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는 최후의 순간인 1949년 6월 26일에만 '저격'을 당한 게 아니다. 그는 항상 위험을 안고 살았다. 62세 때인 1938년 5월 6일에는 중국 양쯔강 근처 창사시에서 독립운동진영의 통합을 논의하다가 반대파인 이운환(이운한)의 총탄을 맞았다. 독립운동가 김가진의 며느리인 독립투사 정정화의 <장강일기>엔 이렇게 묘사돼 있다.
"조선혁명당의 청사로 사용되던 남목청에서 회의를 하기 위해 모인 임정 요인들에게 이운환이라는 청년이 권총을 발사했던 것이다. 백범이 가장 먼저 가슴에 총을 맞았고, 이어 춘교 유동열, 백산 이청천, 묵관 현익철 등이 중상을 입었다. 그중 묵관은 끝내 사망했고, 백범과 춘교는 병원으로 급히 옮겨졌다."
'총알이 심장을 스쳐가는 중상'을 입은 김구는 피격 당시를 기억하지 못했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병상에서 정신을 차린 그는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고 "음주 졸도돼 입원했다"는 답을 들었다.
계속 진찰을 받는 중에 가슴의 상흔이 이상하게 느껴진 백범은 상처의 연유에 대해 캐물었다. 의사로부터 들은 건 "졸도 시 상 모서리에 엎어져서 작은 상처가 난 것 같다"는 대답뿐이었다. 환자의 상태가 악화될까봐 의료진이 피격 사실을 숨겼던 모양이다.
동지의 죽음 안타까워한 김구... 멀리서 목례만 한 추석
김구는 한 달이 가까워진 뒤에야 자신이 총격을 받은 사실과 더불어, 그때 희생된 독립운동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수행한 48세의 현익철이 병원 도착 직후에 운명했다는 비보를 뒤늦게 접했다. 김구는 "순국한 현익철군은 나이 오십 전이었고 사람됨이 강개하며 아는 것이 많았다"면서 그리워했다.
이운환이 노린 제1표적은 김구였으므로, 살아남은 김구가 현익철에게 품는 미안함과 안타까움은 강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마음이 유독 강해진 날이 팔월 한가위였다.
그해 추석인 양력 10월 8일이었다. 어느 정도 몸을 추스른 김구가 중국 남동부 광저우에서 남서부 충칭으로 이동할 때였다. 서쪽으로 이동하던 중 추석을 맞은 그는 묵관 현익철의 묘소가 근처에 있음을 알게 됐다. <백범일지>는 이렇게 설명한다.
"나중에 광주에서 조성환·나태섭 두 동지와 함께 중경으로 오던 길에 장사에서 귀양 가는 차를 기다리게 됐는데, 그때가 바로 음력 추석날이었다. 나는 현묵관의 묘소를 참배하겠다고 주장했지만, 두 동지가 극력 만류해 둘만 술과 안주를 가져가서 참배했다.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먼 길을 가는데, 내가 묵관의 묘 앞에 당도하면 애절 통절해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무슨 변이나 나지 않을까 걱정돼 동행을 못 하게 했다는 것이다."
추석날 현익철 묘소를 지척에 두고도 성묘를 못한 김구는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묘소 위치를 확인했다. "차를 타고 가던 중에 두 동지는 길가 산중턱에 서 있는 비석을 손으로 가리키며 저것이 현묵관 묘라 하기에 나는 목례를 했다"고 김구는 회고했다. "군은 편히 쉬시라. 그대의 부인과 자식들은 내가 안전하게 보호하리니"라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의 <백범 김구 평전>은 김구가 조성환·나태섭과 함께 움직인 이 시기를 서술하면서 "임시정부와 백범에게 중일전쟁이 격화된 1938년은 피난에서 피난으로 유랑하는 고달픈 한 해였다"고 평한다. 그런 고달픈 유랑의 와중에 김구가 가슴 아픈 추석을 보냈던 것이다.
망명지의 독립운동가들은 어땠을까
중국에서 활동하는 김구 같은 독립운동가들이 추석 때마다 머릿속에 떠올렸을 고국의 명절 풍경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3.1운동 2년 뒤에 발행된 1921년 9월 16일 <동아일보> 기사 '금일은 추석'은 "추석이 되면 떡을 맨들고 과실을 사서 제물을 준비하야 가지고 각각 디방의 풍속과 그 집안 가풍을 따라서 혹은 집안에서 혹은 산소에 가서 다례를 지내는 일이 잇는대"라는 말로 한가위 풍경을 묘사했다.
