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수정 : 15일 오전 9시 55분]
지난 봄, 지인의 딸이 뉴욕대를 졸업했다. 기숙사에 짐을 넣어 주러 같이 다녔던 날들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졸업이라니. 덕분에 오랜만에 반가운 선배의 얼굴을 보았다. 전통을 따라 뉴욕 양키즈 홈구장에 학교의 상징인 보라색 가운을 입고 앉은 졸업생들의 사진도 받아 보았다. 푸른 구장에 가득 퍼진 보라색 점들. 꼭 들녘에 가득 퍼진 야생화처럼 보였다.
야생화. 세상을 떠난 이를 별이 된다고들 한다. 하늘의 별이기보다 이 땅의 야생화가 된 것 같은 사람. 봄이 되면 기억 속에 잠시 떠올랐다 지는 이름. 그런 사람이 있다. 바로 고 조은령 감독이다.
20여 년 전에 그도 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넉넉한 집안에서 자란 똑똑한 소녀는 대원외국어학교를 다니다 말고 훌쩍 뉴욕으로 떠나왔다. 뉴욕의 화려함에 눈이 멀만도 한데, 뉴욕에서 가꾼 이력으로 명성과 자리를 탐할 만도 한데, 그녀가 학업 중에 시간을 내어 함께 했던 곳은 엉뚱하게도 밀알 선교회였다. 장애인들을 섬기는 곳. 그녀의 발길은 어쩌다 마천루를 떠나 들녘으로 향하게 되었을까.
졸업식을 마친 지인 가족도 보내고, 잠시 떠올랐던 그의 이름도 잊을 무렵, 엉뚱한 곳에서 다시 '조은령'이라는 이름과 마주쳤다. '우리 학교' 학생들의 고국 방문 프로그램 '하나의 꿈' 여행 포스터였다.
조선 사람이라 알려주는 유일한 우리 말... 빛나는 우리 학교
'우리 학교'는 말 그대로 우리 학교이기도 하지만, 사실 일본에 있는 재일조선인들의 조선 학교를 이른다. 영화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영화 제목이 떠오르기도 할 것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 학교>(김명준 감독) 말이다. 하나의 꿈, 우리 학교 그리고 다큐멘터리 영화. 이 셋의 시작점에 조은령이라는 이름이 있다.
국내 단편 영화 최초로 칸 국제 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면서 화제가 되었던 조은령 감독. 뉴욕 유학 중 봉사 단체 활동을 통해 장애아에게 가지게 된 관심이, 단편 영화 <스케이트>로 피어났었다. 20대의 한인 여성 감독이 10분가량의 흑백 영화로 이뤄낸 귀한 성과였다.
그녀의 관심은 계속 우리 사회 속 야생화처럼 살아가는 이들에게 있는 것 같았다. 거친 들녘 한 귀퉁이에서 홀로 꽃을 피워내는 야생화. 아무도 특별한 관심과 돌봄을 주진 않지만 놀라운 생명력으로 자기 자리를 지키는 작은 야생화들 말이다.
칸에 초청받은 <스케이트>도 그랬지만, 낙태에 대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려내 드레스덴 영화제 2위에 입상한 <생>도, <가난한 사람들>도 그랬다. 조은령 감독이 생전 마지막으로 눈길을 주었던 이들이 바로 재일 조선 학교였다.
뉴욕에는 주말마다 한글 학교를 통해 우리 말과 글, 뿌리와 정신을 배우는 한인 2세, 3세들이 많다. 1.5세 한인 부모들은 비록 자신은 우리말이 서툴러도 아이들에게 꼭 한글과 민족 자부심을 가르치고 싶어 한다.
'우리 학교'도 광복 직후 재일 조선인들이 사비를 털어 세운 국어 강습소에서 시작되었다. 험난한 과정을 거쳐 초중고 과정의 학교가 되었지만 일본 학사 과정 외의 언어와 역사를 가르친다는 이유로 아직까지 일본 정부로부터 정식 학교로 승인받지 못하고 있다.
행정적으로 탄압 받고, 일본 사회에서 노골적인 혐오의 대상이 되며, 한국에서는 외면받는 학교. 굴곡진 역사와 험한 일들을 겪으면서도 묵묵히 이를 감수하고 '우리 학교'를 지켜내는 교원과 학부모, 학생들.
조은령 감독은 이들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 영화 <하나>로, 또 다른 다큐멘터리 영화 <프론티어>로 만들고자 작업하다 예상치 못한 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뜨고 말았다. 31세. 꽃이 지기엔 너무나도 이른 나이였다.
하늘은 그를 데려간 대신 그의 열망을 그와 이어진 사람들에게로 옮겨붙게 했다. 아내를 이어 남편 김명준 감독이 다큐멘터리 <우리 학교>를 세상에 내놓아 평단과 관객의 호평을 받으며 다큐멘터리 영화로는 이례적으로 10만이 넘는 관객에게 감동을 주었다.
