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8주년을 하루 앞두고 민족지도자 최재형(1860.8.15∼1920.4.07)의 묘가 부인 최엘레나 여사와 함께 국립서울현충원에 조성된다고 한다. 당신의 163번째 생신을 하루 앞둔 날이요, 함경도 지역 대홍수로 아버지를 따라 연해주 포시에트 지역 지신허(地新墟)로 이주한 지 154년 만에 고국 땅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니, 귀국길이 참으로 험난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연추 도회소 도헌(都憲)이 되어
최재형 가족은 지신허에서 곧 연추(煙秋)로 이주하고, 그는 1871년 한인으로서 러시아학교에 입학한 첫 학생이 되었다. 그러나 가난으로 인하여 학업을 포기하고 가출, 포시에트 항구에서 노숙 생활을 하다가 러시아 상선 선장 표토르 세묘노비치 부부의 도움으로 1877년까지 세계 각지를 다니는 선원 생활을 하면서 폭넓은 견문과 경험을 쌓고 돌아왔다.
얼마 후 러시아 정부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두만강 하구 크라스노예 셀로(녹둔도鹿屯島)에 이르는 군용도로를 건설할 때 통역을 맡아 성실하게 근무하여 러시아 정부로부터 은급훈장을 받았다.
1893년 한인의 러시아 국적 취득이 허용되고, 한인 자치행정기구인 도회소(都會所)가 설치되었는데, 주민들의 추대로 그가 도회소 전체 업무를 총괄하는 도헌(都軒)이 되었다.
점차 연추지역이 러시아의 중요 군사지역으로 부상함에 따라 다수의 러시아 군대가 주둔하게 되어 이들을 수용할 건물과 거주에 필요한 연료, 식료품의 공급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그는 러시아 당국과 물류를 공급하던 한 옐리세이 루키치(한익성), 한 바실리 루키치 형제, 김 표트르 니콜라에비치, 최 니콜라이 루키치(최봉준) 등의 재력가들과 의형제를 맺어 상업회사를 설립하였고, 이를 통해 러시아 군대에 대한 물품청부업 등을 통해 거금을 모았다.
동의회(同義會) 조직하여 의병투쟁
1907년 7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특사 이준 열사가 자결했다는 소식은 연해주 한인들의 애국심과 분노를 고조시켰다. 최재형은 이범윤과 노보키예프스크에 의병본부를 설치했다. 여기에 1908년 봄 김기룡·안중근·엄인섭 등이 참여하고, 헤이그특사 수행원으로 파견되었던 이위종이 부친인 전 러시아공사 이범진의 뜻에 따라 합류하였다.
1908년 5월 최재형은 반일의병 단체인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고 총장에 선임되었고, 부총장에 이범윤, 회장에 이위종, 부회장에 엄인섭, 서기에 백규삼 등이 선출되었다. 최재형은 동의회의 군자금으로 1만3000 루블이란 거금을 쾌척했고, 이범진은 아들 이위종 편으로 1만 루블, 수청(水淸) 지방에서 6000 루블 등 모금이 이어지자 의병부대인 대한의군(大韓義軍)을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연해주는 러시아의 진출기지로서 약 4만 명의 러시아군이 배치되어 있었고, 1개 사단 병력의 일본군이 두만강 국경을 수비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국내 진공작전을 시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연해주 의병은 놀랍게도 1908년부터 몇 차례 두만강을 건너 공격했고, 국내 의병부대와 연계하여 의병투쟁을 벌였다. 이들은 한인촌에 유숙하면서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참모진은 러시아 당국과 교섭하여 러일전쟁 때 사용했던 러시아 군대의 폐총을 구매하는 일과 청국 훈춘(琿春) 당국에도 무기 공급을 교섭하였다.
양국은 일제의 강력한 항의에 따라 이를 거절했지만 무기상을 통하여 총기를 구입하고, 동포들이 소지하던 총기를 거두어 무장하니 7백여 명의 의병이 러시아제 5연발 소총 500정에 1인당 100~150발의 탄환으로 무장할 수 있었다.
대한의군 의진을 보면, 총독에 이범윤, 총대장에 김두성(金斗成, 유인석 가명), 대장에 전제덕(全濟德, 전덕원 가명)·김영선, 영장에 안중근·엄인섭·백규삼·이경화·김기룡·장봉한 등이었고, 최재형이 군자금 조달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주도자였다.
