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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 동네 어느 로터리에 비석이 하나 있는데, 거기 새겨진 문구는 다음과 같다. '바르게 살자.' 말 잘 듣는 사람이 바른 사람 아닌가, 아직도 저런 문구를 급훈으로 삼으려나 하며 속으로 웃은 적도 있다.

바르게 산다는 게 도대체 뭔가 싶은 의문을 품었다. 이번 여름 마주한 두 작품, 지난 7월 말 무대에 오른 연극 <아이히만, 암흑이 시작하는 곳에서>와 8월에 개봉한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보고서 '바르게 살자'는 문구가 문득 떠올랐다.

'바람직한 선택'이란 무엇인가?
 
 연극 <아이히만, 암흑이 시작하는 곳에서> 포스터.
연극 <아이히만, 암흑이 시작하는 곳에서> 포스터. ⓒ 극단 파수꾼
 
연극 <아이히만, 암흑이 시작하는 곳에서> 중 아렌트는 악의 기원을 파헤치는 탐정과 같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 다그치듯 묻는다.

"왜 수용소에서 일어난 가스 학살을 외면했나요? 아니, 왜 적극적으로 동조했나요? 도대체 왜?"

히틀러와 나치에 반대하면서 저항한 독일의 어느 청년의 죽음을 거론하며,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다른 선택지도 존재했다고 울분에 차 외친다. 시종일관 담담하던 아이히만의 한마디 던진다.

"그때 아렌트 당신은 미국 대학의 평온한 교정을 거닐고 있지 않았나요?"

그는 조곤조곤 당시 전황을 짚으며 그 혼란 속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것이라고 항변하고, 당신이 그 격전지에 있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 것이냐고 반문한다. 그러자 아렌트는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고 소리친다.

아렌트의 호소는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도균이 아파트 난간에서 뛰어내리기 전 황궁아파트 주민들을 향해 소리친 말과 겹친다. '사람이 해도 되는 짓이 있고 안 되는 짓이 있다.'

명화 또한 인종주의의 전형인 황궁아파트에서의 바퀴벌레 청소 작전에 부조리함을 느낀다. 다 같이 살 수 있는 길을 찾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기에, 모세범과 황궁 아파트 주민들의 폭력적인 행태를 막아서고자 했다.

인간다움의 가치를 지키려고 한다는 점에서 아렌트와 명화, 도균은 '바른 사람'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관객에게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질문을 하게 한다. 어떤 정답을 제시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더 나은 선택이 있다는 걸 암시한다. 세로로 우뚝 솟은 황궁아파트 대신 가로로 뉘어진 아파트 주변에서 다 같이 솥을 걸고 밥을 지어 나눠 먹는 그런 따뜻한 그림말이다.

하지만 도대체 바른 삶이 어떻게 가능한가? 어떻게 그곳에선 연대와 호혜가 실현될 수 있었나? 영화는 별다른 설명 없이 그런 이상적인 모습을 살짝 보여준 뒤 끝나버린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스틸샷.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스틸샷. ⓒ 롯데엔터테인먼트
 
다시 물어보자. 정말 내가 그 상황에 놓이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춥고 배고프니 문을 열어달라고 할 때, 선뜻 열어줄 수 있는가? 물론 모든 게 무너진 상황에서 그 문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 있다. 하지만 그들에겐 '문'이야말로 자신의 안전, 더 정확히는 생존을 담보해주는 무언가일 수 있다. 내 집과 내 몫에 관한 욕망이 설령 착각이라고 하더라도, 쉽게 포기할 수가 없다.

그 욕망 뒤편에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황궁아파트 주민들에게 짙게 깔린 정서가 있다. 바로 타자에 대한 불신이다. 민성처럼 자기 집에 들인 사람의 눈치를 보며 불편해하는 것에서부터 모르는 누군가에게 칼 맞고 죽을 위기에 처할까봐 무서워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유에서 그들은 불안에 놓인다.

황궁아파트 주민들이 특별히 나빠서 그런 게 아니다. 그들은 살고자 할 뿐이다. 인간다움의 가치가 그들의 생존을 담보해줄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나눔이 도덕적으로 옳다고 머리로는 이해하더라도, 내 몫을 양보했을 때 그것이 호혜로 이어질지 배신으로 이어질지 확신할 수 없다.

대신 확실한 것이 있다. 바로 아파트 주민과 외부인의 경계다. 그 징표만큼 명징한 게 없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가 확실히 보이고, 불안이 안정으로 바뀐다. 그러니 문과 담장이 모두 무너져 경계가 완전히 사라졌다 해도, 다시 경계를 그음으로써 안정을 확보하려 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인간다움을 말하는 이들은 속 편한 사람이 돼 버린다. 누구는 바깥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며 먹을거리를 구해올 동안, 저들은 그 식량을 배급받으면서 멋들어진 말이나 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정서가 견고한 상황에서 '바르게 살자'는 도균의 호소는 조소의 대상이 될 뿐이다.

위협 앞에서 사라지는 타인의 이야기

경제적 위협이든 물리적 폭력이든, 삶 자체가 위험에 빠질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게 될까? 최근 연이은 무차별 살상 사건 이후, 예방이라는 명목으로 강화된 치안 활동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어느 한 중학생이 무고하게 용의자로 의심받았고 무리하게 체포되는 과정에서 크게 다치는 일이 있었다. 혜화동에서는 과거 형제복지원 사건의 피해자였고 홈리스 야학에서 활동하던 분이 오토바이의 굉음에 놀라 칼을 들고 나갔다가 체포되기도 했다. 후자의 경우, 과거 그가 겪은 빈곤과 국가폭력으로 인한 트라우마, 그간의 사회활동과 사람됨을 참작해달라는 1015명의 탄원서가 제출됐다. 물론 흉기가 될 수 있는 물건을 지닌 채로 다른 사람이 보기에 위협적으로 비칠 수 있는 행동을 했지만, 그의 장애 특성과 생애과정을 고려한다면 구속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생의 위협 앞에서 타자가 간직한 서사는 완전히 어둠 속에 묻힌다. 문을 두드리는 이들이 누구인지는 안중에 없다.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저들이 내 안전과 생존을 저해하지 않는지가 중요하다. 치안 권력 앞에서 이야기는 속절없이 사라진다. 법적 판단과 안전과 위험의 기준만이 남는다.

그런데 정작 우리 스스로 이런 치안 권력을 욕망하게 된 건 아닐까. 단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그게 사람이 할 도리예요'라는 호소만으로 충분할까? 타자의 이야기를 듣는 게 이해의 출발점이라지만, 누군가에게 귀 기울일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겨날 수 있을까? 삶의 안정을 회복하고 싶다는 욕망을 경계 긋기와 치안 권력이 아니라 연대와 호혜의 방향으로 향하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뭐랄까. 세범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세범은 제값을 다 치르고 아파트를 샀지만 정작 사기를 당해 법적으로 등기하지 못했다. 명화 또한 아파트 주민과 비주민의 경계를 근거 삼아 세범의 정당성을 무너뜨렸고 세범의 전후 사정에는 관심이 없었다. 어느 순간 세범도 영탁을 죽이고 주인 행세를 하는 바퀴벌레가 돼 있었다. 참 역설적이다. 바르게 산다는 게 도대체 뭐길래.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박기형 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선전위원입니다. 이 글은 한노보연 월간지 일터 23년 8월호에도 실립니다.


#영화_콘크리트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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