시원한 여름을 보내는 OTT 휴가 법이다.
휴가에 대한 의무를 조금 내려놓으니 마음이 편하다. 모두가 떠나는 기간, 아이들 학원 방학에 맞춰 떠나는 휴가에는 늘 교통난, 숙박난, 요금난과 함께였다. 휴가에 담긴 休(쉴 휴)가 무색한 의무적 여행이었다. 휴가를 마치고 돌아와 '이제 좀 쉬어야지'라던 시절도 떠오른다.
휴가는 다시 달리기 위한 재충전 시간이다. 경쟁하듯 천편일률적 휴가를 떠날 필요가 있을까. 몸과 마음이 즐겁고 편안해야 진정한 휴가다. 올해는 OTT를 즐기며 가상의 세계에서 나만의 스몰 휴가를 만끽하고 있다. 드라마에 담긴 나만의 메시지를 찾는 것도 재미 요소다. 오랜만에 맞이한 색다르고 마음 넉넉한 여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