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재보험은 산재노동자의 치료, 재활, 사회복귀 등을 위한 거의 유일한 사회적 안전망이다. 이에, 산재보험의 보호를 받을수 있는지 여부는 사고와 질병 이후에 노동자와 그 가족의 삶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행 산재보험이 안고 있는 여러 구조적 문제점들로 인해 산재노동자들의 권리가 온전히 보장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한 효과적인 해법으로 최근 '산재보험 선보장 제도' 도입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선보장 제도란 산재노동자가 병원에서 치료를 개시함과 동시에 의사의 판단으로 산재보험이 자동 적용되고, 사후에 승인 여부를 최종 확정하는 제도를 말한다. 이하에서는 현행 산재보험이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점, 이에 대한 해법으로 제기되고 있는 선보장 제도의 내용, 그 도입을 둘러싼 쟁점 등을 살펴보도록 한다.
현행 산재보험의 구조적 문제점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현행 산재보험은 산재노동자의 보상받을 권리를 제약하는 여러 구조적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첫째, 사업주의 은폐, 산재노동자의 인식 부족 등으로 인해 산재보험의 이용률이 낮다. 현행 산재보험은 산재노동자의 신청이 있어야만 보상이 가능하므로, 산재노동자가 사업주가 두려워 신청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사고, 질병이 산재임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보상이 불가능한 구조다.
둘째, 산재에 대한 입증 책임이 노동자에게 전가됨으로써 사업주의 태도, 노조 유무 등에 따라 산재 인정 여부가 달라지는 불합리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산재보험에서 산재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다양한 증거, 자료 등이 필요한데, 사업주가 비협조적이거나 노조가 없어 사업주의 자료 협조를 얻기 어려운 경우 등에는 산재를 인정받기 힘든 상황이 발생한다.
셋째, 장기간의 산재 심사 기간에는 보상이 이뤄지지 않으므로, 산재 심사가 끝날 때까지 산재노동자가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특히, 업무상 질병은 재해 조사에 장시간이 소요되고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를 거쳐야 하므로, 산재 심사 기간이 매우 길다.
구조적 문제 해결할 수 있는 산재보험 선보장 제도
선보장 제도는 쉽게 설명하면 산재보험에 건강보험 프로세스를 적용하는 방안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산재노동자가 병원을 방문하면, 의사가 일차적으로 산재 여부를 판단하여 산재보험을 자동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물론 의사가 산재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노동자가 원하는 경우는 직접 산재 신청을 할 수 있다. 다만, 이 경우는 선보장이 적용되지 않는다. 결국, 선보장 제도는 현행 건강보험에서 환자가 병원을 방문하면 건강보험이 자동으로 적용되는 것과 같은 프로세스다. 그렇게 되면, 산재노동자는 산재 심사 기간 병원비(요양급여)와 임금 보상(휴업급여)을 산재보험에서 받을 수 있다.
그 후 산재판정기구에서 최종적으로 승인 여부를 확정하고 불승인 시에는 사후 정산을 하는 방식이다. 이 역시 현행 건강보험에서 우선 건강보험이 적용되고 사후에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등 평가를 거치는 것과 같은 프로세스다.
선보장 제도가 시행되면, 앞서 살펴본 산재보험의 구조적 문제점들을 대부분 해결할 수 있다. 우선, 의사가 산재 여부를 판단해 산재보험이 자동 적용되므로 사업주의 은폐, 산재노동자의 미인식 등으로 인한 산재보험 미적용의 문제는 자동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
다음으로, 산재노동자의 입증이 아니라 산재판정기구가 산재 여부를 자체적으로 판단하게 되므로, 산재노동자의 입증 능력의 차이와 무관하게 공평하게 산재 보험이 적용될 수 있다. 또한 산재 심사 결과 전에 치료비와 임금 보상은 우선 진행되므로, 산재 심사 기간 산재노동자의 경제적 부담이 훨씬 줄어들 수 있다.
산재보험 선보장 제도 도입을 둘러싼 쟁점 검토
선보장 제도 도입을 둘러싼 가장 큰 쟁점 들은 의사가 일차적으로 산재로 판단하더라도 사후에 산재가 불승인되는 경우 기지급된 보험급여를 과연 회수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미회수 보험급여를 포함해 선보장 제도를 운영하는 데 소요되는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등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대안들이 제시될 수 있다.
첫째, 상병수당제도와 연계할 수 있다.
상병수당제도는 부상, 질병 등으로 인한 소득 손실을 건강보험에서 보상해주는 제도다. 국민건강보험법 제50조는 상병수당 제도를 실시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으므로, 그 시행을 위한 법적 근거는 이미 마련되어 있다. 이에, 정부는 2022년에 6개 지역에서 시범사업을 진행했고 2023년 7월 3일부터 4개 지역에서 2단계 시범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상병수당제도가 도입될 경우, 사후에 산재가 불승인되더라도 기지급된 보험급여 회수의 문제나 이와 관련한 재정적 부담은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둘째, 산업재해보상보험 및 예방기금을 활용할 수 있다. 이 기금은 산재보험 운용을 위해 적립된 기금으로, 사업주가 낸 보험료 등으로 조성된다. 2020년 실제 적립된 책임준비금은 법상 반드시 적립해야 할 법정책임준비금에 비해 무려 15조 1118억 원이나 초과 적립되었다. 이 기금은 사업주가 낸 보험료 등으로 조성된 것으로, 법정책임준비금을 제외한 금액은 모두 노동자들을 위해 지출하는 것이 타당하다.
만약, 이 기금을 활용한다면, 선보장 제도 운영에 소요되는 재원은 충분히 충당 가능하며, 사후 산재 불승인 시 기지급 보험급여 회수와 관련한 재정적 문제점도 상당 부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살펴본 방안들을 적용하더라도, 선보장 제도를 일시에 전면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소요재원 마련은 물론 사회적 공감대 조성, 법제도 정비 등에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들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부 산재 영역으로부터 그 적용 범위를 단계적으로 확대해 나가는 방식, 부분적인 선보상으로부터 그 선보상 범위를 단계적으로 확대해 나가는 방식 등을 고려해야 한다.
형평성 회복할 가장 효과적인 방안
사회보험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형평성'이다. 즉 모든 국민이 차별 없이 공평하게 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산재보험이 사회보험이라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재보험은 노동자가 어떤 사업주에 고용되어 있는지, 보험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있는지 등에 따라 그 혜택 여부가 달라진다. 즉 사회보험으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형평성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이 문제점을 잘 알면서도 너무 오랫동안 방치해 왔다. '산재보험 선보장 제도'는 산재보험의 형평성을 회복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안이다. 더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유성규는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정책연구위원, 공인노무사입니다. 이 글은 한국비정규노동센터에서 발행하는 격월간 <비정규노동> 9,10월호 '정책칼럼' 꼭지에도 실렸습니다.