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이어졌다. 영화가 후반부로 접어들자, 한숨은 훌쩍이는 소리로 바뀌었다. 96분이 흘러 엔딩 자막까지 다 올라갔지만, 긴 여운에 누구도 자리에서 쉬이 일어나지 못하는 모습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206: 사라지지 않는>(감독 허철녕, 아래 <206>)은 사람의 뼈에 대한 이야기다. '206'은 인체의 뼈의 개수다. 한국전쟁 전후 국가에 의해 억울한 죽임을 당했던 민간인희생자들의 '유해'와 이를 발굴하는 시민발굴단의 4년여 간의 활동에 대한 장편 기록물이다.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가 활동을 종료하자 유해 발굴도 중단됐다. 정부가 유해 발굴을 외면하자 시민단체가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을 결성(2014년) 결성하고 직접 삽과 호미를 들고 직접 유해발굴 자원봉사에 나섰다.
지난 25일 산내골령골대책회의 주최(희망철도재단, 민주노총대전본부 후원)로 씨네 인디 U(대전 중구 계백로 1712, 1층)에서 영화 <206>이 오후 5시와 7시 40분 두 차례 상영됐다.
이날 영화를 관람한 박철웅 목원대 티브이 영화학부 교수는 "관련 다큐멘터리물이 피해자 이야기에 쏠리거나 이념이 과잉된 경우가 많은데 이 영화는 뼈를 통해 학살사건을 가까이에서 사유하게 하면서도 객관적 태도를 잃지 않고 있다"며 "수작"이라고 평가했다.
관객들을 흐느끼게 한 영화 속 마지막 발굴 현장은 아산 설화산 현장이다. 관객들만이 아니었다. 영상을 보면 유해를 발굴하던 시민 발굴단 모두를 울부짖게 했다. 엄마 등에 업힌 상태에서 총알을 맞고 숨진 두 살배기 아이의 뼈를 발굴한 임영순씨(추모연대 사무처장)는 일손을 놓고 부근 나무를 부여잡고 슬픔을 쏟아냈다.
일흔을 훌쩍 넘긴 박선주 유해발굴단장(충북대 명예교수)은 시민발굴단의 유해 발굴을 총괄했다. 국군유해발굴을 비롯해 전국의 크고 작은 유해 발굴 현장을 누비며 유해를 수습하던 그였지만 유해를 부여잡은 그의 얼굴은 끝내 일그러졌고 "너무 늦게 발굴해 죄송하다"며 흐느꼈다.
이날 허철녕 감독은 관객과의 대화에서 "영화에 소개되는 발굴 현장은 여러 곳이지만 시민발굴단은 물론 영상을 찍는 제게도 심리적으로 가장 힘든 곳이었다"고 말했다.
처참했던 설화산 현장... 은반지 낀 20대 여성 유해도
아산시 배방읍 설화산 발굴지는 시민발굴단의 5번째 유해 발굴지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금을 캐던 폐금광이었다. 1950년 전쟁이 일어났고 아산지역도 약 두 달 여 동안 북한군이 점령했다. 같은 해 9월 말 국군이 수복했지만, 경찰은 치안대는 북한군에 동조한 부역혐의자 색출에 나섰다. 1951년 1월, '좌익분자 및 동가족'을 정미소에 감금했다. 이어 설화산 폐금광으로 끌고가 살해했다. 당시 증언에 따르면 아이들은 엄마 손을 잡고 설화산을 올랐고, 아이를 품에 안은 엄마들도 있었다.
부역 혐의자 체포는 주로 주민들의 증언이나 밀고로 이루어졌다. 아산 전역에 불어닥친 광란의 사상 검증에 청년 대부분은 도주했다. 그러자 경찰과 치안대는 부역 혐의자 가족들을 대신 감금했다.
2018년 진행된 설화산 유해 발굴 현장은 참혹했다. 까맣게 탄 유해와 불에 탄 옷감이 엉겨 붙어 있는 유해가 발굴됐다. 총살 후 확인 사살을 위해 폐금광 안으로 연기를 피워 질식사시켰다는 증언을 뒷받침했다. 왼손 약지(넷째 손가락)에 은반지를 낀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의 손가락뼈도 발굴됐다.
죽은 아이가 평소 가지고 놀던 구슬도 나왔다. 구슬의 주인으로 보이는 8~9세 아이의 뼈도 발굴됐다. 아이의 뼈에는 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어른의 뼈가 뒤엉켜 있었다. 아이를 품고 안고 죽은 것으로 추정됐다.
이곳에서는 208명의 유해와 551점의 유품이 발굴됐다. 이중 미성년 아이들이 58명으로 가늠됐다. 어른은 150명이었는데 이 중 84%가 여성이고 남성은 21~24명(14~16%)으로 집계됐다. 무차별 학살은 유품을 통해서도 드러났다. 아이 신발은 물론 여성용 비녀 89점이 출토됐다.
허 감독은 "좁은 구덩이에서 나온 유해가 대부분 어린이, 여성 등 노약자였고 특히 두 살도 안 되는 유아의 뼈도 나왔다"며 심리적으로 견디기 힘들었던 이유를 설명했다.
시민발굴단은 제주 4.3사건이나 노근리 사건처럼 아산 설화산 학살지에 대한 사건명을 피해 성격과 규모를, 상징성 등을 고려해 다시 이름 짓고, 재조사와 매장지 현장보존을 권고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후속 조치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장 힘든 건 비바람 아닌 어린아이의 뼈 수습"
당시 시민발굴단은 공식 유해 발굴 보고서 '맺는말'에 이같은 심경을 적었다.
"전쟁의 비극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참혹하고 참담했다. 이번 발굴조사는 전쟁의 폭력성과 파괴성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섣달 저문 밤, 십대 미만의 어린아이들이 젊은 엄마 손에 이끌려 눈 덮인 설화산 자락을 오르던 모습이 발굴 기간 내내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다.
발굴 조사 동안 가장 힘들었던 것은 비와 바람이 아니라 불에 그슬려 뒤엉킨 어린아이의 뼈를 수습하는 일이었다. 젊은 여성들의 쪽 찐 머리에 그대로 꽂혀 있던 은비녀와 큰 돌에 눌려 형태를 잃어버린 어르신들의 머리뼈를 수습하는 일이었다.
미래세대를 끌어 나갈 어린아이들이 영문도 모른 채 총상을 입고 쓰러진 전대미문의 참상 앞에 그저 말문이 막힌다. 아산 설화산 집단학살사건은 한국전쟁 사에서 전례 없던 반인륜적, 반인권적인 대규모 집단학살사건이다."
영화 <206>은 지난 7월 극장상영을 끝내고 지금은 전국을 돌며 공동체 상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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