막대한 재산으로 반일무장단체 독립단 이끌다
1910년 12월 러시아 연해주에 거주하던 최재형, 이종호, 오주혁, 황병길 등은 연추에서 국민회(國民會)를 조직하였다. 국민회 설립 목적은 해빙기에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국권을 회복하자는 취지였는데 최재형이 회장, 이종호가 부회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이어 1911년 5월 이종호, 김익용, 강택희, 엄인섭 등이 주축이 되어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권업회(勸業會)라는 이름의 반일활동 단체를 조직하였다. 회장에 최재형, 부회장에 홍범도가 선임되어 <권업신문>이라는 기관지를 발간했는데, 연해주에 사는 독립운동가들이 대부분 가입했기 때문에 규모도 상당했다.
창단 3년째인 1914년에는 회원이 85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세력이 확장되어 연해주의 대표적인 반일활동 단체로 부각되었다. 처음에 러시아 정부의 공인을 받고 조직되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러시아와 동맹국이 된 일본의 항의로 1914년 강제 해산당했다.
1917년 볼셰비키혁명이 일어나고, 연해주에서 볼세비키혁명군인 적군(赤軍)이 일본군의 후원을 받은 백군(白軍)과 내전이 벌어지자 최재형은 이를 계기로 적군을 지원하는 반일무장단체 독립단(獨立團)을 조직하여 단장을 맡았으니, 곧 독립군 대장으로 활약하게 된 것이었다.
"작년 11월 중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김좌두(金佐斗), 이용(李鏞), 김하석(金夏錫), 김규면(金奎冕), 김만겸(金萬謙) 등 불령선인이 주동이 되어 무력적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독립단'을 조직하여 단장에 최재형, 재무부장에 허만수(許萬洙)를 임명하여, 활동의 첫 단계로 우선 지난 12월 19일 김좌두, 김규면 등은 과거 액하(掖河) 조선인 특별대대 조선인 장교였던 김빠벨이 러시아군 총 2백정과 탄환 1만발을 보관하고 있는데 이를 횡령하기 위하여 한때 같은 대원이었던 한영진(韓永振)·김안톤·조병국(趙秉國) 외 5명에게 권총 7정을 지급하여 해림역(海林驛)의 서쪽 모역(웨이샤허[苇沙河]로 추정-필자 주)으로 파견하여 김빠벨에게 총기와 탄환의 인도를 요구하고, 만일 이에 응하지 않을 시에는 협박하여 강탈하기로 하였다." - 국사편찬위원회, <일본 외무성기록>(1920.01.10)
이 문서에서 1919년 11월 중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김좌두, 이용, 김하석, 김규면, 김만겸 등이 주동이 되어 반일무장투쟁을 목적으로 독립단을 조직하고, 그 독립단의 단장을 최재형이 맡았으며, 독립단이 액하(掖河) 조선인 특별대대 조선인 장교에게 총 200정과 탄환 1만 발을 횡령하게 하거나 강탈하여 독립군이 중국 길림 방면으로 운반할 계획이었다고 하니,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이에 앞서 자신의 사업체가 있던 블라디보스토크에는 헤이그특사 이준의 아들 이용(李鏞)이 한인의용대(일명 고려의용대)를 이끌었는데, 그와 함께 독립단을 조직했다는 것은 그 의미가 특별한 것이었다. 그리고 최재형의 장남 최 코루리(コルリ)가 볼셰비키혁명군의 직속 부대인 고려혁명군 감독 사령관을 맡고 있었는데, 그는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적군 총사령관의 명을 받아 연해주 일원의 수비를 맡고 있었다.
최재형이 독립단을 조직하여 총과 탄환을 구하려고 했던 것은 자신의 장남이 볼셰비키혁명군의 직속 부대인 고려혁명군 감독 사령관을 맡고 있었던 것과 연계된 것으로 보인다.
"적군(赤軍)이 지난 10월 15일 니콜리스크에 침입 후 치타와 블라고베셴스크 지방에 있던 고려혁명군의 일부 약 1200명(기병 200, 보병 1,000)은 적군 총사령관의 직속 부하가 되었다. 최 코루리 고려혁명군 감독 사령관(전 임시정부 재무총장 최재형의 장남으로 러시아사관학교 출신)은 이들을 이끌고 니콜리스크에 도착하여 동지(同地)를 임시 본부로 정하고 목하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적군 총사령관의 명을 받아 연해주 일원의 수비를 맡았는데 군사 배치와 모집 상황은 다음과 같다.(중략)
또한 최코루리 사령관이 이끄는 적군 직속 고려혁명군 이외의 군인은 다음과 같다.
