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 각지에서 코리아나호를 타고 남해안 명품섬 관광에 나선 일행의 둘째날(19일) 일정은 연도를 떠나 대한민국 섬 중 최고로 아름답다는 백도와 거문도 방문이다.
연도항에서 백도를 향해 떠나려는 찰나 강풍과 함께 세찬 비가 몰아친다. 평소와 같은 이른 시각에 아침밥을 먹은 일행은 코리아나호 정채호 선장의 결정에 따라 한 시간쯤 기다렸다가 출항하기로 했다. 일기예보를 보면 항해가 어려울 정도의 강풍이 불지 않았기 때문이다.
코리아나호가 연도항을 벗어나 백도를 향해 항해하자 바닷길에 약한 몇몇 사람이 배멀미를 하며 힘들어한다. 바람과 함께 커다란 너울이 다가오자 멀미를 못 견딘 몇몇 분이 백도를 포기하고 거문도로 방향을 틀자고 선장에게 건의했다.
백도로 갈 것인가 아니면 거문도로 갈 것인가를 거수로 결정하자는 정채호 선장의 선내 방송에 따라 일제히 손을 든 일행의 결정은 대한민국 섬 중 최고의 비경을 간직한 백도행이었다.
멀미약을 먹었지만 힘들어하는 사람들은 갑판에 드러누웠다. 보이는 건 망망대해뿐. 배는 너울에 따라 오르락내리락을 계속한다. 인생도 마찬가지 아닌가? 때론 힘든 세상을 만나 휘청거리기도 하고 때론 순풍을 만나 잔잔한 바다를 항해하기도 한다.
밀려오는 파도에 몸을 맡긴 채 먼 바다를 바라보며 멍 때리고 있는 순간 찌푸렸던 하늘이 맑게 개고 잔잔한 바다와 함께 저멀리 백도가 나타났다. 사람들은 "와!" 소리를 내며 "참고 백도로 오길 잘했다"는 소리를 한다.
영화 <밀수> 배경, 최고의 비경 간직한 백도
크고 작은 섬이 백 개 중에서 하나가 부족하여 일백 백(百)자의 한 획을 떼어버리고 백도(白島)라 불렀다고 하기도 하고 멀리서 보면 섬이 하얗게 빛나서 백도라 하였다고 하는 백도에는 아름다운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옥황상제의 아들이 아버지의 노여움을 받아 인간 세상으로 귀양을 오게 되었다. 외로이 지상 세계에서 귀양살이하던 아들은 바다에 놀고 있던 용왕의 딸과 첫눈에 반하게 된다. 이후 아들은 죄를 뉘우치기 위해 귀양 온지도 까먹고 용왕의 딸과 남몰래 사랑을 나누었다. 어느 날 옥황상제는 아들이 죄를 뉘우쳤을 거라 생각하고 지상으로 신하들을 보냈다. 그러나 신하들도 아들의 꾐에 빠져 용왕의 시녀들과 사랑에 빠져 돌아가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안 옥황상제는 아들과 신하들에게 벼락을 내려 모두 바위로 만들어 버렸다. 이 크고 작은 섬들이 바로 백도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거문도에서 28㎞ 떨어진 백도는 다도해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낚시를 하거나 배를 정박할 수 없다. 출입이 가능했던 등대섬도 훼손을 막기 위해 입도가 금지되었다. 200여 미터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백도의 풍경은 숨이 막힐 지경이다.
크게 상백도와 하백도로 나뉘는 백도는 만물상이기도 하고 작은 금강산이기도 하다. 백도는 오전, 오후, 흐린 날, 화창한 날 시시각각 그 형체를 달리한다. 백도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해질 무렵이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영화 <밀수>에 여수의 백도가 소개되면서 CG로 만든 듯한 그 아름다움에 '명불허전'이라는 평가와 함께, 여수의 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영화 <밀수>에서는 주로 하백도의 모습이 담겼다. 수면으로 솟구친 기암괴석과 깎아지른 절벽이 병풍처럼 펼쳐진 모습 등 하백도를 상징하는 풍경이 영화에 여러 차례 등장했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영상이 아니다.
세계가 욕심냈던 거문도
백도 구경을 마친 코리아나호는 순조롭게 거문도에 도착해 정박했다. 거문도는
동아시아의 해상요충지에 위치해 세계가 탐낸 섬이다. 한반도의 육지와 제주도를 잇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규슈(161㎞), 대마도(168㎞)와도 가깝다. 거문도에서 규슈와 대마도가 부산(197㎞)보다 가깝다.
세종 22년(1440년) 왜인들은 고초도에서 고기를 잡았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영국과 러시아가 거문도를 둘러싸고 각축전을 벌였다. 남진하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1885년 영국이 거문도를 불법 점거하는 '거문도 사건'을 일으켰다.
영국이 거문도에서 철수하자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1905년 거문도를 점거하기 시작했다. 영국 해군의 거문도 점령으로 거문도에는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당구장과 테니스장이 생기고 전기불이 들어왔다. 경복궁에 전기가 처음 들어온 것이 1887년인 걸 감안하면 거문도에는 2년 전에 이미 전기불이 켜진 셈이다.
1885년 영국 해군이 거문도를 불법 점거하자 조선의 유사당상 엄세영은 중국 수군제독 정여창과 독일 자문관 뮐렌도르프와 함께 거문도를 방문해 엄중항의했다.
이때 정여창은 거문도 출신 한학자 '귤은' 김유 선생과 함께 필담을 나눈 후 거문도에 학식있는 '큰 문인들이 사는 섬'이라는 뜻의 '거문도(巨文島)'라 칭할 것을 건의했다고 한다.
20일 오전 10시, 코리아나호가 거문도 출항을 앞둔 시각에 덕촌리 경로당을 방문해 세 명의 할머니들에게서 거문도에서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거문도에서 태어나 85년 동안 거문도에서만 살았다는 그들. 사진찍기를 한사코 거부한 세 분의 이야기다.
"물질하는 사람들은 돌아가셨고 거문도에서 태어나 85년 동안 살고 있어요. 지금이야 교통이 좋아졌지만 어렸을 적에는 여수 구경도 못해봤어요. 옛날에 밥 굶는 건 예사였어요. 배가 고파 밥에 톳을 넣은 톳밥과 고구마를 먹고 살았지요. 젊은 사람들은 다 외지로 나가버렸어요.
애로사항이 뭐냐고요? 젊었을 적에는 앉아서 쉴틈없이 일했는데 나이 들어 일하는 사람들 도와주지 못하고 보고만 있으려니 애터져요. 나라에서 시원한 경로당도 지어주고 노령연금과 노인일자리, 항만청소 등을 통해 조금씩 용돈이 나와 고맙죠. 아프지 않고 자식들한테 짐되지 않고 조용히 자다가 죽었으면 좋겠어요."
연간 10만여명이 찾는 문화유산
거문도 등대는 1905년 4월 10일 준공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인천 팔미도 등대에 이어 두 번째 설치된 등대이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등대는 남해안 최초의 등대이다.
높이 6.4m, 해수면으로부터 69m 절해 고도에 우뚝선 거문도 등대는 연와조로 만든 하얀 색상이다. 절벽 아래는 사람이 접근할 수 없을 정도로 깎아지른 절벽이다. 등탑 자체가 문화유산인데가 등대까지 가는 동백나무 숲길이 아름다워 연간 10만명의 관광객이 방문한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한라산과 백도가 보이기도 한다.
거문도 등대는 일본인들의 군사적 목적에 의해 건립되었지만 현재는 인근 바다를 항해하는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