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지난 2021년 8월 15일 봉환돼 18일이면 대전 현충원에 안장한 지 2주년이 된다.
카자흐스탄 정부는 1992년 수교 이후 우리의 봉환 요청에도 불구하고 남북한 관계를 고려해 유보해 오다가 우리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봉환이 성사된 것이다. 장군의 유해 봉환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애국자는 국가가 끝까지 보살펴야 된다는 당위성을 실현하게 돼 국민으로서 자랑스럽고, 한편으로는 홀가분한 심정이다.
그런데, 일부 인사들이 아직도 유튜브 방송이나 소셜미디어를 통해 "홍범도 장군은 공산주의자였다" "1921년 자유시 참변 당시 홍 장군이 독립군을 사살했다"고 왜곡하고 폄하해 가슴이 아프고, 장군에 대해 너무 송구스럽다. 심지어 여당의 한 의원은 육군사관학교에 건립된 독립전쟁의 영웅 흉상에서 홍범도 장군은 제외하라는 망언까지 하고 있어 안타깝다.
홍범도 장군은 6.25전쟁 이후 1980년대까지 반공 국시와 역사관, 독립운동 업적을 부풀리려는 일부 인사들이 홍 장군의 독립전쟁 업적을 부정적으로 평가해 피해를 입어왔다. 다행히 러시아와 중국 등, 공산권과 수교하면서 1991년 이후로 학자들이 중국과 러시아를 자유롭게 왕래하며 객관적인 자료를 통하여 꾸준히 연구해 지금은 사실관계와 진실이 대부분 밝혀졌다.
그동안 학자들의 연구결과에 따라 자유시 참변의 실체도 밝혀졌고, 홍범도 장군의 이념적인 성향도 규명되고 있다.
자유시 참변은 1921년 6월 연해주 자유시에서 한인부대인 사하린의용대와 보병자유 대대가 충돌해 발생한 독립투쟁사상 최악의 비극이다. 그러나 실체는 주도권 다툼을 위한 이르쿠츠크 고려혁명군과 상해파 대한의용군(이동휘 계열) 간의 무력 충돌이었다.
홍범도, 최진동, 안무 등 북간도 지역에서 온 독립군 부대는 자유시로 이동해 고려혁명군정의회의 주도권을 인정했다. 이들은 독립군부대를 통합하기 위한 명분과 러시아혁명 당국과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의 권위를 고려하고, 무기와 식량의 원활한 공급 등 현실 문제를 타결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홍범도 장군은 사변 당시 대립된 양 세력에 참여하지 않고, "장교들과 솔밭에 모여 땅을 치며 통곡하면서 매우 안타까워했다"는 기록이 있다(윤상원,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 참변, "한국사 연구", 2017, p.178).
실제로 참변 이후 포로로 잡힌 대한의용군 군사재판에 홍 장군이 재판위원으로 참여하여 독립군 상당수를 감형하고 석방하는데 기여했다. 러시아 군 당국은 신속한 사태수습을 위하여 명망이 높은 홍 장군을 재판위원으로 추대한 것으로 분석된다.
홍범도 장군은 자유시 사변이 일단락된 후 1921년 9월 연해주 지방에서 고려공산당 중앙간부 명의로 '고려 노동 군중에게'라는 문건을 발표하고, 같은 해 10월 1일 '각 의병대 수령 홍범도 등'의 이름으로 '자유시 사변에 대한 의병장들의 포고문'을 발표했는데, "붉은 혁명사상으로 단결하여 일본 침략주의를 박멸하자"고 주장했다"(윤상원 논문).
홍범도 장군은 1922년 모스코바 크레믈린궁에서 개최된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의에 참석해 레닌으로부터 권총과 은화 100루블을 수령했고, 1927년에는 공산당에 입당 한 것도 사실이다. 원동혁명단체회의에 우리 동포 56명이 참석했는데, 참석자 설문 조사에서 홍범도 장군은 참석 목적을 "고려의 독립"이라고 기재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다른 참석자들은 "노동자의 해방"과 "세계 공산주의자의 단결"등으로 기록했었다.
1927년 공산당에 입당한 것은 연해주 이만, 수청에서 동포들과 같이 협동농장을 주도하면서, 동포들의 토지 소유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발언권 강화차원에서 입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홍 장군은 당시 시대 여건에 따라 독립군 부대의 체제를 유지하여 항일 독립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을 한 것이다. 홍 장군은 순국할 때까지 각종 회고록의 기록이나 홍범도 장군의 행적을 볼 때, 공산주의 사상가로서 활동한 사례는 보이지 않는다. 홍범도 장군의 이념적 성향은 빼앗긴 조국을 독립시키려는 투철한 민족주의자라고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6.25전쟁을 경험한 세대들은 기억할 것이다. 북한 괴뢰군의 점령기간 동안 마을마다 인민위원회를 구성했었다. 대부분이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지만, 북괴의 억압과 위협 상황에서 위원장과 서기를 맡았다. 그러나 수복한 이후 일부 극렬분자를 제외하고 모두 평상으로 돌아왔다. 하물며 일제강점기라는 당시의 상황과 여건을 고려하여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봉환 2주년을 계기로, 일부 호사가들이 홍범도 장군에게 공산주의자라는 프레임을 씌우려는 낡은 틀에서 벗어나, 장군의 업적을 객관적이고 진정성 있게 조명하여 선열들의 독립운동 정신을 계승하려는 전향적인 디딤돌로 삼아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부이사장(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공동대표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