1) 이중집 이하 김규식(金圭植), 최경천, 임병극(林秉極) 일파의 쑤이펀 송전관 및 그 부근에 산재한 고려혁명군의 총수는 약 1,200명.
2) 김응천(金應天)이 소성[水靑] 부근에서 통솔하는 인원 약 1,000명, 또한 오하묵(吳夏默)이 이끄는 고려혁명군 약 2,000명은 최근 치타에서 블라고베셴스크로 진출해 왔다." - <일본 외무성기록>(1922.11.10)
볼셰비키혁명군(적군)이 니콜리스크에 들어오자 동시에 치타와 블라고베셴스크 방면에 있는 고려혁명군의 일부인 1200명은 최 코루리 사령관의 지휘하에 적군 총사령관 직속으로 편입되어 연해주 일원에서 적군과 행동을 같이하고, 고려혁명군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중집·최경천이 이끈 1200명과 수청에 있는 김응천 이하 약 1000명이 모두 적군과 함께 연해주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최근 오하묵 휘하의 고려혁명군 약 2000명이 치타를 출발해서 블라고베셴스크로 진출했다는 것이다.
최재형은 자신의 아들이 볼셰비키혁명군 직속 한인 연대 사령관이 되어 백군·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는 상황이 되자 주거지를 적군 사령부가 있던 니콜리스크 우수리스크로(연추)로 다시 옮겨 무장투쟁을 후원하였다.
일제의 연해주 침략 방해자로 처형
1920년 4월 4일 밤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중심부의 공공기관에 기관총과 대포 사격을 감행하였다. 이때부터 5일 새벽에 걸쳐 우수리스크, 스파스크, 하바로프스크, 슈트코프, 포시에트 등지에서도 일본군의 공격이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은 초토화되었고, 많은 동포가 살상되고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동포 44명이 붙잡혔다.
대규모 동포사회가 형성되어 있던 수청에는 4월 6일 밤에 일본군이 습격하였다. 한창걸이 이끄는 고려혁명군이 저항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강태준·이백구 등이 전사하고, 항카호 북쪽의 이만(현 달레네레첸스크)으로 멀리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우수리스크에서는 연흑룡주 노동자들이 회의를 열고 있었는데, 일본군은 여기에 참석했던 대표들을 포함하여 76명을 체포하였고, 4월 7일 연해주 동포사회의 최고 지도자 최재형을 비롯해 김리직·엄주필·황카피톤[황경섭(黃景燮)] 등이 일본군에게 총살되었다.
"니콜리스크에 파견한 아시다테(足立) 포병 대위의 보고에 의하면, 동지(同地) 주둔 우리 헌병은 수비 보병대와 협력하여 4월 5, 6일 양일에 걸쳐 동지 주재 배일(排日) 조선인의 가택을 수색하여 최재형 이하 76명을 체포하여 취조한 결과, 동인 및 김이직(金利稷), 황경섭(黃景燮), 엄주필(嚴周弼)의 4명은 유력한 배일 조선인으로 특히, 최재형은 상해임시정부의 전 재무총장이었고, 또한 니콜리스크 부시장이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다른 세 명과 모의하여 혁명군을 원조하는 주모자가 되어, 배일 조선인을 선동하고 우리 군을 저격하는 등 무기를 사용하여 반항적인 행동을 한 것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에 전기 4명은 계속 유치하여 취조하기로 하였고, 그 외는 특별히 체포할 만한 증거가 없고, 또한 유력자도 아닌 관계로 향후를 엄중히 경고하고 석방했다.
