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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름에는 비가 참 많이 왔다. 우리집 앞 개울에 이렇게 많은 물이 넘쳐난 것은 처음 봤다. 덕분에, 요란한 물소리로 넘쳐나는 계곡물을 멍청히 바라보며 마음속 찌꺼기를 몽땅 씻어내는 상쾌함을 맛보았다.

'이것도 시골생활 즐거움의 하나겠지?' 하는 생각도 잠깐, 급기야 집 앞에 있는 돌다리가 유실되는 난감한 상황이 되었다. 장마가 끝난 후 면사무소에서 고맙게도 포크레인을 보내주어 원상회복하기는 했지만.

시골은 그렇다치고, 서울에서는 이 장마 덕분에 재미있는 단어 하나가 생겼다. 흐르지오. 이번 여름에 신규 입주한 서울의 푸르지오 아파트가 침수되자 네티즌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귀에 쏙 들어오는 이름 아닌가? 시공사 입장에서는 아파트 잘 지으라는 백번의 충고보다 이 별명 하나가 더 뼈를 때리지 않겠는가?

옛 사람들은 본명 이외에 호나 자를 지을 때 그의 단점을 노출시켜 항상 이를 경계하며 살도록 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흐르지오'도 이런 교훈을 거울로 삼으면 좋을 듯싶다.

'날강두'라는 별명이 붙은 호날두도 마찬가지다. 호날두 보려고 거금을 들여 유벤투스를 초청했고 수많은 축구팬들이 어렵게 표를 구해 경기장에 갔지만 단 1초도 뛰지 않은 호날두에게 네티즌들은 '날강두'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날강도 짓 하지 말라는 충고겠지만 날강두가 이를 얼마나 귀담아 들었는지는 의문이다.

흐르지오나 날강두와는 다른 이유로 별명이 지어지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동대문이나 남대문을 보자. 동대문의 정식 명칭은 흥인지문(興仁之門)이다. 한양도성 4대문의 하나에 조선의 사대부들이 흥인지문이라는 이름을 붙일 때 그 이름에 심오한 뜻을 담았으리라.

허나 일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동쪽에 있는 문을 '동대문'이라고 하는 것이 편할 뿐만 아니라 이해하기도 쉬웠을 것이다. 이는 숭례문의 별명인 남대문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백성은 현명하다.

충청남도 부여는 인구 3만 정도의 작은 도시지만 보물과 국보가 가득한 곳이다. 정림사지오층석탑, 백제금동대향로, 왕흥사지 사리기, 산수문전, 낙화암, 백마강, 황포돛배, 고란사, 무량사….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주민 1인당 문화재가 가장 많은 곳이 바로 이곳 부여가 아닌가 싶다.
 
 백제관음보살입상
백제관음보살입상 ⓒ 윤재홍
 '미스 백제'의 뒷태
'미스 백제'의 뒷태 ⓒ 윤재홍

이 많은 문화재 중에는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의미있고 재미있는 별명을 가진 문화재들이 있다. 예컨대 '미스 백제'라는 조각상도 그 중의 하나다. 국립부여박물관에 있는 '미스 백제'의 정식 이름은 백제관음보살입상(국보 제293호)이다.

이 백제관음보살입상이 '미스 백제'란 애칭을 얻게 된 것은 아마도 균형잡힌 몸매 때문이 아닌가 싶다. 실제로 이 보살입상은 앞에서 보나 옆에서 보나 매우 균형잡힌 자태를 유지하고 있는데 특히 뒷태가 아름답다.
 
 6시5분부처
6시5분부처 ⓒ 윤재홍
 
시골 아저씨 같은 이 부처의 별명은 '6시5분 부처'이다. 정식 명칭은 '부여 군수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329호)이다. 부처님들은 일반적으로 고개를 반듯하게 들고 있는 데 비해서 이 부처님은 고개가 왼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이런 별명을 갖게 되었다. '6시5분'까지는 아니고 '6시1초' 정도 기울었지만, 별명이란 원래 작은 특징을 크게 과장하는 것이니까 그냥 애교로 받아주면 되지 않을까 싶다.
 