김구와 현익철이 저격 당하기 8개월 전에 발행된 1937년 9월 19일자 <조선일보> 기사 '음력 팔월 보름, 오늘은 추석날'은 "추석에 딸어다니는 음식은 국으로서 도란과 떡으로서 송편의 두 가지"라며 "그중에서도 도란국보담 송편은 추석을 차리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조건"이라고 강조했다. 국 중에서는 토란국이고 떡 중에서는 송편이지만, 토란국보다는 송편이 더 중요하다는 기사다.
음식도 음식이지만, 여럿이 어울려 성묘 가는 풍경은 망명지의 독립운동가들에게 특히 아련했을 것이다. 위의 1921년 기사는 한가위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오늘 묘디가 만흔 곳에를 가면 어대든지 남녀로소가 묘소에 와서 처량스러운 소래로 우는 것을 볼 수 잇스며 어린 아해와 아가씨들은 꼿가치 아름다운 추석비음을 입고 새 실과들을 주고밧으며 노는 것도 재미잇스며 밤이 되면 일년에 뎨일 밝은 가을 달을 놋치 말고 실컷 보는 것도 조흔 일이라 하겠더라."
해외 독립운동가들은 가족 못지않은 동지애를 서로 느꼈다. <백범일지>에도 독립운동가들을 지칭하는 "대가족"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추석날 현익철 묘소를 지척에 두고도 직접 성묘하지 못한 김구의 마음은 그래서 더욱 아팠을 것이다.
추석마다 "날으는 유격대장 홍범도" 찾은 고려인들
추석날 독립운동가를 성묘하는 광경은 옛 소련 땅에도 있었다. 봉오동 전투의 영웅인 홍범도가 말년을 보낸 카자흐스탄의 고려인들도 추석 때마다 홍범도를 찾았다.
소련 해체 2년 전에 발행된 1989년 9월 8일자 <동아일보> 17면 특집 기사는 일본군에 대승을 거둔 뒤 그들의 대대적인 보복 공격에 밀려 러시아 경내로 쫓겨갔다가 그곳에서 비운의 생을 마감한 홍범도의 일생을 간략히 소개했다.
그러면서 "날으는 유격대장 홍범도가 중앙아시아 반(半)사막지대에서 날개를 접은 내력은 바로 한민족의 슬픈 역사를 대변한다"고 썼다. 공산주의가 좋아서 소련 땅에 정착한 게 아니라 일본군에 쫓겨서 거기까지 밀려갔다가 결국 날개를 접은 홍범도에 대한 연민이 묻어나는 서술이다.
이 기사는 홍범도가 사망한 1943년에 현지 교포들이 시청과 교섭하는 한편, 자금을 갹출해 대리석 묘비와 흉상을 세운 일을 소개했다. 그런 뒤 현지 매체의 고려인 주필인 '한 하리도니치'의 말을 이렇게 소개했다.
"한 주필은 '홍 장군은 고려인은 물론 지방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장군에 대한 숭배가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 이후 민족에 대한 각성과 함께 더욱 높아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한식·추석 때면 공동묘지에 부모 친척을 모신 고려인들이 수백 명씩 모이고 이때 홍 장군에 대한 예의도 갖춘다는 것."
1943년에 소련 땅에서 작고한 홍범도에 대한 추모가 1989년까지 계속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식이나 추석 때 공동묘지를 찾은 고려인들이 홍범도의 묘소도 잊지 않고 찾는다고 했다. 홍범도에 대한 고려인들의 애정이 그런 추석 풍경으로도 나타났던 것이다.
그런데 2023년 추석은 홍범도에게 매우 이질적인 명절일 듯하다. 일본 땅도 아닌 고국 땅에서, 일본군이 아닌 윤석열 정권의 추격을 받는 가운데 추석을 맞는 터라 홍범도에겐 가슴 아픈 추석일 수밖에 없다.
1938년 백범 김구는 자신의 옆에서 희생된 젊은 동지의 묘비를 차창 밖으로 바라보며 그냥 지나쳐야 했다. 그해 추석은 김구에게 가슴 아픈 추석이었다. 홍범도의 2023년 추석은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