그런데 때마침 동지 주둔 흑룡 헌병대 본부와 니콜리스크 헌병분대가 4월 7일에 청사를 이전하게 되어 동일 오후 6시경 전기 4명을 신청사로 호송 중 감수인의 빈틈을 노려 도주하였다. 헌병은 추적하여 체포하려 했으나, 그들은 지형을 숙지하고 있어서 능숙하게 질주를 계속하여 헌병의 시야에서 거의 벗어나기에 이르러 어쩔 수 없이 이들을 사살하였다." - <일본 외무성기록>(1920. 05. 01)
이 비밀문서에서 최재형은 '니콜리스크-우수리스키 부시장 직책을 수행하면서 김이직, 엄주필, 황경섭 등과 모의하여 고려혁명군을 원조하는 주모자가 되어, 배일 조선인을 선동하고 일본군을 저격하는 등 무기를 사용하여 반항적인 행동을 한 것이 판명되었기 때문에 4명을 석방하지 않고, 헌병대 신청사로 이송하는 중에 탈출을 기도하여 피살했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이송하는 중에 탈출을 기도하여 피살했다'라는 기술은 일본 군경이 재판 없이 총살했을 때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한민족 지도자이자 고려혁명군 아버지 최재형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7년에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혁명이 일어났다. 이때 성립된 혁명정부가 연합국 탈퇴를 선언하고 전 세계의 무산계급을 향해 혁명 참여를 호소하게 되자, 연합국 측은 러시아 내전에 무력간섭을 시도하게 되었다. 혁명 발발 직후인 1917년 12월 프랑스 파리에서 일본을 비롯해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 대표들이 모여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하여 무력간섭을 결정한 것이었다.
이러한 무력간섭 정책의 결정에는 볼셰비키혁명을 계기로 시베리아를 식민지화하려는 일본의 야심이 컸다고 할 수 있다. 1918년 1월 12일, 일본은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에 일본 순양함이 된 이와미호를 진입시킴으로써 다른 연합국보다 먼저 시베리아지역을 침공하였다.
일본군이 연해주를 침공하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김규면, 김만겸, 김좌두, 김하석, 이용 등이 독립단을 조직하여 최재형을 단장에 추대하였다. 수청, 추풍, 포시에트 등지에서 강국모가 주도한 혈성단(血誠團)을 편성하여 반일무장투쟁을 벌였다.
고려혁명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가장 큰 승첩을 올린 전투는 니콜라예프스크(尼港)에서 벌어졌다. 아무르강 하구의 니항에는 일본군 2개 보병 중대가 주둔해 있었고, 그 밖에 상인, 어부 등 일본 민간인 다수도 진출해 있었다. 니항은 태평양 연안의 어업 중심지로서 해상교통이 편리하였던 까닭에 상당수의 동포도 거주하고 있었다.
동포들은 일본군의 침략 이후 무장단체를 조직하여 러시아 혁명군(적군)과 연합작전을 벌였는데, 1920년 3월 12일부터 5일간에 걸쳐 격전을 벌여 니항 주둔 일본군을 섬멸시키고, 영사 부부를 포함한 다수의 일본 민간인을 사살하였다.
니항사건을 계기로 적군·고려혁명군은 일본군과 본격적인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당시 최 코루리 사령관이 이끄는 적군 직속 고려혁명군 1200명 외에 쑤이펀 송전관 및 그 부근에 산재한 김규식·이중집·임병극·최경천 등이 인솔한 약 1200명, 수청 등지에서 김응천이 통솔하는 약 1000명, 치타·블라고베셴스크 등지에서 오하묵이 이끄는 약 2000명은 모두 러시아 혁명군을 도운 동포 고려혁명군이었다.
일제는 연해주와 북간도에 7만50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러시아 볼셰비키혁명에 반대하는 백군을 도와 북사할린·연해주·흑룡주의 주요 도시를 점령하고, 한창 기세를 올릴 때는 치타에서 서진하여 자바이칼주까지 육박, 연해주에 일본의 괴뢰정부를 수립하려는 망상을 불태웠다. 그러나 러시아 적군과 함께한 고려혁명군의 반격에 밀려 결국 1922년 10월 패퇴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른바 메이지유신 이후 일제의 첫 패배였다.
결국 5000명이 넘는 고려혁명군의 활약이 큰 힘이 되어 연해주에서 일본군을 몰아낸 것인데, 이는 최재형과 적군 직속의 고려혁명군 감독 사령관으로 활약하다 행방불명된(전사 추정) 그의 장남 최 코루리, 고려의용대를 이끈 후 고려공산당 무관학교 설립준비위원단 사령관을 지낸 이준 열사의 장남 이용, 오하묵을 비롯한 고려혁명군 지도자 등의 활약에 따른 것이었다.
일제는 연해주에 괴뢰정부를 세우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던 한민족 지도자이자 한인으로 조직된 고려혁명군 아버지 최재형을 끝까지 추적하여 총살한 것이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국립인천대학교 독립운동사연구소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