 '모딜리아니탑'이라는 별명을 가진 '부여 장하리 삼층석탑'
'모딜리아니탑'이라는 별명을 가진 '부여 장하리 삼층석탑' ⓒ 윤재홍
 
백마강 가까이에는 '모딜리아니탑'이 있다. 호적상 명칭은 '부여 장하리 삼층석탑' (보물 제184호)인데, 모딜리아니 그림처럼  목이 긴 탑이라서 '모딜리아니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백제의 미소 - 서산 마애삼존불
백제의 미소 - 서산 마애삼존불 ⓒ 윤재홍

내친김에 '백제의 미소'라는 별명을 가진 서산마애삼존불(국보 제84호)도 소개해 본다. 부처님들은 대체로 근엄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이 삼존불 부처님들은 밝은 미소를 머금은 장난기 어린 표정이다.

서산시 운산면의 산속에 숨어있던 이 부처를 세상에 알린 사람은 1950년대 부여박물관장이었던 홍사준 선생이시다. 홍 관장이 1959년 서산 보원사지의 유물을 조사하러 이 마을에 와 있었는데, 홍 관장이 마을 사람들에게 물었다.

"혹시 산에서 부처나 탑 같은 것을 본 적은 없습니까?"

어떤 나뭇꾼이 대답하기를,

"저 산속에 가면 환하게 웃는 부처님이 있지요. 그 부처님 옆에는 큰 마누라 하고 작은 마누라가 있는데, 작은 마누라가 다리를 꼬고 앉아 손가락을 볼에 대고 '용용 죽겠지' 하고 약을 올리고 있어요. 그러니까 큰 마누라가 화가 나서 작은 마누라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고 있지요."

홍 관장은 그곳을 찾아갔고 그곳에서 이 재미있는 모습을 확인했다고 한다.

백제관음보살입상이나 서산 마애삼존불 등 역사적 유물의 이름은 학술적으로 정해진 일정한 규칙에 따라 정해지기 때문에 그 족보를 분명히 하는데는 좋겠지만, 그 이름과 특징이 일반인들의 머릿속에 쉽게 각인되지는 않는 것 같다.

예를 들면, 탑의 이름은 '절이름+층수+재료'로 정해진다. 서울 종로에 있는 국보 제2호 석탑의 이름은 '절이름+층수+재료'의 원칙에 따라 '원각사 십층 석탑'이 된다. 그런데 절 이름만 있고 절 건물은 없이 절터만 남아 있는 경우는 절 이름 뒤에 터 지(址) 자를 붙인다. 따라서 지금 원각사 절은 없어졌고 절 터만 남아있기 때문에 현재 이 탑의 정식 명칭은 '서울 원각사지(址)십층석탑'이다.

그런데, 절 이름조차 모르는 어느 곳에 탑이 서 있는 경우는 절 이름 없이 '동네이름+층수+재료'의 체계로 탑의 이름이 정해진다. 부여 장하리에 있는 이 석탑도 학술적 항렬에 따라 이름이 지어졌기 때문에 호적상 이름은 '장하리 삼층석탑'이지만 애칭인 '모딜리아니탑'이 더 쉽게 뇌리에 각인되는 것은 역시 별명의 힘인 것 같다.

몇 년 전 간송미술관 전시회에서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문병(白磁靑畵鐵彩銅彩草蟲文甁)'이라는 길고 복잡한 이름을 가진 아름다운 백자를 본 적이 있다. 나는 이 특별한 백자와 특이한 이름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이렇게 길고 복잡한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궁금했다.
 
 백제금동대향로
백제금동대향로 ⓒ 윤재홍

부여박물관에는 1400여년 전 이 땅의 최고 공예품인 국보 제287호가 전시되어 있다. 아름답고 실용적이며, 현실과 이상을 아우르고, 장난기 가득한 허풍스런 동물들이 수많은 이야기를 펼쳐는 이 아름다운 작품의 이름은 '백제금동대향로'다. '백제시대에 금동으로 만든 대형 향로'. 이름이 너무 공식적이고 사무적이고 무겁지 않은가? 좀 더 산뜻한 애칭은 없을까? 네티즌은 현명하다. 당신의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기대해 본다.

ps. '백제의 미소'나 '모딜리아니탑' 같은 애칭이 일반인들이 좀 더 친근하게 문화재를 감상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 제9호),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 창왕명석조사리감(국보 제 288호), 왕흥사지사리기(국보 제327호) 등 무거운 이름을 가진 국보급 문화재에 일반인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애칭을 지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는 백제문화단지 해설사입니다.


#부여#국립부여박물관#백제금동대향로#별명#미스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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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문화단지 해설사(영어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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