2006년 부산국제영화제 운파상, 올해의 독립영화상, 2008년 대한민국 영상대상 최우수상 등 수상도 이어졌었다. 김 감독은 이에 멈추지 않고 보급형 DVD를 제작하여 영화 속에 다 담지 못한 이야기까지 대중에게 전하고자 노력했다. 그렇게 신혼 7개월 만에 먼저 보낸 아내의 꿈을 땅에서 기경했다.
'우리 조선학교 아이들이 한국에 오면 얼마나 좋을까' 조은령 감독의 생전 바람은 그를 기억하던 지인들을 움직였다. 2013년, 그의 10주기에 만난 지인들이 '하나를 위한 교육' 모임을 시작했고, 마침내 2019년 첫 한국 방문 프로그램 '하나의 꿈' 여행을 이뤄냈다.
그후 2023년 8월, 4년 만에 진행되는 두 번째 '하나의 꿈' 여행 소식 속에 낯익은 고운 얼굴이 보인다. 쑥스러움을 접어두고 연락을 취해보았다. 첫 방문지 한글 박물관에서 '하나의 꿈' 일행을 맞은 이, '하나의 꿈' 로고를 만든 캘리그래피 작가 이지연이다.
이 작가는 행사측에서 준비한 액자 선물 작업을 돕고 있었다. 참가자들이 원하는 글귀를 즉석에서 쓰고 액자를 만들어 주었다. 자신은 그저 할 수 있는 작은 봉사를 할 뿐이라면서. 그러면서 마주한 참가자들의 모습은 어땠을까. 일본에서 고단하고 쉽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 고국을 방문해 잠시 쉼을 누리게 된 아이들과 어머니들의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였단다.
우리말과 글, 역사를 배우고 지키느라 힘겨운 학업을 이어가는 조선학교 가족들에겐 이 여행 자체가 커다란 선물인 거 같다고도 했다. 첫 여행을 했던 분들의 좋은 경험이 나누어지면서 두 번째 여행은 또 다른 아이들과 어머님들로 확대되었다고도 말했다.
올해 방문 역시 그간 조선학교를 꾸준히 섬겨온 오사카의 이성로, 고정희 선교사와 서강대 이승엽 교수, 기쁨이 있는 교회(JoyfulChurch)를 비롯한 후원자들의 노력이 컸다. 이 작가를 통해 실질적인 인솔자 이승엽 교수와 연락이 닿았다.
'하나를 위한 교육' 모임의 대표인 이승엽 교수는 "십시일반, 이분들을 아끼는 단체와 개인의 후원으로만 여행이 진행되고 있는데요, 이 일이 매년 계속되어서 더 많은 아이들이 한국을 방문할 수 있도록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이 생기면 좋겠습니다"라고 전해왔다.
대표라고는 하지만 일정을 준비하고, 인솔하고 진행하며 바삐 움직이느라 숨 돌릴 틈이 없다. 이승엽 교수와 한 마음으로 함께 뛰는 봉사자분들도 마찬가지다. 소수의 인력이다보니 챙겨야 할 것이 만만치 않다. 바쁜 중에도 즐거워 하는 참가자들의 사진을 보내주었다. 섬기는 이들의 힘은 이 환한 얼굴들에서 나오는 것일 테다.
'한 가족인 우리'를 느끼게 해주고 싶다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조선학교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아주 잘 만들어서 그 영화를 한국에서 극장에 올리는 날, 영화에 나온 아이들과 선생님들을 초청해 함께 영화를 보는 것입니다." - 고 조은령 감독이 관계 기관에 보낸 편지글 중에서
세월을 따라 그만 잊고 살았던 이름 조은령. 이름은 희미해 졌어도 그의 꿈은 희미해 지지 않았다. 2003년 4월 때 이르게 생을 마감하며 남은 고 조은령 감독의 꿈이, 2006년 <우리 학교>라는 영화로, 2013년 그의 10주기 모임에서 '하나를 위한 교육' 발족으로, 2023년 20주기에 조선 학교 가족의 두 번째 고국 방문 프로그램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높이 떠 별이 될 수도 있었지만 조은령 감독은 하늘의 별이기보다 이 땅의 야생화가 되길 선택한 것 같다. 지금도 널리, 오래도록 그의 아름다운 시선과 뜻이 땅위에서 퍼져가고 있으니.
잼버리 단원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었다는 정 많은 시민분의 기사를 보았다. 초록초록한 단체 티를 입은 우리 학교 학생들 앞에도 어디선가 '아이스크림 귀인', 아이스크림을 사주는 삼촌이나 이모가 나타나 이들을 응원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동안 그들을 모르쇠 했던 시간들을 미안해하며.
다른 어느 나라에도 없는 한국에서만의 경험. 거리에서 만나는 누구라도 삼촌이고 이모이고 할머니, 할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한국만의 신비한 '한 가족인 우리'를 느껴보고 돌아가면 좋겠다.
일제 강점기, 일본으로 건너가 험한 세월을 보내시면서도 자손에게 뿌리를 심어주고자 했던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고향 땅을 밟고 있는 이들의 여행은 광복절인 15일까지 이어진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도 함께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